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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張良, ? ~ 기원전 186년)

자는 자방(子房). 영천군 성보현 사람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장량(張良)의 선조는 한(韓)나라 사람이다.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한(韓)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희평(姬平) 또한 희왕, 도혜왕의 재상을 지냈다.

희평은 도혜왕 23년에 죽었다. 20년 후 한나라는 진나라에 멸망되었다.

 

장량은 어려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그 집 노복이 300명에 이르렀다. 그 무렵 장량의 동생이 죽었으나 장량은 동생 장례를 치르기는커녕 가산을 털어 진시황을 죽일 자객을 구하고 있었다. 진시황을 죽여 한나라의 원수를 갚고 한나라의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장량은 동쪽 지방으로 가서 대력사(大力士)를 찾아내고 120근이나 나가는 철퇴를 마련했다. 진시황이 동쪽 지방을 순수할 때, 장량과 대력사는 박랑사에 매복하였다가 진시황의 수레를 공격한다는 것이 잘못하여 뒤따르는 수레를 공격하고 말았다. 진시황은 크게 노해 전국 각지에 수색하여 자객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장량은 이름을 바꾸고 달아나 하비(下邳)에 숨었다.

 

장량이 한가하게 하비의 다리 위를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거친 삼베옷을 걸친 노인이 다가오더니 일부러 신을 다리 밑에 떨어뜨리고는 장량에게 말했다.

“이보게, 내려가서 내 신을 주워 와.”

장량은 노인이라 어쩌지 못하고 다리 밑으로 내려가서 신을 주워왔다. 그러자 노인은 신을 신기라 하였다. 장량은 기가 막혔지만 신까지 주워다 주었는데 까짓 못 신겨주랴 싶었다.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 꿇어앉아 신을 신겨 주었다. 신을 신겨주자 노인은 웃으면서 가버렸다. 장량은 물끄러미 노인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노인은 1리쯤 가다 다시 돌아왔다.

“그놈, 생각할수록 기특하구나. 닷새 뒤 새벽에 여기로 오너라.”

장량은 괴이하게 여겼으나 그러겠다고 대답하였다. 닷새째 되는 날 새벽 장량이 약속장소로 나가보니 노인이 벌써 와 있었다. 노인은 화를 내며 꾸짖었다.

“늙은이와 약속을 해 놓고 늦게 오다니,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노인은 획 돌아서며 말했다.

“닷새 뒤에는 좀더 일찍 오너라.”

닷새 뒤 장량은 새벽닭이 울자마자 그곳으로 나갔다. 노인은 또 먼저 와 있었다.

“이런 고약한 일이 있나. 닷새 뒤에는 더 일찍 나오너라.”

노인은 화를 내며 떠나버렸다. 다시 닷새 뒤 장량은 밤중에 그곳으로 가서 노인을 기다렸다. 그랬더니 조금 뒤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미소를 지으며 책 한권을 내놓았다.

“이 책을 읽으면 황제의 스승이 될 수 있다. 10년 뒤에는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13년 뒤에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터인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서 만나게 될 누런 돌이 바로 나이다.”

그 말을 남기고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날이 밝기 시작하자 책에 적힌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그 책은 강태공 여상이 지었다는 태공병법太公兵法이었다.

 

장량은 하비에 있을 때 협객이 되었다.

항우의 숙부인 항백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 다니는 신세였는데 장량을 따라다니며 숨어 지냈다.

10년 뒤 진승 등이 봉기하자 장량도 청년 100여 명을 모았다.

경구(景駒)는 자립하여 초나라의 임시 왕이 되어 유현(留縣)에 있었다.

장량은 경구를 따르려고 유현으로 가던 도중 유방을 만났다.

이때 유방은 수천명을 거느리고 하비 서쪽 땅을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장량은 유방을 따라갔다.

유방은 장량을 군마를 관장하는 벼슬인 구장(廐將)으로 삼았다.

 

장량은 태공병법으로 유방에게 유세하였고 유방도 장량의 계책에 따르곤 하였다. 장량은 다른 사람에게도 태공병법을 이야기해 봤지만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장량은 유방이야말로 하늘이 낸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경구에게 갈 마음을 접어 버렸다.

유방이 설읍(薛邑)으로 가서 항량(項梁:항우(項羽)의 숙부)을 만났다. 항량은 초나라 후손 웅심을 찾아 회왕으로 세웠다. 장량이 항량에게 간언했다.

“이미 초나라 왕실의 후손을 찾아 왕으로 세우셨으니, 한(韓)나라 왕실의 후손들 중 횡양군(橫陽君) 성(成)이 어진 이름을 얻고 있어 그를 한왕(韓王)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를 한왕으로 세워 한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규합하시기 바랍니다.”
항량이 장량을 시켜 한성(韓成)을 찾아 한왕으로 세우라고 했다. 장량은 한왕 성(成)의 사도(司徒)가 되어 그와 함께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한나라 땅을 공략하여 몇 개의 성을 얻었으나, 그때마다 즉시 반격한 진나라에게 다시 빼앗기고 말았다. 이에 장량과 한왕 성은 영천(穎川) 일대에서 정처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유방이 낙양에서 남쪽으로 진격하여 환원산에 이르자 장량은 군사를 이끌고 유방과 합류하여 한나라 땅 10여 성을 무너뜨리고 양웅(楊熊)의 군대를 격파하였다. 유방은 한왕 한성은 남아 양책을 지키게 하였다. 장량을 데리고 무관(武關)으로 진격해 갔다.

유방이 2만의 병력으로 요관(嶢關)을 지키는 진나라 군대를 치려고 하자 장량이 간언하였다.

“진나라 군대는 아직까지는 막강하니 섣불리 칠 수 없습니다. 요관을 지키는 장수가 백정의 자식이라 하니, 뇌물로 쉽게 매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께서는 공격을 멈추시고 먼저 5만 명의 군량을 준비하게 하시며 산 위에 깃발을 많이 세워 병력이 많아 보이게 하십시오. 그 후 역이기를 보내 많은 재물로 적장을 매수하십시오.”

과연 적장이 유방과 손을 잡고 진나라의 도읍인 함양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유방이 적장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자 장량이 말렸다.

“저 장수만이 진나라를 배반하려고 하고 그 수하의 병사들이 따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병사들이 딴 마음을 품으면 위험하니 그들의 긴장이 풀어진 틈을 타서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유방은 진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대파하고 패잔병을 쫓아 남전(藍田)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전투가 다시 벌어졌으나 승리는 유방에게로 돌아갔다. 여세를 몰아 함양에 다다르자 진나라의 마지막 왕 자영이 유방에게 항복하였다.

 

진나라 궁궐로 들어간 유방은 셀 수 없이 많은 값진 보물과 미녀들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대로 머물려고 하였다. 번쾌가 유방에게 궁궐 밖으로 나가기를 충간했으나 듣지 않자 장량이 나섰다.

“공께서 여기까지 오실 수 있었던 이유는 진나라가 무도했기 때문입니다. 진나라의 잔당들을 물리쳐야 하는 이때에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신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무어라 하겠습니까? 충성스러운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이롭고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몸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 번쾌의 말을 들으십시오.”

그러자 유방은 패상(霸上)으로 군대를 물렸다.

 

항우가 이윽고 홍문(鴻門)에 이르러 패상의 패공을 공격하려고 했다.

이에 항백(項伯)이 야음을 틈타 패공의 진영에 당도하여 아무도 몰래 장량을 만나 그곳을 빠져나가자고 했다.

장량이 듣고 항백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한왕(韓王)을 위해 패공에게 파견된 사람입니다. 오늘 일이 급하게 되었다고 나 혼자 도망친다면 그것은 의가 아닐 것입니다.”
장량이 즉시 패공에게 달려가 그 일을 고했다. 패공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패공께서 함곡관으로 군사를 보내 항우를 막으려고 하셨는데 정말로 항왕(項王:항우)에 반기를 들려고 하신 것입니까?”
“어떤 천박하고 무지한 놈이 나보고 말하기를 함곡관에서 제후군을 막게 되면 진나라 땅은 모두 차지할 수 있다고 했소. 그래서 내가 그의 말을 따른 것이오.”
“그렇다면 패공께서는 지금 항우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패공이 한 동안 말이 없더니 이윽고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어떻게 하면 좋겠소?”
장량이 항백을 억지로 패공 앞으로 데려와 회견을 시켰다.

항백을 접견한 패공은 그에게 술잔을 올려 축수를 하고 그들 자녀들을 혼인시켜 인척 관계를 맺기로 했다.

항백은 초군의 진영으로 돌아가 패공이 감히 항우를 배반할 생각을 하지 안 했으며, 단지 함곡관에서 제후군에게 항거한 것은 도적들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뒤이어 패공의 좌사마 조무상이 배반하여 항우에게 유방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고 밀고하자 항우는 크게 격분하여 유방을 공격하려 한다.

이때 장량은 유방을 설득하여 항우에게 가 사죄하게 하는데, 이것이 유명한 '홍문연(鴻門宴:홍문에서 열린 연회)'이며 장량은 여기서 유방을 먼저 피신시킨 뒤 스스로 항우와 범증(范增)에게 대신 사죄를 함으로써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홍문연(鴻門宴)

 

한나라 원년(元年), 유방은 한왕(漢王)이 되어 파, 촉을 다스리게 되었다. 유방이 장량에게 황금 100일과 진주 2말을 하사하였는데, 장량을 그것들을 모두 항백에게 주었다. 그러자 유방은 장량을 통하여 많은 재물을 항백에게 주면서 한중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항우에게 청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중을 항우에게서 얻었다.

 

유방은 한(韓)나라로 돌아가는 장량을 포중(褒中)까지 배웅하였다. 장량은 헤어지면서 유방에게 말했다.

“이번에 파, 촉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험한 골짜기를 연결하는 잔도(棧道)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리를 모두 끊어 천하에 동쪽으로 나올 뜻이 없음을 보여주십시오. 그리하면 항우도 안심할 것입니다.”

유방은 장량을 한나라로 보내고 자신의 봉국으로 가면서 잔도를 모조리 불태워 끊어 버렸다.

장량이 한(韓)나라에 도착해 보니 항우가 한왕(韓王) 한성을 봉국으로 보내지 않고 자신을 따라 동진하도록 하였다. 예전에 장량이 유방을 따라간 것 때문이었다. 장량은 항우에게 유방은 잔도를 모두 끊어 동쪽으로 나올 마음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제왕(齊王) 전영이 모반하였다는 사실을 편지로 항우에게 알렸다. 서쪽으로 간 유방에 대한 걱정을 접게 된 항우는 북쪽으로 군대를 보내 제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항우는 한왕 한성을 돌려 보내지 않고 결국 팽성에서 살해하였다.

장량은 달아나서 유방에게로 돌아갔다.

이때는 유방이 이미 동쪽으로 진격하여 삼진(三秦)을 평정한 후였다. 유방은 장량을 성신후(成信侯)에 봉하고 동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하는데 따르게 하였다. 그러나 팽성에서 한나라 군대는 대패하였다. 하읍(下邑)에 이르자 유방은 말에서 내려 말 안장에 기댄 채 물었다.

“나를 도와 천하를 평정시킬 만한 자가 있다면 함곡관 동쪽을 떼어 상으로 주겠다. 과연 그럴만한 자가 있겠는가?”

장량이 대답하였다.

“구강왕 경포는 초나라의 맹장이지만 항우와 사이가 좋지 않고, 팽월은 제왕 전영과 더불어 양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경포와 팽월은 급히 써야 합니다. 또 대왕의 장수들 중에는 한신만이 큰 일을 맡길만 합니다. 이 세 사람에게 함곡관 동쪽의 땅을 나누어 준다면 초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에 따라 수하를 경포에게 보내어 설득하게 하는 한편, 팽월에게도 사람을 보내 설득하게 하였다.

그리고 위왕 위표가 반란을 일으키자 한신을 보내 무찌르게 하였다.

경포와 팽월, 한신은 유방을 대신하여 연나라, 대나라, 제나라, 조나라 땅을 점령하였다.

장량은 병이 잦았기 때문에 군대를 직접 통솔하지 못하고 늘 유방을 수행하면서 계책을 내놓았다.

 

한 3년, 항우가 형양에서 유방을 포위하였다. 유방은 역이기와 함께 항우를 약화시킬 방법을 논의하였다. 역이기가 계책을 내놓았다.

“진나라가 한(韓), 위(魏), 연(燕), 조(趙), 제(齊), 초(楚)의 후사를 끊어 버리지 않았사옵니까? 왕께서 이들 육국(六國)의 후손들을 복위시켜 준다면 그들과 그의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높이 사게 되어 모두 왕의 신하와 백성이 되고자 할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왕께서는 패왕(覇王)으로 불리게 될 것이고 초나라도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입니다.”

유방은 역이기의 계책에 따르기로 하였다. 역이기가 떠나기 전에 외지에 나갔던 장량이 돌아왔다. 그때 유방은 식사 중이었다.

“장자방(張子房), 어서 오시오. 나를 위하여 초나라를 약화시킬 계책을 내놓은 사람이 있소.”

유방은 역이기의 계책을 장량에게 일러주고 의견을 물었다.

“누가 이따위 계책을 내 놓았습니까? 이대로 하면 왕께서는 천하의 대업을 이룰 수 없습니다.”

“무엇 때문이오?”

“천하의 인물들이 가족과 헤어지고 조상의 묘를 버려둔 채 왕을 따라 다니는 것은 좁은 땅덩어리라도 떼어 주기를 바래서입니다. 그런데 육국의 후손의 세우시면 그들은 각자 자기 나라로 돌아가 제 왕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왕께서는 누구와 함께 천하를 도모하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육국을 세워 잠시나마 초나라를 약하게 할 수 있겠지만 훗날 초나라가 다시 강해진다면 왕께서 세운 육국이 초나라를 따르게 될 터인데, 그때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유방은 먹고 있던 음식을 뱉아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놈의 역이기, 어디 있느냐! 고약한 유생(儒生) 놈 때문에 하마터면 대사를 망칠 뻔 하지 않았나?”

 

한 4년, 한신이 제나라를 격파한 후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려고 하자 유방이 노하였다. 장량은 유방을 진정시키고 한신을 제왕으로 삼게 하였다.

 

그해 가을, 유방은 양하(陽夏) 남쪽까지 초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갔으나 전세가 불리해져서 고릉(固陵)으로 들어가 보루를 지키게 되었다. 그런데 한신과 팽월이 약속한 기일이 되도록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 장량이 유방을 설득하여 한신과 팽월에게 땅을 나누어주겠다는 약속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한신과 팽월의 구원군이 도착하였다. 유방은 마침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유방은 논공행상을 하면서 장량을 두고 말했다.

“군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내어 천리 밖에서 승리를 거두게 한 것은 모두 장량의 공이다. 장량은 마음대로 제나라 땅에서 3만호를 골라 가지라.”

그러자 장량이 말하였다.

“신이 처음 하비에서 일어나 폐하를 유현(留縣)에서 뵈었는데, 이는 하늘이 신을 폐하께 주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신의 계책을 쓰셨고, 다행히 계책이 맞아 들어갔을 뿐입니다. 신은 유후(留侯)에 봉해지는 것으로 족합니다.”

유방은 장량을 유후로 봉하였는데, 소하 등과 동시에 봉해진 것이었다.

유방은 대표적인 공신 20여 명을 봉하였으나 나머지는 서로 공을 다투는 바람에 봉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방은 낙양의 남궁(南宮)의 구름 다리 위에서 장수들이 모래밭에 모여 앉아 얘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함께 있던 장량에게 물었다.

“저들은 저기서 무슨 얘기들을 하고 있소?”

“폐하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모반을 꾀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천하가 평정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무슨 까닭으로 모반을 꾀한단 말이오?”

“폐하께서는 평민 신분으로 일어나 저들과 함께 천하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 천자가 되신 후 봉한 자들은 폐하께서 친애하는 소하나 조참 같은 옛 친구들이고 죽인 자들은 평소에 원한이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군 인사관의 말로는 천하의 땅을 다 나눠준다 해도 공이 있는 자들을 봉해 줄 수 없다 하니 저들은 봉해주시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 날의 과실 때문에 죽게 될까 두려워 모반을 하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이오?”

“신하들이 다 아는 자 가운데에서 폐하께서 가장 미워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짐은 옹치(雍齒)에게 원한이 있으나 공이 커서 참고 있는 중이오.”

“그러면 하루 속히 옹치를 봉하십시오. 여러 신하들이 자신들도 곧 봉해질 것이라 굳게 믿게 될 것입니다.”

이에 유방은 술자리를 베풀어 옹치를 십방후(什方侯)에 봉하였다. 술자리가 끝나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유경(劉敬)이 유방에게 관중에 도읍을 정하라고 설득하였으나 유방은 망설였다. 좌우 대신들이 모두 산동 출신이어서 대다수가 낙양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러자 장량이 말하였다.

“낙양은 중심 지역이 수백리에 불과하고 땅은 척박하며 사방에서 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 저 관중은 중심 지역이 천리에 뻗어 있고 서쪽으로는 함곡관과 효산의 험한 지세가 방패막이가 되며 남쪽으로는 파촉의 풍부한 자원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소와 말을 방목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앞으로 제후들이 순종하면 황하, 위수를 통하여 천하의 식량을 서쪽 도성에 공급할 수 있으며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물길을 타고 내려가 군대와 군수 물자를 수송할 수 있습니다. 어찌 관중의 이로움을 낙양에 비기겠습니까? 유경의 말이 옳습니다.”

유방은 그날 즉시 수레를 타고 서쪽으로 가서 관중에 도읍을 정하였다.

 

장량도 유방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갔다. 장량은 병이 잦아 도가의 양생법에 따라 몸을 다스리면서 곡식을 먹지 않고 1년여 동안을 두문불출하였다.

유방이 태자 호혜를 폐하고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대신들은 다투어 불가하다고 충간을 하였으나 유방은 확실하게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호혜의 어머니 여후(呂后)는 속이 탔다. 이때 어떤 사람이 여후에게 아뢰었다.

“장량은 계책을 잘 세워 폐하의 신임이 두텁사옵니다.”

여후는 둘째 오빠인 건성후 여석지(呂釋之)를 시켜 장량을 위협하였다.

“그대는 폐하의 은덕을 입었으면서 폐하께서 태자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베개를 높이고 누워 있기만 해서 되겠소?”

“예전에는 폐하께서 저의 계책을 여러 차례 써 주셨으나 당시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천하가 안정되어 제 말을 들어 주실지 의문입니다. 또 편애하는 자식으로 태자를 바꾸시려는 것은 골육간의 일인지라 저 같은 사람 100명이 말씀드린다 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석지는 강압적으로 말하였다.

“듣기 싫소. 여후를 위해 계책을 세워 주기나 하시오.”

“그러지요. 폐하께서 마음대로 불러 올 수 없었던 사람이 은자(隱者) 네 명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연로합니다. 그들은 폐하께서 사람을 무시한다고 여긴 까닭에 상산(商山)에 은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이들을 존경합니다. 지금 공께서 보물과 비단을 아끼지 않고, 태자께 정중한 편지를 쓰게 하고, 편안한 수레를 준비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보내 간곡하게 청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올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다가 태자와 함께 조회 때 참석하게 하면 폐하께서 그들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면 태자께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후는 장량의 말대로 하여 그들을 맞아 들일 수 있었다.

 

한 11년, 경포가 반란을 일으켰다. 마침 유방이 병이 나서 태자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려고 하였다. 네 은자는 서로 의논하였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태자를 보위하기 위해서요. 태자가 전쟁터에 나간다면 일이 위태로와질지도 모르오.”

그리하여 여석지를 만났다.

“태자께서 출정하여 공을 세우더라도 태자의 권위에는 보탬이 없을 것이나 반대로 공을 세우지 못한다면 화를 입게 될 것이오. 그리고 태자와 함께 출정할 장수들은 백전노장들이오. 태자가 그들을 거느린다는 것은 양이 이리를 거느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니 그들이 태자를 위해 힘을 다할 리 없소. 그러니 어찌 태자께서 공을 세우실 수 있겠소?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태자가 공을 세우지 못한 걸 빌미로 조왕을 태자로 삼을 게 틀림없소.”

“아니 되오. 그럴 수 없소.”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오. 여후께 기회를 보아 폐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씀드리라 하시오.”

“무슨 말씀을 드리라는 말이오?”

“경포는 천하의 맹장인데가 여러 장수들이 폐하의 옛 동료라서 태자의 명령에 잘 따르지 않을까 두렵다, 경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히 장안으로 진격해 올 것이다, 그러니 폐하께서는 병환 중이시기는 하나 누워서라도 장수들을 통솔해서 나가셔야 경포를 제압하실 수 있다, 고통스러우시더라도 처자를 위해 힘을 써 달라, 이렇게 말이오.”

여석지는 그날 밤 여후를 만나 그들의 말을 전하였다. 여후는 기회를 보아 눈물을 흘리며 네 은자의 의도대로 말하였다. 그러자 유방이 말했다.

“그렇잖아도 그 어린 아이는 보낼만 하지 못하다 생각하고 있던 터였소. 짐이 직접 출정하겠소.”

유방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출정하자 신하들이 파상까지 전송하였다. 장량도 병상에 있었으나 억지로 일어나 전송하였다.

 

한 12년, 유방은 경포의 군대를 격파하고 돌아온 뒤 병세가 더욱 심해졌다. 유방은 태자를 서둘러 바꾸려고 하였다. 장량이 유방에게 그만 두기를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병을 핑계로 공무를 보지 않았다. 태자태부(太子太傅)인 숙손통(叔孫通)은 죽을 각오로 태자를 보위하기 위해 애썼다. 유방은 겉으로 숙손통의 말을 들어주는 척 하였으나 속으로는 태자를 바꿀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연회에 태자가 황제를 모시게 되었는데 네 은자가 태자를 따르고 있었다. 모두 나이가 80이 넘었고 수염과 눈썹이 희었으며 위엄 있어 보였다.

유방이 그들을 괴이하게 여겨 누구인가를 물었다. 그러자 네 은자는 나아가 각각 이름을 말하기를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라 하였다. 유방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일이 있나? 짐이 공들을 가까이 하고자 몇 년을 노력하였으나 공들은 짐을 피하여 도망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떤 연고로 태자를 따라 노니는고?”

네 은자가 모두 아뢰었다.

“폐하께서 선비를 업신여기고 잘 꾸짖으신다 하여 신들은 도망가 숨어 살았사옵니다. 그러다 태자의 사람됨이 어질고 효성스럽고 사람을 공경하고 선비를 아껴 천하에 태자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이가 많다고 들었기에 신들이 온 것이옵니다.”

“번거롭겠지만 공들이 끝까지 태자를 잘 보필해 주기 바라오.”

네 은자가 유방에게 장수를 기원하고 물러가자 유방은 척부인을 불렀다. 그 네 은자를 가리키며 유방이 말했다.

“짐이 태자를 바꾸려 하였으나 저 네 사람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으니 짐의 뜻을 접어야겠소.”

척부인이 흐느끼자 유방이 말했다.

“짐을 위해 초나라 춤을 춰 주오. 짐도 부인을 위해 초나라 노래를 불러 드리리다.”

유방이 연달아 노래를 부르자 척부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렸다. 유방이 일어나자 술자리도 끝났다.

 

그해 유방이 붕어하였고 8년 후 장량도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문성후라고 하였다.

하비의 다리에서 태공병법을 건네 준 노인을 만난 지 13년 되던 해에, 장량은 유방을 따라 제북을 지나가다가 곡성산 아래 이르러 누런 돌을 보게 되었다. 장량은 그 돌을 가지고 돌아와 애지중지하며 제사까지 지냈다. 장량이 죽자 누런 돌도 함께 묘에 안장하였다.

 

장량은 유방을 둘러싸고 있던 고향 출신인(소하, 조참, 주발 등) 이른바 ‘패(沛)마피아’와 갈등을 일으키지 않았다.

유방이 천하통일하고 한나라 건국 후 ‘패(沛)마피아’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공신들이 팽(烹)당할 때 장량만은 온전히 살아남았다.

그는 들 때와 날 때를 누구보다 잘 알았고, '멈출 줄 안다'는 뜻의 ‘지지’(知止)를 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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