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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웬의 "죄 죽이기"

 

 

먼저 회심을 하고… 영으로써 죄를 죽여야 한다 그때 우리가 산다.

 

그리스도인으로 죄 문제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죄는 영적 생활을 위한 가장 소중한 문제이면서도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자신만만해 할 사람이 없다는 특징이 있다. 성경이 말한 죄 문제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죄에 대하여 우리가 죽었다는 것이고(갈 2:20; 롬 6:2; 골 3:3), 다른 하나는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갈 5:24; 골 3:5). '죽었다'와 '죽이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죽이기보다 회심이 먼저다

 

존 오웬(1616∼1683)을 통해 받는 은혜가 이것이다. 물론 오웬이 이것만 말한 것은 아니다. 오웬은 1660년 찰스 2세의 왕정복고 시대에 목회자들이 설교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거주의 한계를 5마일 이내로 제한받으며, 반 국교 운동을 반대하면 체포되거나 감옥에 투옥되는 상황에서 성경에 입각, 올바른 교회를 사수한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성공회 사제였다. 그러나 성공회 예배의 의식주의와 신학적 자유주의 때문에 그는 칼뱅주의로 돌아섰다. 그의 대표작인 '죄 죽이기'(Mortification of Sin)에서 오웬은 죄 죽임에 대한 성경적 원론과 구체적인 방법들을 소개한다.

 

죄 죽이기를 위한 가장 대표적인 성경 구절은 롬 8:13절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나 이 말씀이 위치한 자리를 먼저 보아야 한다. 이 말씀은 구원 받은 성도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을 다루는 부분에서 나타난다. 이미 바울은 롬 3-4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칭의)에 대하여 언급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사건은 이 말씀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회심하지 않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거듭나지 않은 자의 당면 과제는 죄 죽이기가 아니다. 그는 아직까지는 그 일로 부름 받지 않았다." 오웬의 말이다. "회심하지 않고 죄를 죽이려는 것은 마치 기초는 생각지 않고 건물만 세우려는 사람과 같다.

 

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은 마땅한 일이지만 적절한 순서가 있다. 죄 죽이기에 앞서 회심이 선행되어야 한다." 오웬이 말한 회심의 기초는 분명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다"(갈2:20)는 선언일 것이다. 그때의 죽음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이나 도덕적 죽음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죽을 때 은혜로 우리가 함께 죽는 은혜의 죽음 곧 법적, 신분적 죽음이다. 그 죽음은 선제적이고 선언적이고 그리고 고백적이다. 그 죽음은 우리를 예수님 안에 새로 태어나는 위치적(신분적) 죽음이다. 이 죽음은 이미 롬3∼4장(특히 3:21∼26)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 우리는 롬5장(하나님과 평화), 6장(그리스도와 연합), 7장(율법으로부터의 자유), 8장(성령의 내주와 최후 승리)의 연속적 축복을 받았다. 롬8:13의 죄 죽이기를 말할 사람은 먼저 이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회심'이다. '죄 죽이기'는 '회심' 이후에 일어난 신자의 과제다.

 

내 약점이 무엇인가 보라

 

롬8:13은 죄 죽이기에 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몸'은 육신에 속한 본성의 타락과 부패를 말한다. '몸의 행실'은 밖으로 나타난 '육체의 일'(갈 5:19) 곧 부패한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거하는 죄가 있다. 죄는 우리 속에 거할 뿐만 아니라(롬 7:20) 우리를 사로잡는다(롬7:23). 만일 우리가 그 죄를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비참한 죄의 패잔병들이 될 것이다(롬 7:24). 따라서 죄 죽이기는 우리의 신성한 의무다. 죄를 죽여야 할 당사자는 다른 사람이 아닌 '너희'(우리)다. 그러나 우리 힘으로만 되지 않는다. '영으로써' 죽여야 한다.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인 죄를 죽이면 그때 우리는 '산다'

 

그러면 어떻게 죄를 죽이는가. 먼저 내가 무엇에 약한지 알아야 한다. '내 속에 있는 죄'라고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죄를 죽일 수 없다. 평소에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약점이 무엇인지 살펴야 한다. 죄의 본성은 같지만 마귀의 공격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삼손은 이성문제로, 가롯 유다는 물질문제, 데마는 세상욕심으로 유혹받았다. 나를 주로 넘어지게 하는 죄의 실체를 알아야 방어도, 공격도 할 수 있다. 조용히 눈을 감고 한 시간만 묵상하면 누구나 자신의 약점을 알 수 있다. 수도자 에바그리우스(399년 사망)가 말한 인간의 여덟 가지 본성이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탐식, 음욕, 물질욕, 불만감, 분노, 절망감, 허영심 그리고 교만이다. 언젠가 필자가 이 문제로 기도할 때 내 안에 뜻밖의 죄악이 있음을 알았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와 자기 의로움의 교만이다. 내 안에는 남보다 의롭다는 성자형 교만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승리가 또 다른 승리를 낳는다

 

죄를 죽이는 두 번째 방식은 반드시 한 번에 하나씩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웬이 보여주는 지혜가 이것이다. '하나의 승리가 또 다른 승리를 낳는다.' 죄 죽이기를 시도한 사람이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성급해서이다. 모든 죄를 한 번에 일망타진하려는 시도는 역사상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 번에 하나의 죄만 상대하라. 한꺼번에 모든 죄를 상대하지 말라. 한꺼번에 모든 죄를 상대하면 한꺼번에 모든 죄가 달려든다. 이 때가 죄와의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한 가지 죄를 이기기도 하지만 또 다른 죄에서 지기도 한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이때 기억할 것은 영적 승리에 즉효약이 없다는 것과 야곱의 사다리는 한 계단씩 오른다는 것이다. 영성의 새벽도 천천히 밝아온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래서 세 번째가 중요하다. 혹시 죄와의 싸움에서 실패했다면 실패한 나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 것이다. 모든 영적 전투자는 롬 7:25을 목숨처럼 가슴에 새겨야 한다. 사도 바울은 롬7장에서 자기 안에 있는 죄로 인해 비참하게 사는 자신을 실토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 이쯤 되었으면 바울은 영적 싸움을 포기했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그는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선언했다. 중요한 것은 '그러나'이다. 이 선언 이후 바울은 롬 8장으로 나아갔다. 롬 8장의 최후 승리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모든 영적 싸움에 항상 승리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소리 높여 선포할 말씀이 있다. 롬 7:25이다.

 

죄 이기기에 승리하고 그리스도를 떠나는 것보다 죄 이기기에 실패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낫다(눅 18:9-14). 진정한 승리는 내가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승리하는 것이다. 내 승리에 대한 지나친 자기만족을 경계할 뿐 아니라 내 실패에 대한 지나친 자기연민도 경계해야 한다. 한 번의 승리가 나를 천사로 만들지 않는 것처럼 한 번의 실패가 나를 영원한 패배자로도 만들지 않는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은혜에 의존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롬 6:12-14) 죄 죽이기의 열쇠이다. 당신은 지금 그 싸움의 한복판에 있다.

 

이윤재<한신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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