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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쿠데타 세력의 움직임은 4·19혁명 이후 처음 정군운동(整軍運動)으로 나타났다.

4·19혁명의 여파로 군 내부에서도 군의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타나게 되었고, 인사적체 등 군 내부 불만과 결합되어 정군운동이 전개되었다.

먼저 1960년 5월 2일 박정희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이 3·15부정선거와 각종 군부 비리의 책임을 물러 송요찬(宋堯讚) 참모총장의 사퇴를 요구했다.

이어 5월 8일에는 김종필(金鍾泌)·김형욱(金炯旭)·길재호(吉在號)·옥창호(玉昌鎬)·신윤창(申允昌)·최준명(崔浚明)·석창희(石昌熙)·오상균(吳尙均) 등 육사 8기생 8명이 정군을 위한 연판장을 작성하였다가 국가반란음모라는 죄목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뒤에 연합참모부장인 최영희(崔榮喜) 중장과 미국 국방부 군원국장 팔머(W. B. Palmer) 대장의 성명을 성토하여 세칭 하극상사건(下剋上事件)으로 피소되기도 하였다.

정군운동의 결과 1960년 5월 20일 송요찬 참모총장, 5월 31일에는 당시 한국군에서 최고 계급을 갖고 있던 백선엽 대장 등이 자진 사퇴를 발표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미국의 반대와 허정 과도정부의 미온적 대응으로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특히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매그루더는 송요찬의 사임 직후인 1960년 5월 25일부터 29일까지 거의 매일 공개적으로 4·19혁명으로 인한 정치적 변동이 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며 정군운동을 견제하는 발언을 했다.

 

장면 정권 하에서도 정군은 지지부진하였다. 정군운동은 사실상 중장급 장성들의 반수 정도가 퇴진하고, 소장 3명이 퇴진한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 되었다.

한편 군내에서 하극상으로 간주되는 집단행동을 한 영관급 장교들도 역시 미온적으로 처리되었고 정군파 장교의 실질적 리더였던 박정희도 12월 7일에 한직(閑職)인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되는 정도였다.

결국 장면 정권은 정군운동을 미온적으로 처리하여 군 내부 불만을 해소하지도 못했고 또 쿠데타 주도세력의 형성을 막지도 못하였다.

 

이에 1960년 가을부터 일부 정군파 장교집단을 중심으로 쿠데타 모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1960년 9월 10일 이른바 ‘충무장 결의’를 통해 더 이상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쿠데타를 결의했다.

김종필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은 박정희 세력과 결합되어 쿠데타 핵심 주도세력을 형성하고 본격적인 세력 규합에 나섰다. 특히 이들은 이른바 ‘비둘기 작전’이라는 장면 정권의 폭동진압계획을 적극 활용했다.

 

장면 정권은 다양한 사회운동을 군사력 중심의 물리적 탄압으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준비된 것이 ‘비둘기 작전’이라는 폭동진압 계획이었고, 이를 효율적으로 집행할 적임자로 장도영을 선택해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장도영은 주요한 정군 대상 인물로 예편원까지 제출했었는데, 매그루더의 지원과 장면 정권의 정치적 이해가 맞어떨어져 결정적 시기의 참모총장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었다.

 

쿠데타 주도세력은 장면 정권의 의도를 역으로 이용해 폭동진압작전에 동원될 서울 근교 부대들의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했다.

 

그 결과 육군 제6관구사령부 · 육군 제33사단 · 육군 제34사단 · 육군 제12야전공병대 · 육군 제1공수단과 육군본부·국방부의 중견장교들이 다수 쿠데타 세력에 포섭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金潤根) 준장이 중심이 된 군사 쿠데타 계획도 있었지만 육군의 쿠데타 세력과 연결되면서 통합되기도 하였다.

 

한편 장도영이 참모총장이 된 것은 박정희와 쿠데타 세력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박정희는 오랫동안 장도영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당시 장도영이 2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박정희는 휘하의 부사령관이었다.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대령이나 제1공수단장 박치옥 등은 박정희보다는 장도영과 가까운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 항간에는 쿠데타설이 파다하게 퍼져나가고 있었는데 1961년 들어서는 이른바 ‘3·4월 위기설’이 대두되어 사회적 분위기도 무르익어 갔다. 이때부터 쿠데타는 모의 단계를 넘어 본격적 실행 단계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1년 3월 경부터 폭동진압계획에 동원될 군부대 장교들을 포섭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해서 조직된 장교 40여 명이 쿠데타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1961년 4월 6일 명동의 양명빌딩에 모여 쿠데타 참여를 맹세했다.

이렇게 쿠데타 준비를 마친 이들은 1961년 4월 19일 4월혁명 1주기 때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 폭동진압 명령이 내려지면 자연스럽게 시내로 진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계획의 실행을 위해 학생들의 시위를 과격한 방향으로 조장하기 위해 비밀공작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과 달리 조용하게 지나가자 5월 12일을 다시 거사일로 정했다. 이 계획 역시 사전 정보 누설로 무산에 그치고 마침내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동안 이러한 혁명기도의 정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정보기관에 알려졌고, 그 때문에 장면 총리와 현석호(玄錫虎) 국방장관이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을 불러 물었으나, 장 총장은 “박정희 소장은 그런 위인이 못 된다.”는 답변으로 수뇌부를 안심시켰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로 해병대가 출동하게 된 것을 기점으로,

공수단은 박치옥(朴致玉) 대령에 의하여 출동하고,

제6군단 포병대는 군단참모 홍종철(洪鍾哲) 대령과 문재준(文在駿) 대령·구자춘(具滋春) 대령에 의하여 제933대대, 백태하(白泰夏) 중령에 의하여 제822대대, 김인화(金仁華) 중령에 의하여 제911대대가 각각 출동하였다.

 

한강 대교에 도달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지시로 출동한 헌병 제7중대 병력과 약간의 총격전 끝에 서울시내로 진입하였다.

이들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육군본부를 접수한 제6군단 4개 포병대와 합류한 뒤, 주력은 서울시청에 진주하고,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을,

공수단은 중앙방송국을 이날 상오 4시 30분경 각각 접수하였다.

또한 공수단은 장면 총리의 숙소이던 반도호텔을 급습하였으나, 총리의 도피로 체포하지 못하였다.

 

장면 총리는 애초 쿠데타 소식을 듣고 미 대사관으로 피신하고자 했으나 신원불상자라는 이유로 출입이 저지되었으며 재차 미 대사관 숙소로 피신하고자 한 시도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이에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몸을 피하게 되었다.

 

당시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실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주요 군 지휘자 중의 하나였던 1군사령관 이한림은 쿠데타 진압에 적극적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모호한 입장과 국군끼리 피를 흘릴 수 없다는 윤보선 대통령의 입장으로 진압작전은 시행될 수 없었다.

 

사실상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지자 쿠데타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쿠데타군은 서울 전역을 장악하고, 지방에서도 중요 도시인 대구·부산·광주·대전 등지를 장악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쿠데타군은 이날 상오 5시 서울중앙방송국 첫방송을 통하여 “우리 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 목적을 전하고 이른바 ‘혁명공약’ 6개 항을 밝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 공약은 김종필 주도로 작성되었으며 당시 지식인 사회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사상계』를 많이 참조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방송은 이 날 ‘군사혁명위원회’가 조직되어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통합 장악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위원회는 임시 육군본부 상황실에 설치되었고, 장도영 참모총장은 그 날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직을 수락하였다.

 

 

 

 

 

 

 

 

1961-05-16 탱크를 몰고 남대문 근처에서 경계근무를 하는 혁명군.  

 

 

1961-05-16 새벽에 혁명군은 KBS를 접수해서 군사혁명이 발생했음을 알렸다.

 

 

1961-05-16 혁명군이 뿌린 혁명공약서

 

 

5..16 군사 혁명일 시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당시 남대문경찰서장이 거리에 붙인 대자보.

 

 

1961-05-16 중앙청 세종로를 경계근무 중인 혁명군 모습

 

 

덕수궁 대한문에서 시청광장을 바라보며 경계근무 중인 혁명군

 

 

1961-05-16 덕수궁 대한문앞에 진주한 혁명군

 

 

1961-05-16 당시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거리 모습

 

 

1961-05-16 세종로 민의원 앞과 시청앞에 주둔한 혁명군

 

 

1961-05-16 지금의 서울시 의회 건물인 태평로의 舊국회의사당을 점령한 혁명군

 

 

1961-05-16 서울역에 진군한 혁명군.  

 

 

1961-05-18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행진이 동대문을 지나오고 있다.   

 

 

1961-05-18 5.16혁명을 지지하는 예비역들의 행진.  지금은 사라진 종로2가 화신백화점앞을 지나고 있다.

 

 

1961-05-18 거국적인 혁명을 지지하는 여학생들의 시가행진.

 

 

1961-05-18  문화예술인들의 5.16혁명 지지성명 발표와 시가행진

 

 

연도에 군사혁명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박수로써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행진을 지지하고 있다.   당시는 4.19 이휴 사회의 주도세력인 학생집단과 온갖 이익집단의 계속되는 집회및 시위로 인해 사회가 아주 혼란스러웠기에 새로 등장한 군부세력에 서울시민들이 비록 경계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반겼다.   그만큼 당시 4.19 이후 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육사생들의 행진 대열.   육사생들의 행진을 끌어냄으로써 박정희가 이끈 혁명은 성공을 의미하게 된다.  육사생들의 혁명지지 행진은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시청앞에 도열한 육사 혁명지지 대열

 

 

서울 시청앞에 도열한 육사생들이 혁명군 지도부에 예를 표하는 모습

 

 

육사생들의 혁명군에 대한 지지표시에 경례로써 답을 하는 장도영 육참총장 모습

 

 

실질적인 군사혁명 지도부인 박정희 소장이 장도영총장의 연설 연단 옆에서 같이 예를 표하고 있다.

 

 

5.16 군사혁명의 얼굴마담인 장도영 육참총장.   그는 박정희의 혁명거사 정보를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묵인하였다.   당시 민주당 정권인 윤보선대통령에게도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치 않았고 결과적으로 박정희소장의 혁명거사를 성공하게 하는 역활을 했다.  하지만 군부의 지지를 받기 위해 박정희에 의해 혁명거사의 지도부에 대표로 추대되었지만 몇달뒤 반혁명죄로 군복을 벗게 된다. 

 

 

좌로부터 박종규.  박정희소장. 차지철  박종규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암살사건 후 대통령 경호실장을 사임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곁을 떠나갔고 차지철은 박종규의 후임으로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어 전횡을 행사하다가 김재규 중앙정보실장의 충성경쟁 과정에서 김재규에 사살되어 군사혁명 후 찍힌 이 한장의 사진으로 역사를 말해주는 의미있는 사진이 되었다.

 

 

장도영총장이 혁명당위성을 역설하는 연설 후 곧바로 찦을 타고 시청앞을 떠나고 있다.

 

 

떠나는 장도영총장의 찝

 

 

장도영 총장.   그는 몇달뒤 반혁명기도란 반혁명죄에 걸려서 군복을 벗었으며 이후 몇달을 교도소에 복역 후 출소해서 혁명세력에 의해 미국으로 가게 된다.  이때 박정희는 여권과 얼마간의 경비를 제공했고 이후 장도영은 미국에서 대학코스를 밣아 박사학위를 받아 미국에 정착 후 미국대학에서 교수로써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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