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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월 12일

이날 오전 육군본부 총장실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대장에게 김재규의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해 보고할 사안이 있다고 말을 한다.

바로 구두로 보고할 만한 사항이 아니어서 보안사 정보처장을 총장 공관으로 보내겠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 총장공관에 간 사람은 정보처장 권정달 대령이 아닌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이었다.

권정달은 하나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79년 12월 12일 19시경 일본제 수퍼싸롱 승용차 두 대가 총장 공관 정문에 다가 왔다.

앞좌석에는 운전석에 보안사 수사관 신동기 준위, 그 옆에 수사계장 김대균 소령과 수사관 박원철 상사, 뒷좌석에는 우경운 대령, 허삼수 대령, 그리고 또 다른 수사계장 한길성 소령이 있었다. 

초소에서 검문을 받고 육군총장 공관에 확인 후 통과하였다.

 

19시10분경 육군헌병 백차 1대가 25인승 마이크로버스 2대(병력 61명)를 컨보이 하여 다가오고 있었다.

이건 통보받지 못한 사항이었다. 한 중사가 대체 무슨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된 것인지 묻기 위해 운전석 쪽으로 다가갔다. 백차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대령 한명에 중령 두명, 그리고 운전병이었다. 

“필승. 무슨 일이십니까.” 

“육군참모총장 공관 교대병력이다. 

“몇명입니까.” 

“58분의 3(사병 58명과 장교 3명)이다. 계엄 상황이기 때문에 공관 경비를 강화하라는 지시다.” 

중사는 의아했다. 이런 병력들을 실은 차량들이 진입한다는 통보도, 또 그들이 총장공관 경계업무로부터 해제되고 육군 헌병 병력들이 경비를 맡게 될 것이라는 통보 또한 받지 못했다. 

“연락받지 못했습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중사는 뒤돌아 위병소 쪽으로 가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육참총장 공관 경비대장 김인선 대위와 통하게 되는 전화기였다.

그러나 그 직후 버스에서 하차한 33헌병대 병력 9명이 그와 위병소에 있던 나머지 근무병력을 무장해제한 후 구금해버린다.  방해물이 없어진 이 병력들은 곧 차를 출발시켜 공관 쪽으로 향했다. 

 

허삼수, 우경윤 대령과 두명의 보안사 수사관들이 총장공관으로 들어갔고, 총장공관에서는 육참총장 전속부관 이재천 소령이 인터폰을 통해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보안사 장교들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당시 이때 鄭총장은 2층 거실에서 외출준비중이었다. 鄭총장은 부인 申有慶여사와 함께 처가를 방문, 이날 발표된 장군승진대상에 포함된 처남(육사15기)의 소식도 알리고 와병중인 장모의 병문안을 겸한 나들이를 위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그는 그 복장 그대로 1층으로 내려갔다.

2층에는 둘째아들 정태연(당시 연세대 식품공학과 3학년)과 아내 신유경이 있었다. 

TV에서는 7시 저녁뉴스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허삼수와 우경윤 대령은 1층의 홀로 들어갔고, 두 사복 차림의 보안사 수사관들은 부관실로 들어갔다.

안에는 총장공관 관리장교 반일부 준위가 있었다.

이후 총장공관 경비대장 김인선 대위가 들어오자 김 대위가 호통을 쳤다. 부관실까지 보안사 요원들이 들어오는 게 탐탁치 않았다. 

 

“너희들 뭐야? 나가 있어!” 

 

그러자 나간 두 수사관들은 몇분 후 다시 부관실로 들어왔다. 아마 밖이 추워서 그랬을 것이라 판단한 반일부 준위가 그들에게 "커피 들겠소" 하면서 커피를 권했고,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일부 준위는 당번병에게 커피를 시키기 위해 나갔으나, 당번병 김영진 병장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만을 볼 수 있었다. 

 

“반 준위님, 홀로 가 보세요.” 

 

그 말을 들은 반일부 준위가 홀로 뛰어들어가는 순간 총소리가 울렸다. 부관실 쪽이었다. 

 

무슨 대령들이 보고를 하러 오냐고 불평하던 당번병 김영진 병장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낯선 사람들이 1층을 꽉 채우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는 응접실 칸막이 뒤로 가 숨어 몰래 정승화 총장과 우경윤 대령의 대화를 엿들었다. 

 

鄭총장은 먼저 총장의 직계부대인 범죄수사단장 禹대령이 이번 진급심사에서 누락된데 유감을 표시하고 내년에는 틀림없이 해줄 것이란 얘기를 건넸지만 禹대령은 평소와 달리 퉁명스럽게

“총장님, 이번에는 저도 진급시켜 주시는 줄 알았는데 안 시켜 주셔서 조금 섭섭합니다.” 

“그렇던가, 진급정원이 제한되어 있어서 자격있는 사람들을 다 시키지 못해 나도 진급 발표할때마다 서운해.” 

 

찻잔을 들고 들어왔던 당번병도 대화가 무례하다는듯 흘깃 禹대령을 쳐다보고 찻잔을 탁자에 놓았다.
이에 鄭총장은 다소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래, 보고 내용은 뭔가』하고 화제를 바꿨다.

 

우경윤 대령 옆에 있던 허삼수 대령이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총장님께서 김재규로부터 많이 받으셨더군요. 그래서 총장님의 진술을 받아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협조해 주셔야겠습니다.” 

 

정 총장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과 함께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졌다. 정 총장이 소리쳤다. 

 

“내가 김재규한테서 돈을 받았다고?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하던가? 김재규가 그렇게 주장해?” 

 

정 총장은 김재규가 재판의 마지막 단계에서 살아보겠다고 물고 늘어지느라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삼수 대령이 답했다.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으나 상부로부터 총장님의 진술을 녹음하여 오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녹음기 가져왔어?”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까지 가셔야겠습니다.” 

 

정승화 총장은 이전에 방첩부대장을 지낸 적이 있었고, 그래서 '녹음 준비가 되어 있는 곳까지 가주셔야 겠다'라는 말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연행을 뜻했다. 정 총장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계엄사령관을 어떤 통보도 없이 연행하는가. 혹시나 대통령이나 국방장관이 전두환 소장의 보고만 믿고 잘못 판단하여 자신을 연행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닌가. 그가 말했다.

 

“이놈들, 누가 그 따위 지시를 해?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대통령 이외에 그런 지시를 할 사람이 없는데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해?”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직접 전화라도 했을텐데, 내가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그런 전화에 응할 수 없어!” 

 

총장은 부관 이재천 소령을 불렀다. “부관! 부관!” 

 

이재천 소령이 급히 달려와 정 총장에게 경례했다. 총장이 그에게 지시했다. “대통령 각하나 장관에게 전화 대!” 지시를 받은 이 소령은 급히 부관실로 들어갔다. 아직 부관실 안에는 보안사 수사관 두 명이 있었다.

 

총성이 울린건 바로 그 때였다. 부관실 안에서 총성 서너발이 울린 것이었다.

 

부관 이소령이 현관 왼쪽의 부관실로 들어간 직후 사태를 눈치챈 공관 경비헌병들이 들이닥쳤다.

그 순간 허· 우 두 대령은 정총장을 양쪽에서 팔짱을 끼우며 끌고 나가려했다.

경비헌병 2명은 정총장의 오른팔을 끼고 있는 우대령을 떼어냈고 헌병에 의해 낚아 채이는 순간 척추 부근에 총상을 입었다.

허대령은 달려든 헌병 2명을 뿌리치면서 권총을 정총장 옆 이마에 들이댔다. 밖에서도 총격이 벌어지고 있었다. 부관 이소령과 다른 부관 김모 대위도 관통상을 입었다.

정총장 신변의 위험을 느낀 경비헌병들이 물러나자 허대령은 정총장을 바짝 끼고 대기중인 일제 슈퍼살롱 승용차에 올랐다.

M-16과 권총을 든 군인들의 모습이 띄었지만 달려들지는 않았다.

정총장을 태운 세단이 정문을 빠져나갔지만 수사요원 2명이 양쪽에서 정총장을 감싸고 있는 상황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세단은 시내 모처의 보안사 조사실로 줄달음쳤다.


공관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은 초소를 순찰중 육군총장 공관에서 총성 4~5발의 총소리를 듣고 급히 귀대하여 비상을 발령하고 기동타격대 20명의 병력에게 상황실 앞에서 실탄 분배중 육군헌병의 기습을 받아 체포 연행되어 막사 내에 구금되었고, 다른 대원들도 체포되었으나, 십여 명의 병력은 현장을 탈출하여 삼거리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래서 본인이 그곳에 도착하여 이들 병력을 지휘하게 된 것이다.

그 무렵 누군가가 "사령관님 정문을 육군헌병이 장악하고 있습니다."라는 보고를 하기에 정문초소를 특공조로 공격토록 지시하니 그곳에 탈출하여 있는 경비 선임부사관 김명환 중사가 4명의 특공조를 편성 정문에 이르는 도로가의 배수로를 따라 포복하여 정문초소에 접근 일제사격하며 돌격하여 탈환 점령하였고, 포박되어 있는 3명의 해병헌병들을 풀어 주고, 육군헌병들을 체포, 포박하였으며, 9명 중 3명이 부상하였고, 사망자는 발생되지 않았다.

이때 마이크로버스 1대가 국방장관 공관 앞을 통과하므로 초병이 나서서 정지시킴과 동시에 길 양쪽으로 병력을 배치 차 안에 타고 있는 육군헌병 전원을 무장해제시켜 그들 모두를 차 안에 연금조치하였다.

그 무렵 막사에 감금되어 있던 경비대장 황인주 소령이 탈출하여 왔기에 경비대 병력을 지휘하게 하였다. 경비대장에게 막사 탈환을 지시하여 이를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개시되었고, 병력을 막사 주변에 배치하고 압수한 육군헌병의 무전기를 이용 해병헌병에게 포위됐으니 항복하라고 설득했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차 속에 체포되어 있는 육군 헌병중대장(한성동 대위)을 시켜 설득하였던바 헌병 중대장의 설득으로 모두 투항하였으므로 무장 해제하고 구금하였다.

일단 긴급한 사항이 수습되었으므로 상황 보고는 우선 국방장관에게 해야 되었기에 장관 공관으로 경비대장을 대동하고 공관에 도착하니 부관이 말하기를 장관께서 공관을 출발하여 산에 있는 경비초소 쪽으로 갔다기에 급히 뒷산 쪽의 경비초소를 갔으나, 장관은 초병의 도움을 받아 울타리를 넘어 단국대 쪽으로 피신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되돌아왔다.

우리 해병 경비대는 정문초소를 탈환한 후 정문을 폐쇄하였고, 정문에 접근하는 부대의 진입을 막기 위하여 초소에서는 위협사격으로서, 정문을 방어하여 여러 접근부대를 차단하였다. 초소를 떠나 삼거리 지역에 되돌아왔을 때 정문으로부터 헌병감 박종근 장군이 해군 5분대기조와 함께 도착하였다는 보고가 있기에 들여보내도록 지시하고 정문초소 쪽으로 걸어가는 도중 정문 가까이에서 박 장군을 만났는데 밖에는 육군 본부사령 황관영 준장이 육본 5분대기조를 지휘하여 도착하고 있다고 보고하였고, 평소에 알고 지내는 사이라고 말하였다. 신원확인이 가능하고 상황파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이들 황 장군 일행을 들어오도록 조치하였다.

정문 근처 도로상에서 이들을 만나 상황을 파악해 보았으나 전혀 모르고 있으므로 차 속에 체포하고 있던 육본 헌병감실 기획과장 성환옥 대령과 헌병중대장 한 대위를 불러와 대면을 시켰다.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와 언동이 수상하고 성 대령이 황 장군과 밀담을 나누는 태도가 수상하여 가까이 있는 황 장군에 일격을 하면서 대화를 중단시키고 성 대령과 한 대위를 체포 포박하여 초소에 구금하였다. 그후 헌병감 박 장군과 육군 본부사령 황 장군을 따라 들어온 최석립 중령(총장 연행시 정문 통과를 확인 지휘하고 정문 밖에 위치하고 있었음)과 공관으로 이동하여 황 장군에게 상황을 문의하였으나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현재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정리하여 해군총장 공관으로 가서 보고하기로 하고 이들을 대동하고 해군총장 공관으로 향하여 도착하였는바 해군참모총장 김종곤도 전혀 상황을 모르고 있었으므로 현재까지의 공관경비대의 작전상황과 장관의 행방에 대하여 보고하였고, 육군헌병이 상부 지시에 의하여 정승화 장군 연행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이기 때문에 현재 누구에게도 지휘지침을 받을 수 없음을 설명하고 공관 지역은 안정된 상태이니 이곳의 처리 책임은 나에게 위임하고 상황 파악을 위해 해군본부로 출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여 해군본부로 출발하였다. 한편 육군본부사령 황 장군을 육군 공관으로 보내 뒷수습 조치를 취하도록 하였다. 한편 억류중이던 성 대령과 한 대위는 12시경에 박 장군의 건의로 공관으로 연행하여 계속 심문하였으나, 우리는 상부 명령에 따라 정 총장을 연행한 것 외는 그 이상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다는 일관된 답변만 되풀이하였다. 대담하던 중 "버스 안의 사복한 사람은 누구냐?"라고 질문하니, 보안사 수사관이라 하기에 장교이므로 새벽 1시 반경에 수사관을 공관으로 연행하여 심문을 하여 보니 상부명령에 따라 정 총장을 연행한 것 외에 그 이상은 전혀 알 수 없다는 똑같은 답변이 되풀이되므로 그들을 계속 연금 상태로 두었다. 그때의 상황진전은 계속 오리무중이었고, 시간이 흘러가므로 어떻게 처리할 바를 몰랐고, 억류된 부대 구출을 위해 역습 부대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하면서 끝까지 사수한다는 각오를 헌병감 박 장군과 다짐했다.

한편 공관 지역에서의 비상사태 발생에 따라 공관 정문 앞 도로상에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 5분대기조, 해본5분대기조, 수경사 5분대기조 그리고 합수부측에서 공관 지역에 억류된 육본 헌병부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김진영 중령(후 육군참모총장)이 지휘하는 30경비단(80여 명)5분대기조가 출동하여 공관 정문 도로상에 극도의 혼잡을 이루고 공관 정문초소에서의 강력한 저지와 상황의 불투명한 야음으로 인한 피아 식별의 곤란 등으로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서로 대치상태로 있었고 공관 정문 도로는 차단된 상태로 차량통행은 불가능하였다.

 

 

 

12월12일 하오 5시40분쯤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은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는 당초 6시에 대통령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보안사령관이 말씀드릴게 있답니다』는 최광수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은 최대통령이 『목욕을 하고 쉬려하니 꼭 보고할게 있으면 일찍 오는 게 좋을 것』이라고 해서 2O분이 당겨졌다. 최대통령은 내각개편관계로 지쳐있었고 이날은 휴식을 위해 평소보다 일찍 공관에 돌아와 있었다.

합수 본부장은 최대통령에게 정 계엄사령관과 김재규의 관련, 진술상의 차이 및 이에 따른 국민적 의구심을 덜기 위해 정 계엄사령관의 연행조사필요성을 역설하고 대통령의 재가를 구했다.

최대통령은 당혹한 듯 했다.

국방장관을 경유해 재가를 요청하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합수본부장은 박대통령 때 예를 들어 시급하고 비밀을 요하는 경우는 대통령께 직보해 결심을 구했었다는 설명을 하며 최대통령의 결심을 촉구했다. 윤필용 사건 때도 그러한 전례가 있었다고도 했다.

그러나 최대통령은 자신은 박대통령과 달리 군에 관해 갈 모르고있다는 점을 들어 국방장관의 보좌가 필요하다는 말을 거듭했다.

1시간30분 여의 「승강이」 가 계속됐지만 최대통령은 여전히 재가를 미루었다.

이미 연행을 위한 행동이 시작됐을 것이라는 점을 얘기해도 마찬가지였다.

 


합수본부장이 최대통령을 설득하고 있을 무렵인 오후 6시 30분.

한겨울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경복궁에 수도권 인근의 군 실력자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경복궁은 청와대를 호위하는 30경비단의 병영.

이날은 청와대를 호위하는 이른바 '특정지역' 위병소의 위세도 보이지 않았다.

위병장교는 모여드는 손님들에게 깍듯이 경례를 붙였다.

 

이날 30경비단에 집결한 장성들은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초대한 손님들.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육사 16기, 후에 청와대 경호실장, 안기부장)은 이날 오는 손님들에게 전에 없이 잘 모실 것을 특별지시했다.
맨 먼저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중장(5공정권 안기부장, 민정당 민자당 국회의원)과

수도군단장 차규헌 중장(5공정권 교통부장관)이 들어섰다.

이어 1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 준장(육사 12기, 후에 육군참모총장)과

3공수여단장 최세창 준장(육사 13기, 후에 합참의장과 국방장관),

5공수여단장 장기오 준장(육사 12기, 후에 총무처장관)이 나타났다.
전두환과 함께 이날 군사반란의 또 한 주역인 9사단장 노태우 소장은 직속상관인 1군단장 황영시 중장(후에 육참총장, 감사원장)과 함께 약간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20사단장 박준병 소장(육사12기, 후에 민정당 민자당 사무총장)도 뒤따라왔다.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30경비단장실이 군사반란의 아지트였다.

내로라하는 별자리들이 모인 자리에 영관급은 30경비단장 장세동 대령과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후에 육참총장) 두 사람뿐이었다.

그로부터 두어 시간 후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 대령이 들어왔다. 조홍은 전두환의 지령을 받아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김진기 육본 헌병감을 연희동 비밀요정에 발을 묶어놓는 임무를 수행한 후 곧바로 들어온 것이다. 
 

 


합수본부장이 최대통령의 재가를 얻는데 1차 실패했음에도 정승화 참모총장을 체포· 연행하는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멈출 수 있는 일이 못 되었다.

 

정총장의 체포· 연행에 성공한 허대령은 도착직후 보안사 비서실장 허화평 대령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정총장을 연행하는데는 일단 성공했지만 총격전이 벌어지고 따라서 정총장 지지부대의 호응이 예상됐기 때문에 상황은 더 급박하기만 했다.

최대통령의 체포 동의를 아직 받지 못한데다 정총장을 「조용히」 데려오는데 실패했으니 벌집만 건드린 격으로 일은 뒤틀리고 있었다.

그래도 정총장을 연행했으니 최대통령의 동의를 받는다면 승산은 있었다.

최대통령과 다시 부딪쳐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지휘부의 장성 모두가 나서기로 했다.

하오 8시쯤 합수본부장을 선두로 차·유·황 3중장 등 7명이 다시 총리공관으로 최대통령을 찾아갔다.

최대통령은 여전히 「국방장관」을 통해 건의하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절차를 강조했다.

이 때 최대통령을 만나러 와있던 신현확 총리도 최대통령과 같은 의견이었다.

 

 

한편 총리공관에서는 정승화참모총장이 허대령 등에게 연행된 직후 부인 申여사는 외부와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모든 전화선이 절단 돼 불통이었고 비상전화 하나만이 살아있었다.
신여사는 먼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유병현 대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유장군은 즉시 조치를 취하겠노라고 했다.

신여사는 이어 윤성민 육군 참모차장에게 연락을 했다.

노재현 국방장관에게는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육군 참모차장에서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옮겨 있던 이와성 장군은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신여사가 안면 있는 군 고위 장성들에게 연락을 취한 다음 허대령 등이 왔을 때 커피를 날라준 당번병(일등병) 은 육본상황실로 정총장 피랍사실을 알렸다. 하오 7시40분쯤이었다.

급보에 접한 육본상황장교는 잠시 연락을 취한 다음 하오8시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사태가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합수본부 측에도 낭패감이 감돌았다.

 

 

 

수경사 헌병단장 조홍대령은 상관인 장태완수경사령관과 정병주특전사령관을 모시고 진급 감사 회식을 하고 있던 중에수경사령관 부관이 무전연락을 받고 방으로 들어와서 장태완 수경사령관에게 보고를 한다.

 

『사령관님, 비상입니다.』

『뭐야?』

『총장님께서 납치됐답니다.

 

수경사의 박동원 작전참모는 야포단과 동시에 전차대대에도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그는 사령부 내에 있던 전차대대장 차기준 중령(육사 21기, 후에 합참통합군 기획단 부단장)을 불렀다.
"차 중령, 당장 쓸 수 있는 전차와 기갑병을 모두 사령부에 집결시키게."

상대편에게 위압감을 주어 세를 잡는 데는 전차가 제일이다.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전투 병력을 투입하면 진압작전은 어렵지 않게 성공할 수 있다.

박동원과 차기준은 전차 현황을 파악해보았다. 사령부내 대대본부에 4대가 있다.

그리고 30여 대의 전차가 경복궁 30경비단에 1개 중대, 33경비단 배속으로 독립문 부근에 1개 중대가 나가 있다.

이 중 30경비단에 배속된 것은 이미 반란군에게 넘어가버렸다.

차기준은 33경비단 배속 전차중대에 필동사령부로 집결할 것을 지시했다. 
 
밤 10시 30분경, 독립문 부근을 나서 서대문을 거쳐 시청 앞으로 향하는 전차들의 육중한 캐터필러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경복궁의 반란군 지휘부는 이 전차 구르는 소리에 아연실색했다.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결재를 받으러 세 번째 가 있으나 하회가 없다.

 

30경비단 본부를 지키는 9사단장 노태우는 등골이 오싹했다.
"장태완이가 정말 탱크를 앞세워 쳐들어오는구나. 최 대통령은 아직도 정승화 총장 연행을 결재하지 않고 있으니 우리는 모두 불법 하극상 세력으로 체포되고 마는가." 
 
이때 장세동, 김진영 두 대령이 보안사 본부와 수경사 보안대원들에게 전차 소리의 진원지를 물었다.
"그러잖아도 33경비단장에게 비상조치를 구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수경사에서 지금 33경비단 배속 전차중대를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 원대 복귀시켜야 합니다." 
 
김진영은 황급히 지프를 몰아 광화문을 통과해서 서대문으로 나아갔다. 김진영은 전차중대장에게 장태완이 비정상 상태여서 잘못하다간 수경사 부대끼리 전투가 벌어질 판이라며 그 지시에 따라서는 안된다고 강력히 제지했다.

 

전차중대장은 배속부대장인 33경비단장 김진영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

수경사 예하 최적의 진압장비인 전차들은 모두 회군하고 말았다. 반란군의 손에 들어간 셈이다. 
 
이날 진압작전을 위해 수경사가 직접 동원할 수 있는 부대는 야포단과 전차대대, 그리고 33경비단 일부가 전부였다.

30경비단은 쿠데타군의 본부가 돼버렸고,

방공포단은 황동환 단장이 사령부에 대기하고 있지만, 서울의 하늘을 지키는 경계임무에서 빼낼 수가 없다. 

 

 

수경사령관 장태완은 합참본부장 문홍구와 육참차장 윤성민과 상의한 뒤 9공수여단장 윤흥기 준장(갑종 35기)에게 출동지시를 내렸다.

윤 준장은 참모장 신수호 대령(갑종 간부)에게 후발대로 뒤따라오도록 지시하고 자신이 선발대 및 본진을 이끌고 나아갔다.

그러나 본진이 막 부천 톨게이트에 이르렀을 때 아직 본부에 남아 있던 참모장 신 대령으로부터 무전이 날아왔다. 
 
"단장님, 사령부에서 출동지시가 무효라는 전문이 왔습니다. 그리고 보안부대에서도 병력을 복귀시켜야 한다고 야단인데요." 
 
특전사령부에서는 보안사 정도영 보안처장(육사14기, 후에 사회정화위원장, 성업공사 사장)의 전화지시를 받은

보안반장 김정룡 대령(육사16기, 후에 보안사 참모장, 수자원공사 감사)이 작전처장 신우식 대령과 함께

9공수여단 회군공작을 벌였다.

 

정도영과 김정룡은 하나회로 손발이 잘 맞았으며 회군공작의 수훈을 세웠다.

이들은 정병주 사령관 몰래 '출동지시는 무효'라는 전통문을 띄웠다.

 

정규지휘관 보다도 보안사가 군을 더 잘 장악하고 이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장태완은 9공수여단의 출발보고만 받았을 뿐 회군 사실을 늦게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야포단 선발대로부터 박희도의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넘었다는 보고에 사령부내 모든 지휘관과 참모를 기밀실로 모이도록 참모장 김기택 준장에게 지시했다. 그는 이어 작전참모 박동원을 불렀다. 

 

"우리 헬기로 지금 수도기계화사단이나 26사단까지 갈 수 없겠나?" 
그는 직접 사단장들을 만나 병력출동을 담판 지을 생각이었다. 
 
"우선 지휘계통에서 명령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쓸데없는 일 아닙니까?" 
박동원은 장태완을 이건영 3군사령관과 통화하도록 연결시켰다. 
"장 장군, 나도 장관께 두 차례나 건의했소. 위에서 승인을 해줘야 하는데…. 더구나 전방 병력을 움직이는 문제가 아니오." 
 
이건영은 초기보다 목소리가 위축돼 있었다. 수경사에 들어와 있는 육본 지휘부는 예비 병력이나 움직일 수 있을 뿐, 전방 사단 병력 이동은 국방장관과 한미연합사 측의 결심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노재현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 등 수뇌부는 이때 반란군 지휘부를 포함해 모든 사령부에 '병력이동금지'를 강조하고 있었다.

 

장태완은 분통을 터뜨리며 기밀실에 모인 장교들 앞에 섰다. 
 
"조금 전까지 우리와 정을 나누던 사령부 전 장교는 450여 명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60명 이외의 장교들은 30경비단에서 국가반란을 모의하는 무리들과 작당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사령관으로서 명령을 하달하니 소임을 다해주기 바란다.

제30경비단장 장세동, 33경비단장 김진영, 헌병단장 조홍은 누구든지 발견 즉시 체포하되 반항하면 사살하라…." 
 
그의 명령은 전투개시 그것이었다. 기밀실은 살얼음을 딛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령관의 노성은 더 이어졌다.

"이 외에도 30경비단에 들어가 역모하는 자들의 명단을 공개하니 체포하거나 사살하라. 그리고 청와대 뒷산 팔각정 주변에 배치된 33경비단의 경비병력은 부단장이 가서 은밀히 사령부로 철수시키라." 
 
수경사 기밀실에서 쿠데타 주모자에 대한 체포 사살명령을 하달 받은 33경비단 작전주임 김달연 소령(육사 28기, 중령 예편, 서울 풍납동 창일침례교회 목사)은 이를 즉각 33경비단 중대장들에게 전달했다. 
 
김 소령은 처음 사건의 전모를 들었을 때 눈앞이 아찔했다. 직속상관인 33경비단장 김진영 대령이 반란군에 가담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군인관에 혼란이 일어남을 느꼈다. 평소 후배장교들에게 존경받았고 자신 또한 믿고 따랐던 '멘토'를 이제 적으로 돌려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군인이란 언제나 정규 지휘계통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진영은 이제 우리 단장이 아니다. 보는 대로 체포하든지 무기를 갖고 반항하면 사살해도 좋다."
 
이날 아침까지도 가장 가까운 선배이자 상관을 반란군으로 단죄하고, 그는 콧등이 시큰해졌다.

이어 그는 청와대 외곽의 경비진지에 배치돼 있는 3개 중대를 사령부로 철수하도록 지시했다.

33경비단 병력이 경비진지에서 사령부로 오려면 자하문~효자동~광화문을 거쳐야 한다.

김달연은 경복궁의 30경비단이 이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중대장들에게 방향을 바꾸도록 지시했다. 30경비단도 이제 '적군'이 돼 있는 것이다. 
"자하문으로 오지 말고 정릉 쪽으로 우회해서 오라." 
 
실제로 30경비단은 33경비단 병력이 사령부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자하문 부근에 저지조를 대기시키고 있었다. 이날 첫 전투가 벌어질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33경비단 병력이 필동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 30분경.

이때는 경복궁을 향한 수경사의 공격대형이 이미 무너진 뒤였다. 이에 앞서 장태완은 0시 30분 경 사령부가 보유한 병력, 전차, 화포를 정문 앞 퇴계로에 집결시켜 공격개시선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행정병까지 포함한 병력 100여 명과 전차 4대, 그리고 토우 미사일 10여 기 등이 정렬했다.

작전참모 박동원은 토우 미사일 중대장에게 당부했다. 
"미사일은 절대 개함하지 말라. 여기서 써먹을 용도가 없다." 
 
토우 미사일은 꽁무니에 명주실 같은 유도선이 달려 있는데 이것이 전깃줄이나 나뭇가지 등에 걸려 끊어지면 포탄이 방향을 잃고 제멋대로 날아간다. 시가전에서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을 경호실장 차지철이 억지로 창설해놓은 부대였다.

 

이때 수경사 사령관실에 차려진 육본 지휘부의 윤성민 참모차장은 수경사 병력의 공격을 개시하기 전 최종방침을 정하기 위해 육본 참모회의를 열었다. 
 
윤성민(참모차장) : 방금 1, 3군사령관과 통화했습니다. 3군 예하 26사단과 수도기계화사단, 그리고 1군의 11사단 등 전방사단 병력은 장관 지시 없이 움직일 수 없다는 겁니다. 병력 동원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모아봅시다.
천주원(인사참모부장) : 오늘밤 상황전개를 보니 저쪽에서 5.16쿠데타보다 훨씬 장기간 그리고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무방비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꼴이고…. 
황의철(정보참모부장) : 현재 우리에게 별 수단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어디서 병력을 동원하기도 어려운 것 아닙니까? 
하소곤(작전참모부장) : 병력을 동원할 수만 있으면 동원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하 부대들에 명령이 먹혀들지 않고 있어요. 명령해도 저쪽의 방해공작으로 병력이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안종훈(군수참모부장) : 이번 쿠데타가 아무리 세밀하게 오래 전부터 계획돼 진압이 어렵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인의 사명에 따라야 하는 우리 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반란군에 손을 들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우리 군인은 군인으로서 생사를 초월해 책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병력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합시다.
신정수(민사군정감) : 반란을 막아야 한다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아군끼리 충돌해서야 되겠습니까? 
 
육본 지휘부는 당초 수경사의 병력으로 군사반란을 진압하려고 왔으나 수경사 직할부대들이 하나씩 등을 돌리자 크게 낙담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충정부대의 출동은 기대하기 어렵게 돼 가는데 쿠데타 지휘부의 공수여단 병력이 행동을 개시했으니 이미 전세가 기울어가는 듯했다. 
 
장태완은 9공수여단이 회군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9공수여단 병력만 도착하면 전차 4대를 앞세워 경복궁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공격개시선에 집결된 부대를 점검해 나가는 그에게 비서실장 김수택 중령이 달려와 귀에 대고 다급하게 보고했다. 
"사령관님, 제가 저 앞 전차 소대 쪽에 갔더니 '장태완을 사살하라'는 무전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빨리 이곳을 떠나 사령부 안으로 피신하셔야겠습니다." 
 
그는 허리에 찬 권총에 손이 갔다. 
"뭐라고? 이런 배신자 놈들…." 

 

사령관으로 취임한지 불과 36일. 그는 직감적으로 수경사가 자신의 부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급상황에서 지휘관에게 언제 배신할 지 알 수 없는 부하처럼 무서운 적은 없다.

그는 비서실장과 함께 황급히 집무실로 들어갔다.

상황실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작전참모 박동원은 상황실장 김진선 중령에게 '반란군 가담자들에 대한 체포 및 발포명령'을 각 예하 부대와 검문소에 하달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김진선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참모님, 지금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군내부에서 무력충돌이 일어나서도 곤란할 것 같고…. 잘 판단해서 대처하셔야 합니다." 
 
박동원은 이 말이 부하로서 상관을 생각해주는 충언이라기보다 사령부의 반란군 진압에 대한 제동이라고 느꼈다.

 

그는 순간 이날 밤 상황실을 통해 하달됐어야 할 각종 상황조치와 작전지시가 제대로 이루어졌을까 하는 의심이 갔다.

 

한편, 수경사가 충정부대들을 동원해 진압작전을 서두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보안사는 우선 이건영 3군사령관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에 대한 내부 체포공작과 함께 본격적인 반란군 병력 동원에 나섰다.

 

 

 

 

노태우 소장은 자신이 지휘관이던 9사단 29연대를 중앙청 앞에 집결시켰다.

 

1공수특전여단은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달려갔다.

얼마 후, 1공수특전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국방부 50헌병대 경비병력으로 근무하던 정선엽병장을 사살한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했다.

이 과정에서는 총격전으로 국방부 건물 앞은 유리문 등이 부서지고 피가 낭자하였다. 

그리고 국방부 청사애소 노재현 국방부 장관을 찾은 후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끌고 갔다.

 

한편 3공수특전여단은 3여단의 영내에 있던 특전사령부 본부에 3여단 15대대장이 이끄는 10여 명의 체포조가 투입되어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을 사살,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체포하고 건물을 완전히 장악한다.

 

결국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5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으로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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