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전래는 생각보다 오래 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다만 현재같은 개신교의 전래는 조선시대 후기로 봅니다.
어떤 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중국에서 경교(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창한 그리스도교 일파의 중국 명칭)가 전래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의 신장과 관음상 나한상 제석천상 등에서 페르시아의 경교적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에서 그리스도교의 전파는 1549년으로, 예수회 소속 프란시스코 쟈비엘이 가고시마에 들어와 포교한 것으로 시작되었고, 총포술등의 서양 군사 무기 도입을 목적으로 한 오다노부나가의 공인으로 그리스도교가 활발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때 일본군 진영에 포르투칼의 선교사가 끼어서 종군활동을 했으며,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세례명 아우구스티노)는 카톨릭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1613년 토쿠가와이에야스가 금교령으로 탄압을 받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그리스도교는 지속적인 탄압과 천황제부활과 신사참배를 중시하는 메이지유신등의 여파로 오늘날 현재 1%정도로 매우 낮은 그리스도교 신자비율을 보이고 있습니다.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교의 신교(新敎)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1627년 화란인(和蘭人) 박연(朴燕:Jan Janse Weltevres)일행 3인이 표류하여 영주한 사실을 그 효시로 보기도 합니다. 이후, 26년을 지나 효종(孝宗) 4년(1653년)에 우리나라에 표류하다 떠밀려온 화란 상인 하멜 헨드릭(Hamel Hendrik)일행 36인도 신교(新敎) 신자였습니다.
순조(純祖) 16년(1816년) 우리나라 서해안 해도(海圖) 작성의 임무를 띠고 내항하였던 영국군함 알세스트(Alcest)호의 함장 뮤레이 맥스웰대령과 리라(Lyra)호의 함장 베실 홀(Besil Hall)대령은 비인만(庇仁灣) 마량진(馬梁鎭) 앞 갈곶하(葛串下)에 정박하였을 때 문정(問情)을 위하여 배에 올랐을 때 마량진 첨사(僉使) 조대복(趙大福) 노관(老官)에게 성서를 증여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성서 전래가 처음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선교사로는 중국 선교의 개척자요, 최초의 일본 성서 요한복음을 번역한 것으로 유명한 갑리(甲利:Carl A. F. Gutzlaff)목사입니다. 그는 1832년 영국 동인도회사 용선(傭船)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우리나라 서해안을 포함하는 2차 중국 전도여행의 길을 떠나 조선의 장산곶(長山串)과 군산(群山)에 이르러 약 한 달간 섬 주민에게 한문성서와 교리서를 나누어 주며 전도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갑리목사가 다녀간 지 33년 후에 영국 웰스 출신의 런던 선교회 파견 중국 선교사 토마스 목사가 우리나라에 왔습니다. 1865년과 1866년에 걸쳐서 백령도와 대동강 연안을 배회하면서 다량의 한문성서와 전도문을 전하다가 1866년 9월 평양 대동강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것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으로 대동강에서 통상을 요구하면서 중군(中軍) 이현익을 납치하고 강변에 있던 군민을 사살하는 등의 행위로 평양감사 박규수가 9월 1일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고 토머스 목사를 타살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조선인민의 첫 번째 반미투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 뒤에 1883년에는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馬勤泰)선교사와 존 로스(John Ross, 羅約翰)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전도를 위하여 이응찬(李應贊), 서상륜(徐相崙) 등의 도움을 받아 만주에서 신약성경을 한글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 최초로 1884년 소래교회(松川敎會)가 황해도 장연에서 세워집니다. 이것은 선교사상 유래가 없는 자발적으로 복음의 수용 토착화한 것입니다. 선교사 입국 이전에 한국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소래교회를 세운 장본인은 서상륜이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본래 만주와 조선을 오가며 인삼장수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30세 되던 1878년에 갑작스럽게 열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합니다. 그를 현지 선교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는데, 그곳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바로 로스 선교사(John Ross)입니다. 또 그곳에서 매킨타이어 선교사(John MacIntyre)의 끈질긴 전도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후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고 성경 10여권만을 지닌 채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돌아가서 초라한 초가집에 20여명의 신자가 모여 예배를 본 것이 소래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쯤 일본에서는 루미스목사가 이수정(李樹廷)의 협조를 얻어 성서를 간행하여 조선선교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1884년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의 매클레이(R.Maclay)목사가 서울에 와서 의료선교(醫療宣敎)가능성을 타진하였고, 같은 해 9월 20일에는 미국 북장로회의 의료선교사 알렌(H.N.Allen, 安連)이 그 전 해에 개설된 주한미국공사관의 공의(公醫) 자격으로 입국하였습니다.
1885년에는 복음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여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언더우드선교사와 미국 북감리교 아펜젤러선교사, 스크랜튼선교사 등이 서울에 와서 소규모의 병원을 경영하면서 선교를 하였습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선교사는 서울에 학당(學堂)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서 현대식 교육을 시작하였고 1886년에는 스크랜튼부인이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세우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를 창설한 것을 비록하여, 숭실학당(崇實學堂), 연희전문(延禧專門)등 신교육기관이 이들의 손으로 세워져 우리나라 개화(開花)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한편 1886년 언더우드목사가 의주인(義州人)을 중심으로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를 세웠고 그 이듬해인 1887년에는 아펜젤러목사가 감리교 정동교회(貞洞敎會)를 창립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개신교의 본격적인 전래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도착한 1885년을 기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자생적인 소래교회는 1884년에 설립되었고, 그전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왔던 흔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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