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유신지사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를 없애고 덴노의 신정부 아래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다.


기존의 일본 전통의 문화를 지키면서 부국강병을 실시했던 막부와는 달리 메이지 신정부는 구 체제의 잔재를 용납하지 않았다.



1871년, 폐번치현 廃藩置県 


1871년, 단발령 斷髮令


1876년, 폐도령 廃刀令



지방의 번을 폐지하고 사족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상투를 잘랐으며 칼을 빼앗았다.


국민개병제로 국가의 무력은 평민들이 담당하게 했다. 사실상 이제 사족들은 평민과 다를바가 없었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서 전쟁기간의 막대한 전비를 사비를 털어 충당했던 무사들은 아연실색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는 기대했던 새로운 세상의 주역의 자리가 아니라 늙고 말라비틀어진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비웃음 뿐이었다.




무엇을 위한 메이지유신이었는가?


고작 이 따위 대접을 받으려고 그리도 처절하게 싸웠는가?


사족들의 불만은 폭발하기를 기다리는 화산처럼 들끓어 오르고 있었다.




(ドラマ) 坂の上の雲第01回 「少年の國」 (BShi 1920x1080 x264 AAC5.1ch 日本語字幕付).mp4_20140729_133153.309.jpg


한편 메이지 6년, 1876년에 신정부를 뒤흔들 일대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필두로 정부 수뇌의 절반과 군인, 관료를 포함 600명의 일제히 사퇴한 것이다.


이름하야 정한론 정변이었다.


정한론征韓論 이란,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서구열강에 맞서기 위해서는 바다 건너 조선을 정벌하여 식민지화 해야 된다는 제국주의적 주장이었다.


1860년대부터 뿌리깊에 내려오던 사상이었고 메이지 유신 시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요시다 쇼인이 주창했다. 




왕정복고 직후, 조선과의 수교를 위해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전과는 달리 국서에 황제국만 쓸 수 있는 황皇자와 칙勅자가 들어가있었기에


불손하다 여긴 대원군은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이 뒤에도 사다 하쿠보가 부산에 방문했으나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은 꼴이 거슬려 문전박대 당했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에 격분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정한론이 대두되었고 


여기저기 물어뜯고 개판치는 와중에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기가 직접 조선에 건너가겠노라 주장했다.




228757.jpg

<내가 직접 나서겠다>





의논 끝에 사이고가 주조선 일본 전권대사로 파견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정부 중심요인들이 유럽사절단으로 파견되어있었기에


사절단의 귀국때까지 최종결정이 밀리게 된다.


그리고 1873년 9월 13일, 유럽에서 돌아온 오쿠보 도시미치 파벌은 사이고의 파견을 각하해버린다.





gazo-Ookubotosimiti0.jpg

<나 없는 동안 별 짓거릴 다 해놨네??>



사절단이 없는 동안에는 중대한 개혁을 하지 않기로 해놓고 이것저것 저질러놓는 바람에 국내의 혼란스러움과 부작용을 본 오쿠보 파벌은


사이고에 대해 경계심을 품었다. 함께 발로 뛰며 유신을 이룩한 동지였지만 지금은 정치적 라이벌 관계, 멋대로 날뛰게 둘 수는 없었다.



결정적으로 사이고에 대한 반발심은 제쳐두고서라도 지금 일본의 국력이 해외사업을 벌일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절단은 유럽 각국의 도시를 둘러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철도, 기차,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 있는 철의 건물들, 우수한 무기와 훈련으로 무장된 정예군대 상상은 했지만 현실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일본은, 지금 상태로는 언젠가 서구열강에 집어 삼켜지고 말것이다. 



사절단의 특명전권대사였던 이와쿠라 토모미는 미국에서 상투를 잘랐다.



이런 상황이고 보니 일본에서 꿀만 빨다가 조선에 가겠다고 설치는 사이고가 가짢게 보일 수 밖에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내정에 힘쓸 이때에 무슨 놈의 얼어죽을 조선인가?




dfdfsdfsdfsd.jpg

<안돼 >




이후 10월 14일부터 15일까지 열린 각의에서 서로 자기 주장이 안 받아들여지면 사표 쓰니 마니 개싸움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의장 이와쿠라 토모미가 덴노에게 파견연기의견서를 제출했고 덴노가 받아들임으로써 사이고의 파견은 무기한 연기가 되었다.


그리고 24일, 사이고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뒤따라 600명이 우루루 사퇴해버림으로써 메이지 정부는 일대 혼란에 빠진다.




228757.jpg

<잘 있어라 새기들아, 나 간다ㅋㅋ>

gazo-Ookubotosimiti0.jpg

<아.. 갈거면 지 혼자 가든가 >





고향 가고시마(사쓰마)로 돌아온 사이고 다카모리는 추종자들의 후빨을 바탕으로 학교를 열었다.


평소 사쓰마를 존경하던 추종자들과 젊은 청년들, 사쓰마의 사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 세력은 순식간에 커져


단순한 사학교당이 아닌 가고시마 현의 정치를 좌지우지 하는 일종의 정치정당 성격으로 변했다.



그리고 1876년 3월, 폐도령과 금녹공채증서 발행조례秩禄処分 가 발표됐다. 


간단히 말해 칼을 빼앗고, 녹봉 지급을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사족 최후의 특권이었던 이 두 가지 특권이 사라짐으로써


사무라이 계급은 평민과 다를바가 없게 되었고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사족 반란이 일어났다.




Shinpūren_Rebellion.jpg

<신푸렌의 난> 

Hagi_Rebellion.jpg

<바키의 난>



이때 사이고의 심중은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사족들의 반란상황을 기꺼워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오쿠보 도시미치는 이러한 반란상황의 배후에 사이고가 있는게 아닐까 의심했고 자기와 같은 가고시마 출신 경찰 수십명을 가고시마로 내려보내


사이고를 감시하게 했다.


사이고를 범죄자 취급하는 이러한 행태는 추종자들을 격분케 했고 가고시마 여기저기서 격앙 된 고성이 오갔다.



충돌은 눈 앞에 다가와 있었다. 다만 계기가 없었을 뿐.




1월 29일, 가고시마 현의 육군성 포병 창고에 일단의 사람들이 숨어들었다.


가고시마 현에 위치한 육군성 포병 창고에 있는 무기와 탄약을 오사카로 옮기기 위해 은밀히 파견된 자들이었다.


이 탄약 생산 설비는 부유한 재력을 바탕으로 근대무기 생산에 노력한 사쓰마 번 시절부터 사쓰마 번사들의 사비를 털어 만든 사쓰마의 재산이었다.


당시 일본 육군의 주력 장비로 여겨졌던 스나이더 후장식 소총의 탄약을 생산 할 수있는 설비는 오로지 단 한 곳, 가고시마 현 뿐이었다.




Boxer_patron_Package-cutaway.JPG

<스나이더 소총 10발 패키지, 소총 탄환 단면>



하루아침에 사쓰마의 재산을 강탈당한 사족들은 분노했고 정부의 무기고를 급습하여 총과 탄약을 탈취했다.


그러나 이들이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구식 전장식 엔필드 소총과 탄약 뿐. 


이것은 그 동안 전장식 총으로 무장한 막부군을 박살내며


일본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던 사쓰마의 힘이 한 순간에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1월 30일, 가고시마로 파견된 정부측 인사들이 사이고의 암살을 도모한다는 첩보가 입수됐고 이들을 붙잡아 고문한 결과


암살지령을 받았음을 실토해냈다.



사학교당원들은 격분했다. 사쓰마의 재산을 강탈당하고, 범죄자 취급을 당하며, 끝내는 주군의 목숨을 노리는 정부의 폭거에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추종자들은 사이고에게 몰려가 거병을 촉구했고



신중론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거병이 결정되었다. 





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1422.767.jpg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1507.742.jpg



진군경로를 육로로 하느냐 해로로 하느냐 논쟁이 벌어졌지만


배를 타고 도둑처럼 침투하느니 육로로 당당하게 나아가 온 천하에 아군의 대의를 밝히자는 의견이 힘을 얻어


육로로 진군하기로 결정되었다.



사학교당 본당을 사쓰마 본영으로 삼고 지원자를 받았다. 순식간에 몰린 종군자들로 병력은 금새 채워졌고


2월 15일, 마침내 사이고는 1만 3천의 병력으로 거병한다.





사쓰마 출진.jpgSeinansenso_snou.jpg

<가고시마  출진도>




협상을 위해 카와무라 스미요시 중장이 찾아왔지만 살벌한 분위기의 병사들 앞에서 말도 못 꺼내고 쫓겨났고


육군대장 야마가타 야리토모는 각지의 부대에 경계령을 내렸다.


사이고는 군대를 7개 대대로 나누었고 15일, 눈보라를 뚫고 반란군이 구마모토성으로 진군했다.


큐슈지방의 지방 진대 鎮台 수비군으로써는 이 대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사쓰마 반란군을 미약한 저항을 분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19일, 전보를 받은 정부는 정식으로 가고시마 토벌령을 내렸다.



Imperial_troops_embarking_at_Yokohama_to_fight_the_Satsuma_rebellion_in_1877.jpg

<출진하는 정부군>




야마가타 야리토모를 사령관으로 육군 제1여단, 2여단, 별동 제1여단, 2여단 4개 여단 병력 2만명이 사쓰마군 요격을 위해 출발했고


21일, 구마모토성을 포위한 사쓰마 군은 공격을 개시했다.


구마모토성의 수비를 맡은 진대 鎮台 사령관 타니 타테키谷干城 는 농성전에 돌입, 재래식 요새의 진수라 일컬어지는 구마모토 성에서 


사쓰마군 1만 3천명 대 수비군 진대 4천명의 전투가 벌어졌다.




XRzChER987.jpg

<구마모토 성>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당시 울산 전투의 전훈을 바탕으로 지은 난공불락의 요새

이 요새의 방어력은 19세기 근대적 공성군의 화력을 충분히 버텨낼만큼 유효했다.





사쓰마군은 공성군을 두 제대로 나누어 두 개 대대는 전면 공격 나머지 대대는 분할하여 측면 공격을 담당케 했다.


사쓰마군 4번 대대장 키리노 도시아키는 "상대는 농민에 지나지 않는다. 설사 백만대군이라도 이길 수 있다!" 라며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훈련도가 낮은 농민 징집병이라 할지라도 지휘관의 제대로 된 감투정신과 


잘 구축된 방어요새, 충분한 보급과 장비, 병사 개개인의 약간의 전투정신만 있다면 수성전은 그리 어려운 전투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구마모토 성은 최강의 요새.



rnakahxh.jpg

<구마모토 공성전>




전면 공격의 5대대가 시라카와 강둑에서 성 방어군의 포격으로 격퇴되었고


4대대 또한 동남쪽에서의 진대 수비병의 맹렬한 사격에 돈좌되었다. 


1번대대와 2번대대도 사정은 마찬가지. 격렬한 저항에 밤이 될 때까지 소득은 없었고 할 수 없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이라고 우습게 여기던 징집병들에게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이다.



한편 큐슈 지역의 사족들이 사쓰마 군에 합류했다. 사쓰마군의 병력은 순식간에 불어나 4만여명에 가까워졌고 


늘어난 병력으로 자신감이 생긴 사쓰마 군은 군을 나누어 구마모토 성의 포위를 계속하고 나머지는 정부군과 일대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철도가 부족한 일본 국내 사정으로 해운수송에 의지했던 정부군은 속속 병력을 하카타에 상륙시켰고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 소좌가 지휘하는 제14연대가 사쓰마군 2개 소대와 마주쳤고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사쓰마군은 화력전에서 구식 소총을 장비한 아군이 불리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14연대의 총화가 뜸해진 틈을 타 검을 뽑았다.


발도 돌격 拔刀 突擊 이었다.


313578.gif

<농민병 좃밥 새기들아!! 칼로 싸우자!>




순식간에 14연대 전면으로 쇄도한 사쓰마 군은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고 14연대는 전열이 붕괴되어 연대기까지 탈취당했다.


근대전쟁에서의 연대 군기가 적에게 탈취당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으며 노기는 훗날 죽을때까지 이 패배가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 발도돌격은 화력의 열세를 적 전면에 역으로 근접돌격하여 만회하는 일종의 고육지책이었으나 의외로 효과가 좋은 탓에


이후 서남전쟁 전투 여기저기서 근접전의 양상이 나타난다.



2월27일, 타카세를 공략하기 위해 정부군이 남하하고 키리노의 2800명 병력이 이를 막기 위해 격돌, 속속 예비대가 증원되는 정부군과 달리


예비대가 고갈 된 사쓰마군은 격퇴되고 만다.



사쓰마 군은 여기서 전략을 바꾸어 구마모토 성의 포위군 3천명은 그대로 남겨둔 채 구마모토 성의 구원을 위해 달려오는 정부군을


임의로 설정한 방어선에서 격퇴하기로 한다. 격퇴를 못하더라도 지구전으로 시간을 끈다면 보급이 바닥난 구마모토 성은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것.


반면에 정부군은 어떻게든 방어선은 뚫고 나아가 구마모토 성을 구원해야했다.


결전의 전장은 타 바루 자카 田原坂・吉次峠 고개로 정해졌다.


3월 1일, 양군이 타 바루 자카에서 대치했고 약 한달에 걸친 대 격전이 시작됐다.


Tabarazuka_battle.jpg



노츠 소장과 미요시 소장이 이끄는 정부 주력군 제 1 , 2 여단 15000명은 타바루자카 방어선 돌파를 감행했다.


2개 여단은 타카세에서 타바루자카 방면으로 진군하여 거점을 구축한 후 3개 방면으로 나뉘어 


야마구치 소령의 근위 제 1 연대 제 1 대대가 토요 방면으로 쳐들어가지만 오히라에서 사쓰마 부대에 측면과 배후를 찔려 격퇴된다.


제 14 연대는 남쪽 부근으로 남하, 후방에서의 원호 포격하에 첫 번째 진지를 함락시키고 단번에 고개를 오를 기세였으나 곳곳에 참호에 숨어있던


사쓰마군이 격렬한 총격을 가해 격퇴시켰다.



tabarutizu1.JPG

<사쓰마 방어선에 공격을 실시하는 정부군>





오후 3시, 노츠 소장의 일갈하에 정부군 각 군단은 나팔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돌격을 감행하고


후방에서의 포격지원 또한 정부군의 돌격을 원호했다.


그러나 적 방어선에 다다를 때 쯤, 측면의 수풀 속이나 고개 너머 곳곳에 매복해있던 사족 병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어 육박해들어오고


전면 방어선에서도 고개 위의 총격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발도 돌격해 들어왔다.


한때 승기를 잡았던 정부군은 거짓말처럼 전열이 붕괴되어 후퇴했다.



훈련도가 낮은 징집병은 번뜩이는 일본도를 치켜들고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육박해오는 발도 돌격을 견딜 수 없었다.


화력전에서 우위를 잡고 있다가도 막상 적이 돌격해오면 순식간에 목이 달아나고 전열이 붕괴되어 거미새끼처럼 흩어져 버렸다.


이런 양상은 타바루자카 전투 내내 반복되었다.


20359_01_l.jpg


dfsdfsdf.jpg

일단 적의 총격이 뜸해졌다 싶으면 냅다 칼을 뽑고..

hanjiro04.jpg

그리고 존나게 달립니다.

img_0.jpg

 특히 사쓰마 시현류 示現流 특유의 괴성을 지르시는 건 잊으시면 안됩니다.


"끼이이잉야야야야야야ㅑ아ㅏㅇ하핳앜앜아앜!!!!!!" 


(진짜 이런 소리 냄;;)


http://youtu.be/r6bwg1d7-Js


dsfsdfsf.jpg

그리고 적과 맞부딪히면



dsfsdf.jpgtls-1.jpg

신나게 썰어버리시면 됩니다. 참 쉽죠?



전통 사무라이들의 무력을 우습게 여기던 정부군은 의외의 결과에 매우 당황했다. 


지난 보신전쟁 때 종대돌격을 고집하던 막부군의 무사들을 소총 일제사격으로 격퇴시켰던 그들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들이 간과한 것은 보신전쟁 때는 막부군이나 삿쵸군이나 무사들이 중심으로 전선을 누볐으나 다수의 무사들을 실직자로 만들어버린 지금의


정부군의 인적자원은 대부분이 총을 잡아본 지 2년이 넘지 않는 징집병들이란 것.


그들은 필살의 일격만을 수련하고 돌격 때는 기괴한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사족들에게 맞서지 못했다.


단 한번의 격돌로 공포심이 전염되어 오합지졸 마냥 흩어져 버렸다.


결국 정부군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후방에서 육군의 후방지원을 맡고 있던 경찰 경시대 警視隊 에서 


검술에 능한 구 사족 출신 경찰들을 뽑아 발도대 抜刀隊 로 편성, 사쓰마군의 근접 돌격에 대응하게 했다.




WEB뾭뢫룷붎seinan.jpg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1906.673.jpg


이들은 대부분 보신전쟁 당시 구 막부군에서 싸운 번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사쓰마 출신 향사鄕士 들도 다수 참전했다.


발도대는 잇따른 격전에서 용맹히 싸웠으며 사쓰마 군의 발도 돌격에 한치도 밀리지 않고 격돌했다.



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1959.026.jpg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2049.681.jpg75bad19961553bb76ab8651c41a071d3.jpg888431ac45acb68320c4ba4ec2ba1345.jpgb0144990_50e7029c75bb7.jpg

<아돌 전개 준비중인 사이토 하지메 성님. 이 양반도 발도대 소속으로 서남전쟁에 참전했다.>




발도돌격에 대응할 수 있게 된 정부군은 차차 승기를 잡아갔다.


15일, 정부군은 요코히라 산을 점령, 차츰차츰 거점을 점령해갔고


20일 이른 지루한 공방전을 끝장내기 위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폭우로 시계가 제한되었지만 요코히라 산의 포병대는 포신이 닳아 없어질 기세로 맹렬한 포격을 가했고 


포병대의 지원 사격 아래 정부군이 일제히 방어선에 돌격했다. 폭우로 인해 전장식 소총의 한계상 제압사격이 제한되었던 사쓰마군은


정부군의 맹렬한 공격에 하나하나 격파되었고 마침내 우에기 방면으로 퇴각을 실시한다.


서남전쟁의 승패는 타바루 자카에서 갈렸다. 정부군의 확실한 승리였다.





이후의 우에키,기도메 등 구마모토 성으로의 진격로에서 막아서는 사쓰마군의 저항은 기세등등한 정부군 앞에 모두 분쇄되었다.


구원군이 차츰차츰 구마모토 성으로 향하고 구마모토 성 남쪽 야츠시로 해에 정부군의 별동대가 상륙하고


구마모토 성을 포위하고 있던 사쓰마군은 남하하는 정부군 본대와 상륙한 정부군 별동대, 구마모토 성의 진무 병력의 양동작전에 말려들어


패배하고 마침내 52일간 고립되었던 구마모토 성은 해방되었다.



Satsuma_rebellion.JPG



밀리고 밀려 마지막 결사의 성동 회전에서도 사쓰마군 장병들은 용맹히 싸웠으나 패퇴한다.


사실상 이제 사쓰마군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이고 곁에 남은 병력은 600여명이 다 였고 그나마도 상처투성이 패잔병들 뿐.



사이고와 그를 끝까지 따르는 추종자들은 가고시마로 후퇴하여 시로야마에 참호와 굴을 파고 버텼다.


정부군은 이제 마지막 반란의 수괴의 목을 따기 위해 진군했다 5만명이 넘는 대병력이 시로야마를 겹겹히 포위했고


어떻게든 사이고만을 살리려 정부군에 접촉했지만 정부군은 사이고에게 할복을 권유했다.






9월 24일, 대포를 동원한 총공격이 시작되고 2시간만에 모든 방어거점이 함락된다.


이와사키 골짜기에서 측근들과 있던 사이고는 마지막을 짐각하고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무릎을 꿇는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그 자리에서 할복했고 뒤에서 대기하던 벳푸 신스케가 목을 내리쳤다.


사이고 이하 시로야마에 있던 반란의 우두머리들은 전원 자결하거나 사살됐다.




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2938.930.jpgYae no Sakura E38 (720p H264 AAC)-PPX.mkv_20140729_132959.460.jpg




이로써 서남전쟁은 끝났다. 불만을 가졌던 사족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쳤고 사태를 관망하던 나머지 지방의 사족들도


숨을 죽이고 납작 엎드렸다. 기세 좋게 출병하여 나아가던 사무라이들의 군대가 농민 징집병들에게 박살이 난 것이다.


근대전쟁에서 여전히 자신들의 무력의 유효성을 증명하려던 사족들의 반란은 처참한 패배로 끝났고 국민개병제가 확실하게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사무라이들은 역사속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영원히.




(ドラマ) 坂の上の雲第01回 「少年の國」 (BShi 1920x1080 x264 AAC5.1ch 日本語字幕付).mp4_20140729_133214.087.jpg(ドラマ) 坂の上の雲第01回 「少年の國」 (BShi 1920x1080 x264 AAC5.1ch 日本語字幕付).mp4_20140729_133156.429.jpg(ドラマ) 坂の上の雲第01回 「少年の國」 (BShi 1920x1080 x264 AAC5.1ch 日本語字幕付).mp4_20140729_133150.813.jpg(ドラマ) 坂の上の雲第01回 「少年の國」 (BShi 1920x1080 x264 AAC5.1ch 日本語字幕付).mp4_20140729_133226.880.jpg






 이후 일본은 자본을 축적하여 



새롭게 기득권층으로 떠오른  대지주나 재벌, 관료들이 지배하는 나라로 거듭났고 



후일 이 무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제국주의, 군국주의 침략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