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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불 대학. 당시에 서구식 복장 + 공학이 허용되고 있었습니다.

 카불 대학의 약학과 학생들. 당연히 남녀수업도 공동.

 지금 아프간에서는 간호사가 제법 희소합니다만. 당시에는 중산층을 중심으로 상당히 많은 간호사 지망생들이 간호학과에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인큐베이터도 희귀한 곳이 아프가니스탄입니다만, 5-60년대에는 카불에 위치한 병원들이 모두 인큐베이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60년대 초반까지 아프가니스탄인 절반 이상은 병원에서 태어났고 일부는 의료 보험 혜택도 받았지만 이제 과반수는 가정에서 산파의 도움으로 태어나고 네 명중 한 명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습니다.

한때 아프가니스탄은 중앙아시아권에서 가장 뛰어난 백신 연구/제조 기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은 1950년대 후반부터 지역 왕진 서비스를 사용하던 국가였고 지역 단위로 백신 접종도 받았습니다. 이제 비슷한 임무는 아프가니스탄인이 아닌 적십자의 몫이 되었고 종종 기습 공격을 받습니다.

 

카불에서는 헐리웃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관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다시피 한 놀이터나 지역 공원도 제법 많았습니다.

 

과거 아프가니스탄의 주 수입원은 가공산업이었습니다만, 이제는 아편 수출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은 독일의 기술지원과 차관을 얻어 50년대부터 대규모 수력 발전소를 지었습니다. 매년 0.5~1개의 발전소가 신설되었습니다. 지난 8년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하나의 발전소도 세워지지 않았고 두 곳은 폐기 직전이며 정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전기를 수입해 올 궁리를 합니다.

과거의 카불엔 전차(TRAM) 이 다녔지만 현대의 카불엔 전차(TANK) 가 돌아다닙니다.

카불 라디오 방송은 1930년부터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아직도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내용은 크게 변했습니다.

그시절 야경이 지금보다 몇 배는 더 밝습니다.

 

 

 

제3차 영국-아크가니스탄 전쟁 이후 1919년 왕국으로 독립

1933년 모하마드 자히르 샤 국왕이 즉위하면서 정치, 경제적으로 평화를 누렸다.

1973년 전 총리였던 모하마드 모하마드 다우드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자히르 샤 국왕을 몰아냄.

다우드 칸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하여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78년 4월 소련의 공산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격, 다우드 칸 일가를 몰살시키는 사건이 발생.

같은 해인 4월 30일 인민민주당의 지도자였던 누르 타라키가 새 정부의 대통령에 취임하여 인민민주당 1당 독재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은 공산화되었다.
공산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대통령(주석)이 된 타라키는 왕정처럼 세속주의를 추구했고 토지 국유화와 사유 재산 금지 밑 조혼 금지와 농촌 부채 탕감 등의 전형적인 소련식 개혁 정책을 밀어붙여 민중들의 지지를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개혁은 대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특히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의 특성상 인민민주당은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우를 범했다. 결국 이러한 공산 정권의 이슬람 탄압은 이슬람 문화가 뿌리깊은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더욱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이른바 무자헤딘이라는 이름의 반란군들이 곳곳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아프가니스탄은 인민민주당 정부군과 공산 정권에 저항하는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 사이의 내전상태가 됨.

 

1979년 타라키 심복이였던 하피줄라 아민이 9월 16일 자신의 지지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타라키 대통령을 암살하였다. 타라키 대통령을 암살한 아민은 타라키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위장발표하였고 같은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대통령이 된 아민은 공산 정권 통치에 반대하는 자국민들과 정치적 반대자들을 가혹하게 탄압, 학살하는 등 억압적인 독재정치를 펼쳤고 1978년 공산정권 출범 이래 아프가니스탄 전역에서 할거하며 무장투쟁을 펼치던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들에 대한 반군 진압 또한 더욱 강화했다.

아민의 폭력적 독재에도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잠잠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정국 불안은 근접해 있던 소련을 자극했다.

 

1979년 12월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국내 내분 종식을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카불을 점령하고 아민 일가는 소련에 의해 파견된 KGB요원들에게 사살당함.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아민을 살해한 소련은 바브라크 카르말을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시켜 새 대통령으로 옹립하고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을 친소련 위성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국내 공산정권을 상대로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란군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아 모든 총부리를 아프가니스탄 점령 소련군에 돌려 공격하였고 결국 아프가니스탄은 무자헤딘 반군과 수련군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음.

카르말은 소련군과 국내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에 전쟁이 절정에 달하던  1987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소련으로 망명했고 그의 뒤를 이어 카르말 정부 아래에서 비밀경찰 국장을 맡고 있었던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새 대통령이 되었다.

1989년 2월 소련군이 철수하자 침공 소련군에 저항하던 무자헤딘 반란군들은 나지불라 정부를 공격하면서 결국 아프가니스탄 정국은 나지불라 정부군과 무자헤딘 반란군 사이에 내전으로 벌어졌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끊겼고,

1992년 무자헤딘 반란군은 나지불라 정권과 구 인민민주당 세력들의 최대 거점지인 수도 카불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펼쳐 결국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은 무자헤딘 반란군들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탈레반이 정치-종교 세력으로 성장하여 결국 1996년에 카불을 장악하고,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을 세웠다. 2000년 말에 탈리반은 국토의 95%를 장악하고 있었다.

탈리반이 7년간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면서, 주민 대다수는 자유가 억압당하고 인권이 유린당했다. 여성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엄금되었으며, 어린 여성이 학교나 대학에 가는 것도 엄금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조직적으로 근절되었으며, 절도범은 손과 발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2001년에 탈리반은 아편 생산을 거의 일소하였다.

 

탈레반에게 카불을 빼앗긴 이후에 마수드와 도스툼은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전선 (북부 연맹)을 형성한다.

2001년 9월 9일,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 판지시르 주에서 두명의 아랍인들에 의해 자살 공격을 당해 암살되었다. 이틀 후, 미국에서 9.11테러가 일어난다.

미 정부는 오사마 빈 라덴을 공격의 가해자로 지목하며, 탈레반에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였다.

탈레반이 협조를 거부하자 2001년 10월 작전명 항구적 자유 작전이 실행되었다. 

2001년 12월, 옛 무자히딘의 지도자과 난민들이 독일에서 만나 협정을 맺었는데, 여기서 아프가니스탄에 새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고, 칸다하르 시 남부 출신으로 파슈툰족 두라니 씨족(옛 왕가 출신) 사람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의장으로 세우기로 하였다.

2014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카르자이 대통령은 권력에서 물러났고

2014년 9월 아슈라프 가니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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