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 5월 21일 ~ 65년 4월 12일)는 로마 제국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가로,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
아버지와 이름이 같아, 소(小) 세네카라고 불리기도 한다.
유명한 수사학 교사인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아들로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큰어머니를 따라 로마로 이사해 그곳에서 자랐다.
로마에서 세네카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정치가가 되기 위해 웅변술과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정작 정계에 입문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심한 천식에 걸려, 이후 6년 동안 당시 이집트 총독이었던 이모부의 신세를 지게 됐다.
31년, 세네카는 다시 로마로 돌아와 재무관에 임명됐다.
세네카는 뛰어난 웅변술로 당시 황제였던 칼리굴라의 눈에 띄는 존재가 됐지만, 그것은 역시 뛰어난 웅변가였던 칼리굴라의 시기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리굴라는 세네카를 처형하지 않았는데, 폐병이 걸렸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변호 때문이었다.
서기 49년, 아그리피나는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는 25세 연상인데다 숙부이기도 한 클라우디우스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클라우디우스와 결혼한 것은, 친아들 도미티우스를 로마의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황후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 아그리피나는, 아들 도미티우스의 '제왕 교육' 을 담당할 철학자를 찾기 시작한다.
그녀가 점찍은 인물은, 황족과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코르시카로 추방당한 인물이었다.
오늘은, 훗날 네로라는 이름으로 황제가 된 도미티우스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철학자였던 세네카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로마의 3대 황제 칼리굴라.
재위 초기에는 티베리우스의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켜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과 원로원 의원들에게 환영받는 정책을 펼쳤지만,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고열이 나 쓰러져 심하게 병을 앓은 뒤에
검투사 시합을 더 과격한 내용으로 바꾸는 한편 화려한 만찬을 즐기는 등 재정 파탄을 불러들여
민심을 잃게 됐고,
자신과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시키는 등 비정상적인 통치를 거듭한 끝에 살해당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뛰어난 웅변가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덧붙여, 세네카는 몸이 유난히 약해 평생 건강에 유의하고 채식생활을 했다고 한다.
맨 위의 동상에서, 세네카의 몸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41년, 칼리굴라가 암살당하고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즉위했다.
클라우디우스는 세네카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이번에 세네카를 눈여겨본 인물은 황후 메살리나였다.
세네카가 클라우디우스의 여동생을 중심으로 하는 반 메살리나파에 속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해, 세네카는 황족과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아, 코르시카로 추방당했다.
하지만 코르시카에 머무는 동안 세네카는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고,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해 몇 편의 글을 쓰기도 했다.
아들 브리타니쿠스를 안고 있는 메살리나.
측근과 함께 남편 클라우디우스를 선동해 반대파 원로원 의원을 처형하게 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폈다.
한편 성욕이 지나쳐, 밤에 몰래 매음굴에서 몸을 팔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집정관 가이우스 실리우스와 사랑에 빠져
클라우디우스가 없는 틈을 타 궁궐 내에서 결혼식을 올리기까지 했다.
이 일로 로마인들의 거센 항의가 일어나자 클라우디우스는 실리우스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메살리나의 간청으로 처벌이 지연되자 클라우디우스의 측근인 나르키소스가 메살리나를 살해했다.
8년 뒤인 49년, 클라우디우스의 황후는 아그리피나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아그리피나의 본심은 클라우디우스의 뒤를 이어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에 앉히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 세네카를 불러들여 네로의 교육을 맡겼다.
한편 아그리피나는 네로의 무술 선생이자 근위대장으로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라는 인물을 임명했는데, 부루스는 후에 세네카의 정치적 동료로서 활약하게 된다.
54년,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리피나의 손에 의해 암살됐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네로가 황제로 즉위했다.
아그리피나.
클라우디우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은 메살리나와 같지만,
메살리나가 허영심과 성욕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그리피나는 네로를 위한 책략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자리에 오른 네로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해서, 세네카가 섭정을 맡게 됐다.
세네카는 네로의 취임 연설을 쓰고 군사권을 장악하는 한편 재정과 법률개혁을 단행하는 등 네로의 치세 초기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하게 되는데, 그 배경은 네로의 근위대장이자 세네카와 의견을 같이하는 부루스의 지지였다.
하지만 8년 뒤인 62년, 세네카는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됐다.
부루스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의 견제를 받다 못한 세네카는 네로에게 은퇴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고, 네로는 세네카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로마의 5대 황제 네로.
네로라고 하면 폭군으로서의 이미지만을 떠올리지만,
파르티아와의 관계를 안정시키고 대화재로 불탄 로마를 복구하는 데 앞장서 쾌적하고 아름답게 재건하는 등
적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덧붙여 위의 두가지 업적은, 세네카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이룬 것이다.
일개 철학자로 돌아간 세네카는, 이후 철학을 공부하며 몇 권의 철학 서적을 썼다.
65년, 네로에게 반대하는 최초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네로를 암살하고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라는 인물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음모를 꾸민 사람들의 노예가 네로에게 반란을 고발, 네로는 위험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음모를 꾸민 사람들 가운데, 루키우스 세네카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다.
피소의 음모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로와 세네카.
세네카가 네로에게 '제왕 교육' 을 하는 도중일까.
세네카가 피소 음모에 가담했다고 진술한 음모 가담자는 한 사람뿐이었고,
그 역시 세네카에게 피소의 말을 전했을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때 세네카가 다음과 같이 돌려준 말이 문제가 된다.
'은퇴하여 일개 철학자로 돌아온 내가 무사히 여생을 보낼 수 있을지 어떨지는,
피소의 운명에 따라 결정될 것이 분명하오.'
네로는, 과거의 스승에게 자결을 명한다.
같은 해인 65년 4월 12일, 세네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70세였다.
세네카는 인간이 인간다운 이유가 올바른 이성과 도덕을 목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윤리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하지만 본인은 대농장을 보유하고 고리대금업에도 손을 대는 등 세속적인 생활을 해, 비판을 많이 받기도 했다.
세네카의 저서로는 아들을 일찍 잃은 어머니를 위로하는 <마르키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이나 코르시카 유배 시절에 어머니에게 쓴 <헬비아에게 보내는 위로문> 등의 편지가 있고, 스토아 철학에 대한 내용을 담은 <도덕서한>을 비롯해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마음의 안정에 대하여>, <노여움에 대하여>,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등 많은 철학 서적을 썼다.
한편 세네카는 그리스 비극을 본딴 것이지만 <헤라클레스>,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등 아홉 편의 비극을 쓰기도 했는데, 삽입되는 노래의 음조가 단조롭다는 것이나 배우들이 소리를 지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 등장인물의 성격 표현이 빈약하다는 것 등을 이유로 상연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극본을 읽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연극들은 르네상스 시대에 알려진 고전 비극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로,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후대의 극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고 했지만,
역시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다.
철학자 세네카는 청렴결백과 정직, 도덕을 강조했으면서도
인간 세네카는 대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금업에 손을 대는 등 부를 추구한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세네카 외에 이런 모순을 보인 철학자는,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아이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맡겨버린 장 자크 루소 뿐이다.
그렇다면 세네카의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세네카는 개인으로서의 세네카와 철학자로서의 세네카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같은 스토아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도, 황제의 책무를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철학 서적인 명상록에서는 주어진 운명을 감수하며 자연의 본성에 알맞게 살면서 그저 죽음만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마키아벨리 역시 군주론에서
개개인의 도덕과 군주의 도덕은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네카 역시, 그런 부류의 인물이 아닐까...?
스토아 철학자의 대표이면서, 자신의 철학과 맞지 않는 삶을 살았던 세네카.
그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루키우스 또는 마르쿠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54년경~기원후 39년)는 고대 로마의 작가이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아버지로 대 세네카라고 불린다.
세네카는 부유한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다.
아버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Seneca the Elder)는 로마에서 수사학교사로 유명했다.
어머니 헬비아는 훌륭한 성격과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형 갈리오는 52년 아카이아에서 성 바울로와 만난 적이 있었다.
남동생은 시인 루칸의 아버지였다.
세네카는 어릴 때 큰어머니를 따라 로마에 갔다.
그곳에서 연설가 훈련을 받았으며
스토아주의와 금욕주의적 신피타고라스주의를 혼합한 섹스티의 학교에서 철학을 공부
세네카는 병에 걸렸으며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그곳에 있는 그의 큰어머니는 사령관 가이우스 갈레리우스의 아내였다.
31년경 로마로 돌아와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곧 황제 칼리굴라와 충돌했다. 황제는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변론 때문에 그만두었다.
41년에 황제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조카딸 율리아 리빌라 공주와 간통했다는 혐의로
세네카를 코르시카로 추방했다.
부적합한 환경에서 그는 자연과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위로문 Consolationes〉라는 제목으로 3편의 짧은 글을 썼다.
황제의 부인 아그리피나의 영향력 덕분에 49년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50년에 집정관이 되었고 돈많은 여자 폼페이아 파울리나와 결혼했으며,
신임 근위대장인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 등
강력한 친구 집단을 만들었고 훗날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이 되었다.
54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암살되자 세네카와 부루스는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들의 친구들은 게르만과 파르티아 국경 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권을 장악했다.
네로는 세네카가 초안을 쓴 첫 대중연설에서 원로원에 자유를 주고
자유민과 여성의 영향력을 끝장내겠다고 약속했다.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자기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그밖에도 강력한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네카와 부루스는 비록 스페인과 갈리아 지방 출신이었지만
로마 세계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재정·법률의 개혁을 단행했고 노예에 대한 좀더 인간적인 태도를 장려했다.
그들이 임명한 코르불로가 파르티아군을 이겼다.
영국에서는 부디카의 반란이 진압되자 좀더 계몽된 통치가 뒤따랐다.
그러나 역사가 타키투스(56경~117)가 말했듯이,
"인간사에서 뒷받침할 자기 힘이 없는 권력보다 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것은 없다."
세네카와 부루스는 폭군이 총애한 인물들이었다.
59년에 그들은 아그리피나의 살해를 묵과하거나 꾸미지 않을 수 없었다.
62년에 부루스가 죽자 세네카는 권력을 더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은퇴를 허락받고 남은 해 동안 매우 뛰어난 철학책 몇 권을 썼다.
65년에 세네카의 적들은 그가 피소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자살을 명령받고 꿋꿋하고 침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세네카의 최후
세네카(B.C.4-A.D.65)는 태연자약하게 유언 서판을 요구했다. 백인대장이 이것을 거절하자, 세네카는 친구들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맹세했다. "방금 나는 여러분의 친절한 마음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을 금지당했소. 그래서 단 하나 남아 있는 것, 그러나 가장 고상한 소유물을 유증하고 싶소.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모습이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기억 속에 간직해 둔다면 충실한 우정의 보수로 덕이 높다는 명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오." 그러고는 그는 친구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어느 때는 소탈하고 스스럼없는 대화조로, 어느 때는 엄격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며 친구들의 기력을 북돋아 주었다.
"여러분은 철학의 가르침을 잊었소? 뜻밖의 재난에 대비해 그토록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저 결의는 어디로 가버렸소? 네로(37-68)의 잔인한 성격을 몰랐단 말이오? 어머니를 죽이고 동생을 살해했으면 스승을 죽이는 것 외에 무엇이 남아 있겠소?"
그는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마치 일반 청중을 상대하고 있는 듯이 강의했다. 그러고는 아내를 껴안고서 그때의 의연한 그의 마음에 어울리지 않는, 약간 부드러워진 태도로 이렇게 아내를 타이르며 격려했다. "슬픔을 애써 가라앉히시오. 평생 그것이 짐이 되지 않도록. 오히려 남편의 훌륭한 생애를 조용히 떠올리며 거기에서 위안을 받도록 하시오. 그리고 남편과의 사별을 견뎌 내도록 하시오."
그러나 파울리나는 이 말에 대해 "저도 함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어요" 하고 단호한 태도로 주장하고, 혈관을 자르는 집도의의 도움을 청했다. 세네카는 아내의 늠름한 각오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혼자 남겨 두어 위험한 일을 겪게 하기에는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 컸다. "아까는 인생을 위안하는 방법을 당신에게 가르쳐 준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사는 것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소. 훌륭한 본보기를 제시하려는 당신의 결심에 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소. 만약 두 사람 모두 똑같이 냉정한 태도로 이렇게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면, 당신의 최후가 한층 더 아름답게 빛나 보일 것이오."
그 후 두 사람은 동시에 작은 칼로 팔의 혈관을 절개하고 피를 흘렸다. 세네카는 상당히 나이를 먹은데다가 절식으로 인해 바싹 말라 피가 너무 천천히 흘러 나왔다. 그래서 더 나아가 발목과 무릎의 혈관도 절개했다. 격렬한 고통에 점차 기진맥진해져 갔다. 세네카는 자신이 고통스럽고 괴롭자 아내의 의지가 꺾이지 않을까 우려되는 한편, 자신도 아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금세라도 자제력을 잃을 것 같아 아내를 설득해 다른 방으로 물러가게 했다. 마지막 순간에 임해서도 말하고 싶은 사상이 계속 용솟음쳐 올라왔다. 그래서 세네카는 사자생(寫子生)들을 부른 뒤 그 대부분을 구술했다. 이것들은 그 자신의 말 그대로 출판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여기에서 요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네로는 파울리나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원한을 조금도 품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황제의 잔혹성을 저주하는 목소리가 널리 퍼지지 않을까 두려워 그녀의 자살을 막으라고 <명했다.> 파견된 병사들은 그녀의 노예나 해방 노예들을 재촉해 그녀의 팔을 묶어 피를 멈추게 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 때 의식을 잃어버려 아무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악의적인 설을 언제나 받아들이고 싶어한다. 그녀와 관련해서도 다음과 같은 소문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파울리나는 네로가 집념이 강한 자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의심할 때에는, 남편과 함께 하는 명예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윽고 조금이라도 밝은 전망이 보이자 삶의 매력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 후 몇 년 동안 생존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의 추억에 대한 정결은 칭송할 만했다. 그녀의 얼굴이나 손발은 자못 많은 생명력을 잃은 것을 증명하듯이 창백했다.
한편 세네카는 죽음이 좀처럼 찾아오지 않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알게 되자 오랫동안 충실한 우정과 의술 솜씨를 신뢰하고 있던 안나이우스 스타티우스(Annaeus Statius)에게 전에 부탁해 놓았던 독약을 달라고 요청했다. 그것은 아테네인(소크라테스)이 국가의 재판에서 죄를 선고받은 사람을 처형할 때 사용하던 독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져온 독을 마셨지만 효과가 없었다. 이미 독도 듣지 않을 정도로 손발이 몹시 차가워지고 온몸의 감각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목욕탕의 열탕 속으로 들어간 뒤 주위의 노예들에게 물을 끼얹게 하면서 "이것은 내가 해방자 유피테르에게 바치는 헌주이다."라고 말했다. 이어서 한증실로 옮겨지고 그 열기에 의해 숨이 끊어졌다. 그의 유체는 장례식도 행해지지 않은 채 화장되었다. 유언의 부속서에서 그렇게 하라고 미리 지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세네카는 부와 권력이 전성기에 있을 때 이미 자신의 최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네카의 죽음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루카 조르다노가 그린 세네카의 최후.
세네카는 혈관을 잘라 과다출혈을 일으키는 방법으로 자결했는데,
피가 잘 나오지 않아 뜨거운 물을 담은 욕조에 들어가서야 숨을 거둘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최후를 맞이하면서도, 네로를 원망하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위의 그림은 욕조에 들어가기 직전의 세네카를 그린 것일까.
세네카( Lucius Annaeus Seneca ) : 이탈리아 고대 로마제정기의 스토아 철학자. 네로의 과욕(過慾)에 위태로움을 느낀 나머지 62년 네로에게 간청하여 관직에서 은퇴하였으나, 65년 네로에게 역모(逆謀)를 의심받자 스스로 혈관을 끊고 자살하였다. 스토아주의를 역설했다. 주요 작품으로 [노여움에 대하여] [자연학 문제점] 등이 있다.
그가 한 말중에 유명한 말은 불은 쇠를 시험하고 역경은 강자를 시험한다는 말이다.
1.앞질러 가는 사람이 자꾸 눈에 뜨일 때는
뒤에 오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신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으면
당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앞질러 왔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타인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당신 자신이 과거의 당신을 앞질러 온 것입니다
2.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냉철한 이성으로써
과곳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이다.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실 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느끼기도 하고 가볍게 여기기도 할 따름이다.
운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약한 것이다.
자신이 약하면 운명은 그만큼 강해진다.
연약한 사람은 언제나 운명이란 바퀴에 깔리고 마는 것이다.
3.어떤 사람은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서 자기와 자기 몸을 학대한다.
어떤 자는 아직 보지도 못한 죄가 두려워서 자기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다.
어느 쪽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관계가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4.어떻게 사는가를 배우는 데는 자신의 전 생활을 필요로 한다.
5.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문제이다.
6.용기는 별로 인도하고, 두려움은 죽음으로 인도한다.
7.우리는 어떠한 지배자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정신의 지배하에 있다. 자기 힘으로하라!
8.우리는 짧은 인생을 부여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짧게 만들고 있다.
9.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배운다.
10.우리는 혼자 있을 때라도 남 앞에 있는 것 같이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은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에 남의 눈이 비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도록 사색하여야 한다.
11.우리들은 상처보다 더 자주 오싹하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그 이유는 우리들의 고뇌란 것이 현실보다도 공상이나 환상에서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12.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은, 그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
13.운명은 우리에게서 부귀를 빼앗을 수 있다.
그러나 용기를 빼앗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운
명은 부자는 싫어하지만, 용기있는 사람은 좋아하기 때문이다.
운명을 자기편이 되게 하는 용기있는 사람이 되자.
14.운명의 장난은 재물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마음의 용기까지는 빼앗아가지 못한다.
15.웅장한 도서관은 오히려 독자를 혼동하게 만든다.
아무거나 읽기보다는 소수의 저자로 한정하는 편이 낫다.
16.위대한 것을 멸시하고,
과도함보다는 중용을 택하는 것이 군자의 특징이다.
17.은혜를 베푸는 자는 그것을 감추고,
은혜를 입은 자는 그것을 밝혀라.
18.이성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별 것 아니다.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따라 사는 것이다.
19.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20.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21.인생보다 더 어려운 예술은 없다.
다른 예술이나 학문은 가는 곳마다 스승이 있다.
22.인생에서 가장 쓸데없는 것이 탄식이다.
무엇을 얻을까 눈을 두리번거리기 전에 먼저 탄식을 버려라.
23.인생은 꼬리같은 것이다.
얼마나 기냐가 아니라, 어떻게 좋으냐가 중요한 것이다.
24.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값어치이다.
25.자기가 진 신세를 부인하는 사람은 배은망덕하고,
그 신세를 감추는 사람도 배은망덕하며,
그 신세를 잊어버린 사람은 더욱 배은망덕하다.
26.자기 자신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가장 강하다.
26.자연계에서 멀어져 가는 일없이 자연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법칙과 본보기에 따라
우리의 행동 방침을 정해 나간다면 우리는 참된 지혜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
27.자연은 우리들을 동일한 질료,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 각자를 연관 맺도록 창조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해야 한다.
28.자유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환경에도 어떠한 속박에도
어떠한 기회에도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29.정신적 활동이 없는 한가함은
일종의 죽음이며 인간의 산채로의 매장이다.
30. 죽음이 어디서 너를 기다릴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니 어디에서나 그것을 예상하라.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 공포가 있는 곳에는 행복이 없다.
참으로 위대한 일은 언제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해 가는 법이다.
쾌락이란 것은 우리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그 순간에 이미 사라지는 것이다.
타인에게 비밀을 지키게 하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지켜야 한다. -세네카
평생을 외국여행으로 보내는 사람들은 비록 많은 환대의 자리를 얻을 수는 있겠지만
참되고 두터운 우정의 자리는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세네카
해로운 것은 숨겨진 분노이다. -세네카
혼자 있을 때라도 늘 남 앞에 있는 것처럼 생활하자.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이 남의 눈에 비치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도록
사색하고 행동하자. 진실의 힘은 오래 지속된다.
진실은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 중 최고의 것이다.
진실은 진실한 행위를 통해서만 남에게 전달된다. 진실은 인생의 극치이다.
화가는 그림을 완성시켰을 때보다도 정신없이 그림에 몰두할 때에 더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흉작이 든 후에도 씨는 뿌려야 한다. -
너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너보다 강하거나 약했다. 그가 너보다 약했으면 그를 용서하고,
그가 너보다 강했으면 너 자신을 용서하라. -
노동은 인간의 보배다. 노동은 기쁨의 아버지다. 노동은 행복의 법칙이다. 노동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노동은 신체를 굳세게 하고, 가난은 정신을 굳세게 한다.
자기 자식에게 육체적 노동의 고귀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약탈 강도의 준비를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노동은 우리로 하여금 권태, 악덕, 욕심에서 멀어지게 한다. -세네카
뇌물로 얻은 충성은 뇌물로 정복된다. -세네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큰 선물을 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거기서 발산되는 것을 보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며
내 영혼의 가장 비밀한 곳조차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숨기고 감추려 드는가? 아무리 감추려 든다 하더라도 신을 속일 수는 없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때로는 살아있는 것조차도 용기가 될 때가 있다. -세네카
마음만을 즐겁게 하는 평범한 책들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따라서 의심할 바 없이 정신을 살찌우게 하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 -세네카
만약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소유물을 늘리지 말고, 욕망의 양을 줄여주는 것이다. -세네카
만일 분노가 연민의 마음으로써 억제되지 못한다면 전세계는 결국 멸망하고 말 것이다. -세네카
많은 재산은 훌륭한 노예이다. -세네카
부자가 되는 가장 가까운 길은 부를 경영하는데 있다. -세네카
분노를 떨쳐버리려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세네카
분노에서 자기 자신을 억제하려면 사람이 화내고 있는 모습을 냉정하게 관찰하면 된다. -세네카
불은 황금을 시험하고, 역경은 강한 사람을 시험한다. -세네카
비록 산의 정상에 이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도전은 얼마나 대견한 일인가.
중도에서 넘어진다 해도 성실히 노력하는 사람들을 존경하자.
자신에게 내재한 힘을 최대한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
큰 목표를 설정해 놓고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은 인생의 진정한 승리자인 것이다. - L.A. 세네카
빈곤은 부정한 짓을 가르친다. -세네카
빈곤이란 작은 물건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물건이 부족한 것이다. -세네카
사람은 대개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운명이란 외부에서 오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의 약한 마음, 게으른 마음, 성급한 버릇, 이런 것들이 결국 운명을 만든다.
어진 마음, 부지런한 습관, 남을 도와주는 마음, 이런 것들이야말로 좋은 운명을 여는 열쇠다.
운명은 용기 있는 사람 앞에서는 약하고, 비겁한 사람 앞에서는 강하다. -세네카
사람은 인생을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평생을 통해 배워야 한다.
또한 사람은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지를 배우기 위해서도 평생을 보낸다. -세네카
사람은 위대한 것보다는 새로운 것을 찬양한다. -세네카
사람의 괴로움이 그다지 크지 않을 때는 그것에 대한 말을 꺼낼 수 있지만
그 괴로움이 너무 크면 아예 입을 열 수조차 없다. -세네카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세네카
시간은 이성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을 고친다. -세네카
가난하다는 말은 너무 적게 가진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바라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세네카
마음만을 즐겁게 하는 평범한 책들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따라서 의심할 바 없이 정신을 살찌우게 하는 책만을 읽어야 한다. -세네카
육체의 노예가 되는 사람이 어찌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세네카
쾌락이란 것은 우리들이 가장 즐거워하는 그 순간에 이미 사라지는 것이다. -세네카
사람은 인생을 어떤 방법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평생을 통해 배워야 한다. 또한 사람은 어떻게 죽는 것이 좋은지를 배우기 위해서도 평생을 보낸다. -세네카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세네카
인간은 항상 시간이 모자란다고 불평을 하면서 마치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세네카
우리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배운다. -세네카
노동은 인간의 보배다. 노동은 기쁨의 아버지다. 노동은 행복의 법칙이다. 노동은 모든 것을 정복한다. 노동은 신체를 굳세게 하고, 가난은 정신을 굳세게 한다. 자기 자식에게 육체적 노동의 고귀함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에게 약탈 강도의 준비를 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노동은 우리로 하여금 권태, 악덕, 욕심에서 멀어지게 한다. -세네카
우리는 어떠한 지배자 밑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정신의 지배 하에 있다. 자기 힘으로 하라! -세네카
참으로 위대한 일은 언제나 서서히 이루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게 성장해 가는 법이다. -세네카
어떠한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냉철한 이성으로써 과감히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위대한 것이다. 운명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사실 자신이 운명을 무겁게 느끼기도 하고 가볍게 여기기도 할 따름이다. 운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약한 것이다. 자신이 약하면 운명은 그만큼 강해진다. 연약한 사람은 언제나 운명이란 바퀴에 깔리고 마는 것이다. -세네카
스스로 비참하다고 느끼는 마음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천이다
쾌락은 우리가 즐거워하는 순간에 이미 사라지고 있다
고통은 닥쳐온 뒤에 느껴도 늦지 않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것은 가장 큰 행복이다
시간은 이성의 힘으로도 고칠 수 없는것을 고친다
용서를 받으려거든 먼저 용서하라
진실의 힘은 영원히 지속된다
남의 허물들은 눈앞에 있고, 우리 자신의 허물은 등 뒤에 있다
네가 동의하면 운명은 너를 인도하고 네가 동의하지 않으면 운명은 너를 강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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