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글
허백련 許百鍊 (1891 ~ 1977)
진도에서 태어나 1937년 무등산 증심사계곡에 정착하여 이후 평생을 무등산에서 살았다.
허백련은 본관은 양천(陽川)이며 호가 의재(毅齋)이다.
19세기 진도 출신의 남종문인화가 소치 허련과는 한집안으로, 어려서 허련의 아들인 미산(米山) 허형(許瀅, 1862~1938)에게서 그림의 기본을 익히고 진도에 유배 왔던 무정(戊亭) 정만조(鄭萬朝, 1858~1936)에게 한학을 배웠다.
허백련은 서울에서 공부하던 중 일본으로 건너가 법학을 배우다가 중퇴했다. 그리고 일본 남종화(南宗畵)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에 들어가 그림공부를 했다. 일본에서 그는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등과 친하게 지내며 귀국한 뒤에 작품 활동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받게 된다.
1920년 목포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화가가 되었고,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출품한 『추경산수』가 1등 없는 2등을 차지하자 허백련은 본격적으로 화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해 동아일보 후원으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으며 제6회 선전까지 계속 출품하였다. 허백련이 그린 그림들은 전통성이 매우 강한 것들로 특히 남종화의 정통성을 고집한 수묵산수화였다. 대체로 중국 그림과 화보의 영향이 매우 큰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화단에는 일본화풍과 신남화 계열의 작품들이 인기를 얻을 때로, 허백련은 1927년 6회 선전 이후로는 더 이상 출품하지 않고 몇 년의 방랑생활을 마치고 1937년 광주에 돌아와 정착하게 된다. 이듬해인 1938년 허백련은 연진회를 발족시켰다. 연진회는 서화를 통한 인격도야에 목적을 둔 일련의 호남지역 인사들의 모임이었다. 이 시기 동강 정운면, 근원 구철우 등 서화가를 비롯하여 지방유지와 고급 관리, 일본인이 연진회에 참여하였다. 몇 회의 전시회와 서화회(書畵會)를 통해 연진회 회관 건물을 세우고 독자적인 화필생활과 문하생 지도를 할 수 있게 된 허백련은 ‘전통적 남종화의 부흥’을 주장하였다. 또한 창씨개명반대운동에 참여하기도 하며 민족의식 고취에도 앞장섰다.
이와 함께 1946년 무등산의 차밭을 사들여 삼애다원을 설립하여 춘설차를 생산하고, 삼애학원이라는 광주국민고등학교를 설립한 후 이듬해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여 가난한 청소년들에게 농사기술과 학업을 할 수 있도록 사회사업에도 열정을 쏟았다.
허백련은 호남화단 뿐만 아니라 한국화단에서 남화의 맥을 이은 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의재산인(毅齋山人)’과 ‘의도인(毅道人)’이라는 호를 사용하며 단아하고 깊이 있는 운필을 통하여 남화의 정신세계를 가장 진솔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허백련이 그린 『일출이작』(1954)은 전남대학교 농과대학에 기증할 것을 전제로 그린 것으로, 그 역시 농업학교를 세우고 농업발전에 힘썼던 면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복숭아꽃 피는 남도의 봄과 낮은 산, 넓은 농경지의 풍요로운 모습을 꼼꼼하고 완숙한 필법으로 묘사하였다.
허백련은 화가로서의 면모와 함께 한시, 고전, 서법(書法)을 아우르는 호남서화계의 상징적인 거봉으로 추앙된다. 허백련의 화풍은 ‘연진회’의 회원들과 그 문하생으로 이어져 연진미술원이 생기고 현재까지 전통회화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작으로 『계산청하(溪山靑夏)』(1924), 『일출이작』(1954), 『설경(雪景)』(1965), 『추경산수(秋景山水)』(1971)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의재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허백련, 『일출이작』(1954, 전남대학교박물관 소장) ⓒ 전남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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