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박희도 장군의 경우 육군사관학교 12기 졸업생입니다.
그리고 생도시절부터 박준병. 박세직과 함께 일명 쓰리박을 형성하며
육사 12기의 선두주자로 성장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에 드디어 하나회에 가입하여
전두환과 친분을 두터이 합니다.
그리고는 1975년 드디어 육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군으로 진급합니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1976년 전두환 장군이 1공수여단장으로 있다가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령을 받게 되자
후임지휘관을 물색하던중에 자신의 하나회 후배였던
박희도를 떠올리게 되고 당시 특수전사령관이던 정병주 장군(육사9기)에게 간청을 하여 박희도장군이 자신의 후임으로 1공수여단장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1976년 1공수여단장 부임첫해에 그유명한 8.18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에 응징을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결심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부대로
바로 1공수여단을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당시 합참의장이던 노재현 대장(육사 4기)과
함참의 작전본부장인 유병현 중장(육사 5기)으로 하여금 작전 지시를 내리고
이에 은밀히 1공수여단을 방문하여 박희도 여단장에게 자신의 지시를 실행하라고
지시를 하게 합니다.
이에 두 사람이 위장을 하고 찾아가서
여단장 방에서 거사자금 50만원을 내놓으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이니 은밀하게 수행하라고 합니다.
주요 핵심은 판문점 윗쪽에 설치된 북한의 불법초소 4개를
모두 부셔버리라는 것이었고 이에 박희도 여단장은 64명의 정예요원을 선발하고
그중 김종헌 소령을 특공대장에 임명하여
이들에게 모두 무장할 것을 지시하고 판문점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들 특공대가 무사히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는데
당시 한미합동 작전으로 문제의 미류나무를 자르는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었으나
애당초 미군측이 비무장으로 올것을 요구한 1공수여단이
무장으로 판문점에 도착하여 단독으로 작전을 감행하자
당시 한미연합사 사령관인 스틸웰 대장이 이에 분노하여 박희도 장군을
몰아세웁니다.
당시 상황을 좀더 살펴보면은 한미연합사에서는 특공병력 64명이 모두 권총을 휴대하되 보관은 미군측이 맞는다고 주장하였으나
박희도 장군의 입장에서는 "부하들을 사지에 보내는데 그럼 적을 만나면 태권도 약속대련이나 하라는 이야기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모든 책임을
질 각오로 부하들에게 권총과는 별도로 개인화기(소총)으로 무장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미군측의 압력에 견뎌낸 박희도 장군은
또 한번의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78년 사산 앞바다에서 지대지 미사일의 발사실험에 성공하고 이에 자극을 받은
북한에서 무장 간첩을 파견하여 서산앞바다 일대의 정보를 캐오게 했는데
이때 육군본부에서 이를 탐지하고 무장 간첩을 쫓았으나 어이없게도 1공수여단의 위수지역을 마음껏 돌아다니면서 임진강을 건너서 북한의 귀한한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이세호 대장이 보직해임을 검토했으나
그를 아끼던 특수전 사령관 정병주 장군이 이세호 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끝에 겨우 여단장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
이토록 두번에 걸친 위기를 무사히 넘긴 박희도 장군은 운명의 12.12 군사쿠데타 당시에 1공수여단장으로 있으면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근무지를 이탈하여
서울의 청와대 근방 수경사 예하의 30경비단장실에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쿠데타에 적극 참여를 하게 되는데
애시당초 기대와는 달리 최규하 대통령이 재가를 미루자
전두환 장군의 인솔하에
유학성 중장(국방부 군수차관보/정훈1기)과 차규헌 중장(수도군단장/육사8기) 그리고 황영시 중장(1군단장/육사 10기)과 백운택 준장(71방위사단장/육사 11기)과 함께 무장을 하고 청와대를 찾아가 최대통령의 재가를 강력히 요청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재가에 대한 협조요청이었다지만
실제로는 무장을 한 상황에서 사실상의 협박이었습니다.
그러나 최대통령으로 부터 국방장관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받고 돌아나오게 되면서 전두환 장군이 1공수여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병력을 출동하여 서울로 진입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하고 노재현 국방장관의 행방을 수소문하여 잡아올 것을 명령합니다.
이 당시 특수전 사령부의 구성을 보면 특수전 사령관은 육사 9기인 정병주 소장
부사령관은 육군종합학교 출신의 이순길 준장 그리고 서울근방에 포진하면서 동원이 용이한 공수여단으로
김포의 1공수여단은 박희도 준장(육사 12기) 남한산성 특수전 사령부 옆의 3공수여단은 최세창 준장(육사 13기) 부평 부근의 5공수여단은 장기오 준장(육사 13기) 인천의 9공수여단은 윤흥기 준장(육군종합학교 출신) 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상황을 어느정도 파악한 정병주 사령관이 1.3.5공수여단 병력의 이동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자신을 따르던 9공수여단에게는 출동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이순길 부사령관을 김포에 보내 1공수여단의 출동을 저지코자 하나
박희도 장군은 명령에 불응하고 1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전두환 장군의 명령을 받은 최세창 장군은 3공수여단을 동원하여
특수전 사령부를 장악하고 정병주 사령관을 강제로 체포하면서
그의 비서실장이던 김오랑 소령을 사살하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애초에 정당한 출동명령을 받은 9공수여단은 경인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육군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육사 9기)의 명령을 받고 부평 인터체인지에서 회군을 합니다.
이른바 눈물의 회군이었죠ㅠㅠ
그리고는 국방부를 장악하는 도중에 국방장관을 발견하고 강제로 연행하여
전두환 장군이 있는 30경비단으로 압송하여 강제로 정승화 총장 연행에 따른 재가 서명을 하도록 합니다.
그리고는 이에 따라서 최대통령도 결국 서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12.12 군사 쿠데타는 전두환 장군 계열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이후 박희도장군은 나름의 논공행상을 거쳐서 26사단장을 거쳐 특수전 사령관에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그유명한 천리행군이라고 하는
훈련을 도입하게 됩니다.
이후 3군 사령관을 거쳐서 1985년 12월 대망의 육군참모총장에 오르게 되나
1988년 6월 임기를 6개월 남기고 노태우 대통령에 의하여 경질되어
이후 평범한 사회인의 생활을 하다가
1994년 문민정부 들어서 12.12재평가 과정에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고 풀려납니다.
군인으로써의 박희도는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강제로 병력을 동원하여 이를 진압하던 병력들과 맞서면서 정당한 진압군을 살해하고 불법적으로 아군의 최고 사령부를 공격하였으니
결국은 그도 불법적인 행동을 일쌈은 부정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만일 12.12 군사쿠데타가 올바르게 진압되었다면 총살형에
처해졌어야 할 인물입니다.
그러나 12.12 군사쿠데타의 성공으로 이른바 충신으로 변모했으니
정말 역사라고 하는 것은 운을 타고 나야 하는 모양입니다.
'Milita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 전쟁: 미국 실패의 원인과 교훈 (0) | 2021.08.3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