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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예술 (예술)  [아방가르드]

출처: 브리태니커

 

 

미국·영국의 모더니즘과는 다른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서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상징주의·입체파·초현실주의·표현주의의 총칭.

 

아방가르드(avant-garde)는 원래 군사용어로서 전투할 때 선두에 서서 돌진하는 부대를 뜻하는 것이었다. 이후 19세기초에 계급투쟁의 선봉에 선 정당과 당원을 가리키는 정치용어로 사용되었고, 19세기 중반부터 미지의 문제와 대결하여 지금까지의 예술을 변화시키는 혁명적 예술경향이나 그 운동을 뜻하는 예술용어로 정착되었다.

 

전위예술의 일반적 특징은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미학적 자의식 또는 자기 반영성을 들 수 있다. 전위예술가들은 신비감을 주기 위해 작품을 장인적·귀족적으로 만들고 자신의 주관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시각적·언어적으로 꾸미게 된다.

 

 둘째, 동시성을 들 수 있는데, 전위예술가들 가운데 특히 소설가는 작품 안에 연속적인 시간이 아닌 과거·현재·미래를 응축시킨 심리적 시간을 중요하게 다룬다.

 

셋째, 역설·모호성·불확실성을 들 수 있으며, 19세기 후반에 전위예술가들은 현실 속에서 극히 모호한 이미지와 서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소설가들은 전지적 작가시점이 아니라 1인칭이거나 매우 제한된 시점을 사용했고, 작품의 결말을 독자가 작품 밖에서 판단하도록 미루거나 전망을 제시하도록 만들었다.

 

넷째, 주체의 붕괴 또는 비인간화를 들 수 있다. 19세기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문학에서 등장인물들은 구조화된 인격을 지니며 사회와 상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래서 작가나 극작가는 행위나 심리상태의 묘사를 통해 종합적 인격을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특징은 산업화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가중되는 산업사회에서 예술가는 새로운 전문직, 문화의 시장 조달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예술이 19세기 이후 기존의 후원자(patron) 체제가 쇠퇴하고 경쟁시장에서 매매되는 상품이 되자 예술가는 자신의 상품을 잘 팔기 위해 독창성과 혁신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중적인 중산층은 물론 기업의 무관심 때문에 예술가들은 차츰 무기력해지고 또 산업화·도시화가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기존의 예술가들의 정서적 영감이 되었던 자연의 의미가 변모되었다. 즉 주어진 환경을 정복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자연의 인간화는 C. 보들레르 이후 예술이 현실의 반영으로서가 아니라 자기반영의 구성체로 변화된 것이다.

 

전위예술가들은 현실을 혼돈이라고 인식할 수 없으며 법칙도 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현실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위예술은 경험세계와 관계 없이 비유를 만들어내고 그것의 감정토로를 반복할 뿐 총체적인 형상화를 이루어내지 못한다.

 

사실주의 이론가들은 전위예술이 갖는 이러한 추상성은 역사의 진정한 흐름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허구의 예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부정적인 것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하나의 지양을 이루어낸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T. 아도르노 전위예술에서 중요시하는 기교를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문화제도와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집합체로 보았다.

 

 

전위예술에 대한 여러 이론 가운데, 먼저 W. 벤야민 보들레르를 서로 관련이 없는 사물과 타락한 상품들, 파리라는 도시의 떠돌아다니는 군중에게서 발견되는 회의적인 경험에 도취한 상태로 굴복한 시인으로 보고 그가 역설적으로 도시에서의 인간성 해체를 고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W. 보링거나 H. E. 리드 전위예술이 근대를 기반으로 한 예술이면서도 동시에 예술사의 순환적 흐름에서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추상과 감정이입의 특징 가운데 추상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또한 A. 하우저 매너리즘과 전위예술의 공통점을 비교하면서 전위예술이 소외의 예술임을 강조했다.

 

 문학에서의 전위예술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에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시인 보들레르, J. N. A. 랭보, P. M. 베를렌 등은 언어의 지시적·묘사적 기능을 가능한 배제하고 고도의 은유를 사용한 시를 썼다. 그들에게 있어 자연은 독자적 실제가 아니며 언어를 심리적·음악적으로 울리게 하는 자극제이고, 예술은 자연이 아니라 정신을 기초로 하는 고안물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독일에 와서 표현주의 문학으로 정착되었는데, 독일에서는 자신의 불안과 고뇌를 소외되고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기계·도시·가족·대중들에게 비추어 나타났다.

 

표현주의 문학가들은 자신의 절박한 심리를 도치된 문장이나 토막낸 언어, 단음절적 비명과 과장법을 사용해 표현해냈는데, 이런 기법들은 산업화·도시화·군국주의화 때문에 나타나는 인간의 자아상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주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F. 카프카가 있으며 그의 작품들은 사회적·관료적 통제에 직면해 주체의 자율성이 허구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술에서의 전위예술은 입체파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작품에 자연과 사회의 인간적 구성이라는 적극적 감정을 나타내게 되었다. 입체파들은 산업사회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자연의 기술정복을 인간적으로 표현해내고자 노력했고, 작품의 소재를 인간이 사는 현대 도시의 구성물에서 찾았다. 예를 들어 입체파의 그림은 원근법에 의해 3차원으로 꾸며져 있지 않고 2차원의 복합시점으로 이루어져 있다. 미술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그 전위적 양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입체파의 뒤를 이어 최근에는 팝 아트, 하이퍼 리얼리즘, 비디오 아트와 같이 표현매체의 새로운 개발과 예술인식의 급격한 변화를 통해 후기 산업사회의 성격을 수용하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음악에서의 전위예술은 보는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가 대두될 수 있으나 연주의 경우 리듬이나 형식을 미리 설정하지 않고 연주자의 선택에 의해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연주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서양음악사). 현대에 와서 전자음악이나 컴퓨터 음악, 혼합 미디어 등이 등장함에 따라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면에서 전 시대와 다른 예술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연극 영화에도 전위예술이 도입되어 무대에서 자연주적인 소품이 없어지고 계단·입면체·아치 등의 구성물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또한 대중은 선동적인 암시에 의해 불합리하게 행동하는 얼굴 없는 인간으로 묘사되었고, 격렬한 비난과 사랑, 형제애에 대한 호소가 자주 나타나며 관능적이고 격렬한 본능의 해방도 주장되었다.

 

 

 

모더니즘 (문학)  [modernism]

 

현대문학의 여러 경향 중에서 특별히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유파.

 

이를테면 상징주의·초현실주의·입체파·소용돌이파 등을 총칭하여 이르는 말이다.

모더니즘은 더 직접적으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초에 융성했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사실주의와 자연주의는 19세기의 유물론적 경향과 관련이 깊은데 모더니즘은 그러한 세계관은 물론, 일체의 물질주의와 산업주의를 개인정신의 부자유로 해석하고 배격했다.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서양 어디에서나 널리 쓰이는 명칭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도 영미 비평계에 치우친 명칭이다. 유사한 문예사조가 독일에서는 흔히 '전위주의'(Avantgardismus)로 칭해지는데, 이것이 영어로 '모더니즘'이라 번역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기원에 해당하는 상징주의 예술이 일찍이 19세기부터 자리잡았기 때문에 모더니즘이라는 애매한 명칭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영미계통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들로는 에즈라 파운드, W. 루이스, D.H. 로렌스, T.S. 엘리엇 등을 들 수 있다. 1908~14년에는 소설가와 시인들이 바로 이전 시대뿐 아니라 낭만주의 이후 전체 시기의 문학전통에 도전하는 혁신과 실험의 주목할 만한 생산적인 시기였다. 그 중심무대의 하나가 런던이었고 그 주도적인 인물이 에즈라 파운드였다.

 

인류학·심리학·철학·정치이론과 정신분석의 새로운 사상들에 자극을 받은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모더니즘 운동은 무엇보다도 영국과 미국의 '이미지스트'들이 주도했다. 낡은 시적 전통에 대항하여 이미지스트들은 목가적인 정감이나 제국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니라 정확한 기술(description)과 심상(心像)의 환기를 가능하게 하는 시적 언어를 정련하려고 했다.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그들은 자유시와 비정형시를 사용했으며,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삼았다. 화가이자 작가인 W. 루이스의 '소용돌이'라는 기치 아래 모인 화가들과 조각가들은 입체파의 추상기법과 그들의 그림·조각·문학에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현대적 산물들의 새로운 감각을 담고 있는 이탈리아 미래파들의 기법을 결합시켰다.

 

 그 잡지명부터 눈길을 끄는 〈돌풍 : 위대한 영국의 소용돌이 평론 Blast : Review of the Great English Vortex〉은 소용돌이파의 대변지였으며 그 편집자인 루이스가 가장 적극적인 선전자이자 대표자였다. 1914년 〈돌풍〉에 게재된 그의 실험희곡 〈별들의 적 Enemy of the Stars〉과 실험소설 〈타 Tarr〉는 넘쳐 흐르는 충일감으로 현재까지도 그 여파가 생생히 남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더니즘 운동의 첫번째 시기는 종말을 고한다. 과격하고 유토피아적인 충동이 소멸되지는 않았으나 영미의 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의 이상과 현시대의 혼돈 사이의 간극을 너무도 명백히 자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소설가와 시인들은 그들이 볼 때 전쟁의 엄청난 참화와 공포로 인해 무용지물이 된 전래의 형식과 문체를 패러디화하게 되었는데, D.H. 로렌스와 T.S. 엘리엇이 그 대표자들이다.

 

혁신적인 소설 〈무지개 The Rainbow〉(1915)와 〈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에서 D.H. 로렌스는 대량학살에만 골몰하고 있는 현대문명의 질병의 원인을 산업화가 인간정신에 미친 영향에서 찾고 있다. 전래의 소설전통을 배격하고 노동자계급의 생활을 그린 자전적인 소설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에서 그는 신화와 상징에 주목하면서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인간적 노력과 정열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유지한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T.S. 엘리엇은 그의 매우 혁명적인 시 〈프루프록과 그밖의 묘사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1917)·〈황무지 The Waste Land〉 등에서 현대문명의 질곡을 정신적 공허함과 현대적 삶의 소외에서 추적했다. D.H. 로렌스와 마찬가지로 T.S. 엘리엇은 종래의 시 전통을 배격하고 신화와 상징에 주목했다. 그러나 자기포기와 자기극기에 의해서만 개인과 집단의 재탄생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로렌스와 판이한 견해를 표명했다.


 

로렌스와 엘리엇의 엘리트주의 및 온정주의와는 달리 E. 파운드(1920년 영국을 떠나 1925년 이탈리아에 영구적으로 정착함)와 루이스는 극단적인 정치적 입장을 나타냈다. 두 사람은 민주주의를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시키면서 경제적·이념적 조작이 현대사회의 결정적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영미 모더니스트들의 이러한 반민주적 관점이 모더니즘 운동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던 반동적 성향들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또다른 견해에 의하면 그러한 관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야기된 비극적인 균형상실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므로 E. 파운드의 야심적이긴 하지만 엄청나게 난해한 심상서사시 〈칸토스 The Cantos〉(1917~70)와 루이스의 정치·신학 소설 〈인간의 시대 The Human Age〉의 문학적 공로에 대한 평가와 그 정치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  [postmodernism]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서양철학 사조.

철학사조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폭 넓은 회의주의·주관주의·상대주의적 특징을 보이며, 이성에 대한 총체적 의심이자 정치·경제적 권력을 유지·주장하는 데 필요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주로 근대 서양사의 철학적 가정과 가치 및 지적 세계관에 대한 하나의 반작용이다. 서양사에서의 근대 시기는 대략 16세기와 17세기의 과학혁명의 시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를 말한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과 특징적으로 관련된 대부분의 원리들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일반 철학적 관점에 대한 직접적 부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물론 그 관점들이 18세기에만 국한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점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적 실체가 있다. 자연적 실체의 존재와 속성들은 논리적으로 인간에 대해 독립적이다. 즉 인간의 마음과 사회, 인간의 사회적 관습, 인간의 연구 기술에 대해 독립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런 관점을 일종의 순진한 사실주의로 이해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따르면 거기에 있는 현실은 하나의 개념적 구성이고, 과학적 관습과 언어로 이루어진 가공물이다. 이 점은 또한 역사가들에 의한 과거 사건들에 대한 탐구에도 해당되고, 사회과학자들에 의한 사회적 제도·구조·관행들에 대한 서술과도 관련된다.

 

둘째, 과학자들과 역사가들의 서술적이고 설명적인 말들은 원칙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사실이거나 거짓일 수 있다. 객관적이고 자연적인 실체에 대한 부정에서부터 이어지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부정은 때로 진실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으로 표명된다.

셋째, 이성과 논리를 이용해서,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제공하는 좀 더 전문화된 도구들로, 인간들은 그들 스스로와 그들의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것이다. 미래 사회가 현재보다 좀 더 인간적이고,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문명화되고, 좀 더 번영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인간 진보 수단으로서의 과학과 기술에 대한 계몽주의적 신념을 부정한다. 사실,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에 대한 잘못된 추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대량 살상을 가능하게 해준 과학의 발달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 중 몇몇은 과학과 기술, 심지어 이성과 논리조차 태생적으로 파괴적이고 억압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20세기 동안에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을 파괴하고 억압하기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넷째, 이성과 논리는 보편적으로 유효하다. 즉 이성과 논리에 근거한 법칙들은 어떤 사상가와 지식의 어떤 영역에 대해서도 똑같이 공평하게 적용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게는 이성과 논리 역시 단지 개념적 구조물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성과 논리가 사용되는 특정한 지적 전통 안에서만 유효하다.

 

다섯째,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 즉 인간의 본성은 사회 속에서 배우거나 익히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 태어날 때에 인간 안에 존재하는 재능·자질·성향으로 구성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인간 심리의 거의 모든 면들은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여섯째, 언어는 언어 자체의 외부에 존재하는 실체를 나타내고 가리킨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따르면, 언어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계몽주의 관점에서 묘사한 '자연의 거울' 같은 것이 아니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연구에 영감을 받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언어 속에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반영된다고 주장했다. 한 단어의 의미는 세상 속에서 고정된 것도 아니고 심지어 마음 속의 생각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다른 단어들의 의미와의 대비와 차이의 범위일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미들은 다른 의미들과의 함수이다. 그리고 그 다른 의미들은 또 다른 의미들의 함수여서 이러한 상관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들은 그것을 말하거나 듣는 사람 사이에서 결코 완전하게 고정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 속에 말하는 주체가 반영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자연 언어만이 아니라, 좀 더 전문화된 특정 공동체의 담론이나 전통을 특징짓는다. 그런 담론들은 사회적 관행 안에 내재되고 담론들이 사용되는 공동체나 전통의 도덕적·지적 가치 및 개념적 구도를 반영한다. 언어와 담론의 포스트모던적 관점은 주로 해체론의 창시자이자 선도적 실천가이며 프랑스 철학자·문학이론가인 자크 데리다(1930~2004)로 인해 구체화되었다.

 

일곱째, 인간은 자연적 실체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 지식은 증거나 원리라는 기초 위에서 궁극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러한 증거나 원리는 즉각적으로나 직관적으로, 또는 다른 확실성으로 알려지거나 알려질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철학적 근본주의를 거부한다. 이 철학적 근본주의는 과학적 지식을 비롯한 경험적 지식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확실성의 근본을 확인하려는 시도이다. 이것은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격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여덟째, 최소한 원리적으로, 자연적·사회적 세계의 많은 양상들을 설명하는 일반 이론들을 주어진 지식의 영역 안에서 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변증법적 유물론과 같은 역사의 일반 이론이 그러한 예이다. 더 나아가 그런 이론들을 구축하는 것이 과학적이고 역사적인 탐구의 목표여야만 한다. 비록 그 이론들이 실제로는 완벽하게 도달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러한 개념을 계몽주의 담론 안에서의 하나의 망상이나 건강하지 못한 경향성의 징후로 치부한다. 이러한 계몽주의 담론을 프랑스 철학자 엠마누엘 레비나스는 사고의 '전체화' 시스템이라 불렀고, 프랑스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인간 생물학과 역사학, 사회적 발달의 '거대담론'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론들은 거짓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담론이나 전망들에 효과적으로 준거를 부여하기 때문에 유해하다. 이렇게 준거를 부여함으로써 이 이론들은 다른 전망이나 담론들을 억압하거나 소외시키고 침묵시킨다. 데리다 자신은 전체성에 대한 이 이론적 경향성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했다.

 

앞에서 지적되었듯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많은 특징적 주장들은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혹은 윤리적 상대주의의 어떤 형태를 구성하거나 함축한다.

 

하지만 몇몇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그 상대주의자라는 꼬리표를 강하게 거부한다는 것을 유념해야만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현실의 객관적 측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한다. 현실에서 객관적으로 옳거나 그른 말들이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그러한 말들, 즉 객관적인 지식에 대한 말들이 가능하다는 것도 부정한다. 인간이 확실하게 어떤 것들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부정한다. 그리고 객관적 혹은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가 있다는 것도 부정한다. 실체와 지식, 그리고 가치는 담론에 의해 형성된다. 따라서 그것들은 그 담론들과 더불어 변할 수 있다. 이것은 현대 과학의 담론이 그것의 내재적 기준들과 별도로 고려될 때에는 점성술이나 마법을 포함한 다른 대안적 전망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때로 이성과 논리의 사용을 포함한 과학의 증거 기준을 '계몽적 합리성'으로 특징짓는다.

이렇듯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폭 넓은 상대주의는 다양한 종류의 담론의 본질 및 기능과 관련하여 사유의 방법을 안내한다. 만약 실체와 지식 및 가치들이 담론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의 주장이 옳다면, 계몽주의 담론이 다른 대안적 담론보다 더 필연적이거나 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계몽적 담론이 어떻게 처음에 정립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일으킨다.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에 도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하나의 담론을 평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기존의 정립된 담론이 어떻게 현대에 널리 퍼진 세계관의 일부가 될 수 있었을까? 다른 것들은 그렇지 못한 반면에, 왜 이런 담론은 받아들여졌거나 발달되었을까?

 

포스트모던적 대답의 일부는, 폭 넓게 말해서 어떤 사회에서 널리 퍼진 담론은 지배 집단이나 엘리트 집단의 이익과 가치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이러한 연결에는 동의하지만, 그 성격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각 시대의 지배 이념은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의 사상이 되어왔다."는 독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의 격언을 외견상 지지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좀 더 신중한 입장을 취한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역사적 연구에 영감을 받은 몇몇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마르크스의 입장과는 미묘하게 차이가 있는 관점을 옹호한다. 그 관점은 특정한 시대에 지식으로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복잡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권력에 대한 고려에 의해 영향받는다.

 

하지만 마르크스보다도 더 멀리 나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 이론가인 뤼스 이리가레는, 고체역학이 유체역학보다 발달한 이유는 물리학에 있어 남성 지배적 제도가 유동성과 고형성을 남성과 여성의 성 기관과 각각 연결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해왔다. 계몽주의의 기존 담론은 다소간 자의적이고 공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권력자들의 이익과 가치를 다소간 반영했기 때문에 변화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은 그들의 이론적 위치를 독특한 방식으로 포괄적이고 민주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몽주의적 담론의 부당한 헤게모니를 인식할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계몽주의적 담론은 똑같이 정당한 근거를 갖추었음에도 비엘리트 집단의 관점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헤게모니를 행사해왔다. 1980, 90년대에 다양한 문화적·인종적·종교적 집단들의 편에 선 학문적 옹호자들은 현대 서양사회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을 포용했다.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체성 정치학'이라는 새로운 운동의 비공식적 철학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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