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남의 유래
전라남,북도를 통틀어 가리키는 명칭으로 호남지방이란 말을 즐겨 쓴다 말 그대로 자면 호남은 호수의 남쪽이란 뜻으로 금강 이남 지역을 가리킨다.
세종실록에는 그 호수가 김제의 벽골제를 가리킨다고 적혀있고, 또 다른 문헌에는 금강을 옛날에는 호강이라고 불렀는데, 금강을 가리킨다고 적혀 있다.
호남이란 명칭의 유래는 문헌상 세 갈래(금강, 벽골제, 황등호) 설이 있지만 현대사적인 측면에서 재조명해 볼 때, 호남의 3호(三湖, 즉 김제 벽골제, 정읍 눌제, 익산 황등제) 가운데의 하나인 익산의 황등호라고도 한다.
아무튼 호남은 원래 충청남도의 공주, 부여, 논산, 금산 지역 등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호남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전라도로 칭하고 있는 것은 예로부터 호남지방의 중심도시 역할을 했던 전주와 나주에서 한 음절씩 따온 것이다.
고려조 현종 재위시 전라도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게 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전국을 13도로 개편을 하면서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영남은 대관령의 남쪽이라는 설과 문경새재 즉 조령의 남쪽이라는 설이 있다. 조령이라는 설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전부터 문경새재를 가리켜 영남의 관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2.호남이 들어가는 전북의 4개 건축물
전북에는 유독 '호남 제일'이라는 현판이 많다. 호남제일루는 남원 광한루요, 호남제일의 정자는 정읍 피향정이요, 호남제일성은 풍남문이요, 호남평야의 첫 관문인 전주에 세워진 호남제일문도 있다.
호남제일성, 풍남문
호남제일성인 전주부성은 언제 처음 쌓여졌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말 관찰사를 지낸 최유경이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고 보면, 성의 수축은 그 이전일 것이다.
전주를 상징하고 있는 풍남문(보물 제308호)은 전동에 위치, 2층루의 남면에는 풍남문이란 편액이, 북쪽에는 호남제일성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원래는 전주부성의 4대문 가운데 남문으로 고려 공양왕 원년인 서기 1398년에 전라관찰사 최유경이 전주부성과 함께 창건했다고 한다.
이 전주의 남문은 조선 5백년의 역사 명맥을 잇는 수도 한성부의 상징적인 숭례문인 남대문과 같은 형태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호남제일루, 광한루
남원시 광한루(보물 제281호)의 전,후면에는 호남제일루, 계관, 광한루란 현판이 걸려 있다.
호남제일루는 말 그대로 '호남의 제일 가는 누각'이라는 뜻이며, 광한루는 하늘나라 월궁의 궁전 이름이며, 계관은 달나라의 계수나무 신궁을 상징한다. 전면(측면)의 중앙칸 처마밑에는광한루라 쓴 현판이 걸려 있고 배면(북측)의 동측 측칸에는 호남제일루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건물 북쪽 중앙에 층계가 붙어있는데, 점점 기우는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건물 앞 동서에 연못을 만들고 반월형 교각을 가진 두 개의 오작교를 놓아 양 연못을 다리 밑으로 연결했다고 한다.
호남제일정, 관덕정
관덕정(제주 제주시 삼도2동, 보물 제322호)은 호남제일정으로 평가받고 있다.
‘관덕(觀德)’이란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해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에서 따온 말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덕정을 중심에 놓고 남북으로 관아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관덕정 광장은 관아의 중심에 있어서 제주정치 1번지에 해당했다. 게다가 당시 이 일대에는 큰 장이 서고 있었다.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장소로서의 의미보다 광장으로서 기능이 더 부각됐다.
이 누정 건물은 ‘탐라지’에 의하면 1448년(세종 30년)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세웠다. 1480년(성종 11년) 목사 양찬이 고친 뒤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쳤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69년 보수한 것으로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작품인 것으로 ‘남사록’에 의해 밝혀졌다.
제주도의 대표적 누정 건축으로 건축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건물 안쪽 대들보와 그 아래에 그려진 작자를 알 수 없는 벽화도 상당히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거엔 관덕정 지붕 4각에는 풍경이 달려 있었으며, 실내 서쪽 위에 ‘탐라형승(耽羅形勝)’, 가운데에는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입구 위에는 ‘관덕정(觀德亭)’이라고 적힌 액자가 있었다.
‘호남제일정’은 제주목사 박선양이 1882년(고종 19년)에 쓴 것이다. ‘호남제일정’은 관덕정이 들어설 무렵, 제주도는 ‘전라도에 속해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래서 ‘전라도 제주도 모두 합쳐서 첫번째가는 정자다’라는 말을 쓸 수 있었던 셈이다.
관덕정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7폭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의 내용은 두보의 취과양주귤만헌(醉過揚州橘滿軒, 두보가 술에 취해 교자를 타고 양주를 지나는데, 아름다운 기생들이 자기를 쳐다봐 달라고 귤을 던지는 그림),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浩, 네 신선이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나무꾼과 옆에서 낮잠을 자는 신선의 그림),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陣中西城彈琴圖), 홍문연(鴻門宴) 등이 그려져 있어서 보물로서의 가치를 더 인정받고 있다.
호남 제1의 정자, 피향정
한편 전북에는 전주의 한벽당, 남원의 광한루, 순창의 귀래정 등 유독 이름난 정자가 많다. 정읍 역시 호남 제1의 정자로 평가받는 피향정(보물 제289호)이 있다.
태인에 피향정이 생기게 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신라시대 최치원선생이 태산태수(현 태인, 칠보면 일대)로 재임할 때 이곳의 연꽃 방죽을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정자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다. 7개 돌계단의 앞면 현판에는 피향정이라 쓰여져 있고, 하연지쪽 뒷면엔 호남제일정이란 편액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래는 기둥이 30개가 되어야 하는데, 중앙의 2개를 세우지 않고 28개를 세운 것은 우주의 28숙(별자리)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호남제일문
호남제일문이란 이름은 전주가 전라남,북도, 제주도를 통합하는 전라감영의 문, 호남평야의 첫 관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호남제일문의 현판은 단아하면서도 한편 웅장한 듯하면서도 자칫 권위롭기 쉬우나 오히려 따뜻한 필치가 우아함을 드러내는 고 강암 송성용선생의 글씨다.
호남제일문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호남제일문은 북이 허하여 부가 드물다하여 지세상 허술한 북쪽을 누르기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려 전주인터체인지를 벗어나 시내로 들어오다 보면 넓디넓은 8차선도로를 가로질러 서있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이 반긴다.
사실 요즘에 만들어진 2002전주 월드컵경기장은 그 잡은 터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경기장 옆 호남제일은 단지 전주시내로 가는 입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호남 북부의 중심이자 표상이 되는 문이다.
이 문을 들면 대사습놀이의 고장 전주의 멋과 풍류가 있고, 이 문을 나서면 철마다 지평선의 색을 바꾸는 김제 벌판의 여유가 있다.
그렇다면 호남제일문은 언제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을까. 호남제일문은 북이 허하여 부가 드물다하여 지세상 허술한 북쪽을 누르기 위하여 세워졌다.
지난 1977년 5월 기존 4차선 진입로에 건립됐다. 이어 19991년 전국체전 진입로 확장으로 헐렸으며, 1994년 8월 13일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전주 IC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여의도광장에 길이 43미터, 폭 3.5미터. 높이 12.4미터를 갖고 있다.
3. 영남 제일의 건물
눈 덮인 산이나 찬바람 부는 바다가 부담된다면 겨울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경남 밀양(密陽)으로 가보자. '빽빽할 밀'에 '볕 양'. 햇볕이 모이는 곳이라는 밀양은 따스함과 정겨움이 가득하다.
밀양 영남루(경남 밀양시 내일동, 보물 제147호)는 조선시대 밀양도호부 객사에 속했던 곳으로 손님을 맞거나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밀양강 절벽의 아름다운 경관과 조선시대 후반기의 우리나라 건축미를 대표할 만한 국내 제일의 누각인 것이다.
파도가 일렁이는 모습처럼 아름다운 월랑의 3단 기와 지붕은 영남루를 예술 작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현재 문헌으로 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체 누정 가운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누정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가장 최근인 1929년에 편찬된 '조선환여승람'에 따르면 경상도가 1천295개로 가장 많고 전라도(1천70개), 충청도(219개), 강원도(174개), 제주도(6개) 순이다. 경상도 중에서는 안동(97개), 산청(83개), 예천(79개), 거창(69개) 등 순으로 많다.
이보다 앞선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국역본)에는 전국의 누정 수가 885개로 돼 있다. 이 중 경상도가 263개로 가장 많다. 전라도(170개), 평안도(100개), 충청도(80개) 등이 뒤를 잇고 있다.
1365년(고려 공민왕 14년) 당시 밀양군수였던 김주가 통일신라 때 있었던 영남사라는 절에 지은 누로, 그 이름을 빌어 영남루라 불렀다.
7세의 이현석(李玄石)이 썼다는 ‘영남루(嶺南樓)’와 10세의 이증석(李憎石)이 썼다는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가 눈에 띈다.
진주 촉석루(경남 진주시 본성동, 경남 문화재자료 제8호)는 남강 변 벼랑 위에 있는 이 누각으로, 진주성의 남쪽 장대(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던 대)로서 장원루라고도 한다.
1365년에 세운 후 7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쳤는데, 전쟁이 일어나면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 본부로 사용하였고, 평상시에는 과거를 치르는 고시장으로 쓰였다.
진주 촉석루는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평양의 부벽루가 조선 후기의 3대 누각으로 꼽힌다.
촉석루의 누각 정중앙의 예서체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은 청남 오제봉선생이 썼다고 한다.
영남제일문(嶺南第一門)은 충북에서 경북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김천시 대곡동에 있는 문으로, 영남의 첫 관문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영남제일문이 자리는 옛날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길에 오를 때, 그리고 지금은 서울에서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 지역인 대구, 부산으로 내려갈 때 영남의 첫 관문인 김천시를 통과해야 한다는 역사적, 지리적 의미가 담겨있는 장소이다.
중앙에 걸려있는 길이 7m, 높이 1.5m의 현판은 여초 김응현 선생이 직접 글을 썼으며, 각장자 이수자인 고원 김각한씨가 서각했다.
대구광역시 망우공원에 들어서면 하얀 성벽 위로 번듯한 누각 하나가 맨 먼저 눈에 띄는데, 이것이 바로 영남제일관이다.
영남제일관은 조선시대에 축조된 대구읍성의 남문으로 일제시대 때 철거된 것을 1980년에 옛 모습을 찾아 이곳에 중건했다.
실제로, 대구읍성에는 4대문이 있었다.
중심문인 남문은 영남제일관(嶺南第一關)이라고 하여 현재의 약전골목 대남한의원 네거리에 있었고, 서문은 달서문(達西門)이라고 하여, 현 금호호텔 뒤쪽에 있는 조흥은행 서성로지점에 있었다.
북문은 공북문(拱北門)으로 불렀으며 현재의 북성로 경북소방설비 네거리에, 동문은 진동문(鎭東門)로 불렀으며 현재 동아백화점 서쪽의 동성로 제일은행 대구지점 네거리에 위치해 있다.
미니박스: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호남'
1.호남 3대 산성
호남 3대 산성은 금성산성(전남 담양군, 전북 순창군)과 장성의 입암산성, 무주의 적상산성을 말한다.
2.호남 4경
예로부터 호남의 4경이라 하여 사계절에 따라 네 곳의 절경을 꼽고 있다.
호남4경은 모악산의 봄경치(母岳 春景)을 포함, 변산반도의 녹음(邊山 夏景), 내장산의 가을 단풍(內藏 秋景), 백양사의 겨울 설경(白陽 雪景)을 지징하는 말이다.
3.호남 5대 명산
지리산, 내장산, 변산, 천관산, 월출산을 호남의 5대 명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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