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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사 대적광전.
 

누구나 세상이라는 강물을 숨이 가쁘게 헤쳐가다가 지쳐서 쉬고 싶을 때 가 있을 것이다. 그런 때 불현듯 가고 싶고, 가서 보면 머물고 싶고, 그리고 머물다 보면 몇 해쯤 살고 싶은 곳이 한 군데 쯤은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모악산 자락의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의 귀신사와 그 일대가 바로 그런 곳이다.

내가 귀신사를 처음 갔던 때가 아마도 전주에 정착한 다음해였으니,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흐르지 않았는가 싶다. 가을이었고, 바람이 몹시 불던 저물녘이었을 것이다. 금산사를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문득 ‘귀신사(歸信寺)’ 라는 나무 간판이 눈에 띄었고, 무언가에 홀린 듯 무작정 내려 찾아가 한 눈에 반해 시도 때도 없이 가게 된 곳이 바로 귀신사였다.

귀신사 바로 아랫집을 우리 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할 뻔 했던 적이 있다. 외지고 한적한 곳에 있는 집을 사서 살고자 여러 곳을 돌아다녔던 80년대 후반쯤이었다. 청도리에 집이 났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아쉽게도 그 집이 며칠 전에 팔렸다는 것이었다. 아쉬워서 팔린 가격을 물었더니 600만 원이었다고 한다. ‘놓친 고기가 크다’는 말도 있지만 이미 늦은걸 어떻게 하겠는가?

불과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신라 때부터 명찰인 귀신사를 정원으로 두고서 산책을 하면서 신 새벽에 일어나 새벽예불에 동참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금세 마음을 바꿨다. 매일 새벽마다 그 새벽 종소리가 곤한 잠을 깨우게 한다면 매우 불편한 일일 것이다. 오히려 귀신사 아래에 집을 장만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귀신사를 가고 올 때마다 그 집을 바라보고 아쉬워하는 것은 그때 그 순간이나 지금이나 매일반이다.

전주일대 관할 화엄십찰 중 하나

귀신사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그 중에 한 곳이 전주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이다. 전주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가 삼천(三川)이라고 부르는 세내다리를 건넌다. 용산리-황소리-독배마을을 거쳐 청도재를 넘어 유각 마을을 지나서 좀 더 내려가면 청도리에 닿는다.

청도리는 본래 전주군 우림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두정리, 동곡리와 금구군 수류면의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도리라고 한 뒤 다시 전주군에 편입 되었다가 1935년에 김제군 금산면에 편입 되었다.

청도리 마을회관 광장에 차를 세우고 귀신사로 들어가는 길은 무성한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길은 마치 어린 날에 외갓집 가는 길의 풍경을 자아낸다. 그리고 작은 개울을 건너면 이십여 년 전만 해도 담쟁이 넝쿨이 수북히 덮은 나무 창틀 사이로 조선소 한 마리가 얼굴을 내밀면서 낯선 손님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소가 사라져 버린 외양간에는 담쟁이 넝쿨만 무성하고 돌계단을 올라가면 귀신사에 닿는다.

   
▲ 귀신사 3층 석탑.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국신사(國信寺)라 불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정복지를 교화하여 회유하기 위해 각 지방의 중심지에 세웠던 화엄십찰(華嚴十刹) 중 하나로서 전주 일대를 관할하던 큰 절이었다. 의상의 명으로 세워진 화엄십찰은 소백산의 부석사와 중악공산의 미리사, 남악 지리산의 화엄사, 강주 가야산의 해인사, 웅주 가야협의 보원사, 계룡산의 갑사, 삭주의 화산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 전주 모악산의 국신사 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의상대사 혼자의 힘이라기 보다는 의상대사의 제자들이 힘을 합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 옛날 여덟 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금산사까지 말사로 거느렸다는, 귀신사의 위용을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사기에 따르면 고려 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이 구순사(拘脣寺)로 바뀌었다가, 조선 고종 10년에 고쳐 지으며 귀신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몇 년 전에 절 이름을 발음이 ‘귀신’과 같다고 하여 국신사로 바꾸었다가 근래 다시 귀신사로 되돌아왔다. 고려 말에는 이 지역에 쳐들어왔던 왜구 300여명이 주둔했을 만큼 사세가 컸으나 지금은 대적광전과 명부전, 요사채 등의 건물, 대적광전(보물 826호)과 이 근래 들어 새로 지은 몇 채의 건물이 있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집으로 양옆에 풍판을 달은 귀신사 대적광전은 양쪽 처마는 겹처마이고 뒤쪽 처마는 홑처마로 된 것이 특징이다. 대적광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그 뒤에 복구했는데, 법당 안에는 삼신불 즉,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삼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노사나불을 모셨다.

모두 소조불로 1980년대에 금물을 입혔는데 건물에 비해 불상이 너무 커 앉아서 바라보기가 거북스럽다. 완주 송광사에도 이와 같이 큰 불상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같은 사람이 주조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적광전 뒤편으로 돌아가면 귀산사의 또 하나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돌계단이 있고 그 옆에 야생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돌계단 오르며 또 다른 자연의 맛

듬성듬성한 돌계단을 올라가면 오랜 세월 동안 이 귀신사를 지켜보았을 느티나무 와 팽나무 사이에 돌계단이 있다. 금실좋은 부부나 의좋은 남매 같기도 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어느 땐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게 된지가 한 이백년쯤 되었을까? 세월이라는 것이 하룻밤 꿈같기도 하고 허깨비 같기도 하다고 오가는 사람들이 말하던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 대적광전 뒤편의 돌계단.

그랬을 것이다. 그 나무들이 침묵한 채로 지켜보는 세월 속에 귀신사 일대의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다 녹아들었을 것이다.

내 마음에 가장 편안한 곳, 내 마음의 자유, 내 마음의 평화가 있는 내 마음의 명당자리가 바로 이곳이다. 돌계단에 앉아 언제나처럼 나는 귀신사 일대를 내려다본다.

몇 그루 자라난 차나무의 잎들은 아직도 짙푸르고 대적광전 지붕 너머로 백운동 마을은 평화롭다. 문득 한줄기 바람이 뺨을 스치듯 지나가고 그 바람결에〈파우스트〉속에서 린쎄우스의 말 한 구절이 떠오를 때가 있다. “세상은 있는 그대로 내 마음에 드는구나”.

그렇다. 이 절은 모두가 어지럽게 널려 있고 제 멋대로 내 던져진 듯 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질서정연하다. 나는 이 자리를 좋아해서 이 자리에 잠들고 싶다.

유령은 우주가 좁다고 여겼다. 항상 작은 수레를 타고 술 한 병을 몸에 지니고는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르게 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죽거든 그 자리에 묻어라”

허균의 한정록에 나오는 글이다. 이 나라 산천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 나라가 묘지 공화국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죽게 되면 산에다 묻고 그 위에 나무 한그루를 심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화장해서 바다나 강에 뿌려달라고 했다는데, 나는 오래 전에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게 되면 화장을 해서 세 곳에 나누어 뿌려라.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뒤편과,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뒤편, 그리고 귀신사 대적광전 뒤편에 뿌리고 제사는 지내지 말아라. 혹시 그곳에 갈 때만 나를 생각해라.”

내 얘기를 듣고 큰 애가 말했다. “아버지 납골당에라도 모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고 다시 말했다.

“내가 평생을 길 위에서 떠돌았는데, 나를 납골함에 가두어 두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

“나를 자유롭게 해줘라. 죽어서도 영혼이 있다면 이 나라 산천을 떠돌고 싶으니” 이렇게 말했지만 사후의 일은 아무도 알 수가 없는 일, 어찌될지 그 또한 나의 일이 아니다.

“온 우주를 집이라 여기고 어느 날 죽거든 그곳에 묻어라” 라는 유령의 말이나 “산다는 것은 떠돈다는 것이고 쉰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이라고 여겼던 용재 성현(成俔)의 말이 새삼 내가 선택해야 할 것을 제시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

바로 그 뒤편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백제계 삼층석탑(전라북도 유형문화재62호)은 그 높이가 4.5m이다. 바로 그 옆에 엎드려 앉은 사자상 위에 남근석이 올려진 석수는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의 지형이 구순혈(狗脣穴)이므로 터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알려져 온다. 그리고 청도리 입구 논 가운데에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63호)가 있다.

고요한 쉼…한 번 찾은 이 잊지 못해

귀신사는 나처럼 조용함과 그윽함에 빠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조용하기 이를 데 없는 절이지만, 한 번 찾은 이는 그 은근한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절이다. 절 입구에는 당시 조병갑과 함께 악행으로 쌍벽을 이루었던 균전어사 김창석의 비가 세워져 있다. 왜 그의 비석이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를 알 길은 없다. 어쩌면 그가 이절에 사주를 많이 해서 세워진 것은 아닐까?

이 절에서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끄는 마력을 지닌 것은 삼층석탑이 서있는 그 언덕에서 바라다 보이는 건너편의 마을 풍경일 것이다. 고즈넉한 혹은 그림처럼 보이는 백운동 마을에 증산 강일순의 제자였던 안내성이 세운 증산대도회를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더러는 세상을 하직하였거나 더러는 떠나가서 스무 채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언젠가 올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을 뿐이다.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숨은 꽃〉의 작가인 양귀자의 표현대로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라는 귀신사의 분위기에 흠뻑 취해 있다가 보면 이곳을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바람 속에 실려 올 것 같기도 하고 숨결이 살아서 달려 오는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고즈넉한 정취 백운동 마을

귀신사 대적광전 지붕너머로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 백운동마을에서 뒤로 난 길을 따라가면 닿는 산이 위대한 어머니의 산인 모악산이다.

모악산 자락 아래에 호남의 거찰인 금산사가 있으며 이 일대를 청도리라고 부른다. 하운동(夏雲洞)은 청도 남쪽에 있는 마을로 화운동(華雲洞)이라고도 부르는데, 산 능지에 있어서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다. 하운동 남쪽에는 임금의 아내라는 뜻을 지닌 제비산(帝妃山)이 있고 그 아래에서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혁명가인 정여립이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대동계를 조직했었다. 그러나 1589년에 일어난 기축옥사로 그의 큰 꿈은 꺾이고 조선의 지식인 일천여명이 희생당한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운동 동북쪽에 있는 산이 깃대봉(262m)이고, 하운동 남쪽에 있는 산은 탁주봉이며, 하운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는 채봉골이다. 하운동 동쪽에 있는 등성이는 산제당이 있어 산 제당골이고, 하운동 서남쪽에 잇는 마을이 구리골이다. 동곡(銅谷)이라고도 불리는 이 마을에서 한말의 종교 사상가인 증산 강일순이 9년 간에 걸쳐 세상의 도수를 바꾸었다는 천지공사를 행했다.

청도리에서 금구면 선암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살푸령재라고도 부르는 싸리재이고, 하운동에서 무악산으로 넘어가는 거개가 술바탱이라고도 부르는 씨름판 날맹이이다. 청도 북쪽 전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마을이 유각(有角)마을이고, 하운동 북쪽에 있는 터는 옛날에 말을 매던 곳이라는 마룻등이 있다.

미륵 신앙의 본 고장이자 동학의 고장이며, 화엄적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강증산과 차경석의 텃밭이 이곳 청도리이다. 가끔씩 찾아가면 가슴이 훈훈해지고 마음이 편안해 지는 곳, 문득 그리운 사람들이 못 견디게 그리운 곳이 귀신사가 있는 청도리이다.

‘청도리의 어느 곳이건 터를 잡고서 마음 다 내려 놓고 귀신사 일대를 거닐며 한가함을 누리고 산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시절이 어디 있을까?’ 하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문화사학자·사단법인 우리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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