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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 Epictetus ]

 

삶과 업적
루키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와 함께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철학자로 꼽힌다. 그가 남긴 저서는 없으나 제자 플라비우스 아리아누스(Flavius Arrianus)가 정리한 《담화록(Discourses)》과 《편람(Encheiridion)》, 그 외의 단편적인 기록들을 통해 관련 사상이 전해진다.

기원후 1세기 중반 아나톨리아 남서부 프리지아(Phrygia, 지금의 터키)의 도시 히에라폴리스(Hierapolis)에서 태어났다. ‘부수적으로 얻은’, ‘획득한’이란 의미의 그리스어 ‘에픽테토스(Ἐπίκτητος)’로 불리던 노예였다는 것 외에 유년기나 가족에 대한 별다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9세기 말 편찬된 대백과사전 《수다(souda)》의 기록에 따르면 에픽테토스는 어린 시절 네로 황제(Nero)의 신하 에파프로디토스(Epaphroditos)의 노예가 되어 로마로 건너갔다. 에픽테토스는 다리를 절고 병약한 인물로 주로 묘사된다. 

에픽테토스의 삶은 스토아 철학자였던 스승 무소니우스 루푸스(Musonius Rufus)을 만나면서 크게 바뀌었다.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에픽테토스는 노예상태에서 풀려나 로마에서 철학자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황제의 철학자 추방령으로 로마에서 쫓겨났으며, 그리스 서부 대도시 니코폴리스(Nicopolis)에 새로이 정착해 평생을 스토아 철학 전파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높은 명성을 얻었으나 이에 연연하거나 부를 탐하지 않으며, 자신의 철학을 삶 속에서 성실하게 실천하였다고 한다. 

철학 사상과 의의
초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스토아 철학의 근간을 세우고 중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이를 발전시켰다면,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은 스토아 철학 이론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해 나갈 것인지를 고심했다고 할 수 있다. 에픽테토스 역시 지식에 매몰되는 것을 경계하고, 혼란스럽고 급변하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이권을 누린 다른 후기 스토아 철학자들과는 달리 욕심 없고 절제된 삶과 소박한 가르침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실천하고자 했다.

에픽테토스 사상의 특색은 윤리학에 있다. 이는 그의 어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담긴 《담화록》과 주요 논지를 요약한 《편람》에 잘 드러나 있다. 당대 지식인들은 물론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읽었다고 알려진 이 글들에서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자유와 평정’, ‘신적 자연과 이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고찰한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외적세계와 내적세계로 나눴다. 자연재해, 육체의 건강과 질병, 사회적 지위, 부, 전쟁 등은 외적으로 이미 결정되어 주어진 것들이므로 개인의 선악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이에 반해 주어진 외부세계에 반응하는 인간의 믿음과 욕구, 충동, 혐오 그리고 행동의 선택은 개인의 의지와 자유가 작용하는 영역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처럼 에픽테토스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외부조건이 아닌 인간 내부에 존재한다고 보았는데 여기에는 노예 출신으로 자유민이 되기까지의 험난했던 삶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담화록》 전반에서 에픽테토스는 제도나 선천적으로 제약을 뛰어넘는 인간의 자유와 그로부터 얻는 평정을 강조한다. 

외적조건보다 내면의 정신적 자유를 강조한 에픽테토스의 사상은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는 인간은 자연에 따라 살아갈 때 진정 행복해진다고 보았다. 여기서의 자연은 신과 인간의 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는 신이 원하는 것이 더 낫다. …나의 뜻은 신과 함께 한다.”는 에픽테토스의 말은 종교적이기 보다는 다양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신이 부여해준 이성을 통해 신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다. 우주와 비교했을 때 인간은 작은 존재이지만 인간의 이성은 신보다 작지 않다. 따라서 인간은 신에게서 받은 이해하는 힘과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한편, 소크라테스를 자신의 철학적 모델로 삼은 에픽테토스는 대화를 통해 얻는 깨달음을 중시했으며 난해하거나 화려한 수사어구를 쓰기보다는 쉬운 말로 진리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제자들과 논의한 철학적 주제들 상당수가 주로 결혼, 가정, 우정, 질병 등 일상 소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사상은 후대 철학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에픽테토스의 저작을 자주 인용하였다. 중세 신학자들은 에픽테투스의 사상을 기독교 관점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요약 :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고대 그리스 로마 철학자이다. 노예 출신이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후기 스토아학파의 대가가 되었다. 인간의 내적 자유에 대한 고찰로 스토아 철학의 윤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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