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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 노혜숙 옮김

양문 2002.12.20

 

THE POWER OF NOW

 

어떠한 일도 과거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과거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떠한 일도 미래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다.

미래의 일도 지금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마음은 내가 아니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

 

깨달음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은

아무리 다가가도 붙잡을 수 없는 초월의 세계가 아닙니다.

깨달음이란 자신의 존재와 하나됨으로써 느끼는 자연스러운

상태일 뿐입니다.

 

내 이름 과 모습 뒤에 숨어 있는 본래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존재 상태란 어떤 것인가요 ?

우리는 지금이라도 당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우리 자신, 우리의

진정한 본질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충만하게 강렬하게 집중하고 있을 때만이 진정한

존재 상태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합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칠 줄 모른 생각의 행력이 소음이 되어,

내면의 고요한 세계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본질은 내면의 고요한 세계와 일치합니다.

갖가지 생각을 헤아리면서 그건 생각들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된 자아가 만들어 지고 두려움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자기 존재하고 착각한 것이지요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머릿속 헤아림을 쫓아가다 보면 문제와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결과 미친 둣이 복잡한 세상에 휩쓸리게

됩니다. 세상은 조각조각 부서진 우리들 마음을 고스란리 반영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이란 만물의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상태에 머물러 전체성을

살아사는 것이고, 평화로운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깊은

곳의 진정한 자아와 하나될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질화된 세상

속의 생명력과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면 보이지 않는 장막이 생겨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게 되고, 말이나 이미지를 곡해하고 자기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돼, 진정한 관계를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 장막이 당신과 진정한 당신 사이를, 당신과 당신의 동료 사이를,

당신과 자연사이를 , 당신과 신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모습들과 형상들의 차원 밑

바닥에서 당신은 진실로 만물과 하나입니다. 생각이라는 장막에 가려

그 본질을 잊고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위한을 줄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올라르게 사용하면 마음은 아주 훌룡한 도구이지만, 잘못 사용하면

대단한 파괴력을 갖게 됩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게 점령당하고, 점령한 실체를 당신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첫걸음은 점령한 실체인 '생각하는 자'가

진정한 당신이 아님을 깨닫는 데 있습니다.

 

생각하는 자를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하는 순간 더 높은 차원의 의식

이 활성화되는 겁니다. 당신은 그제야 생각 너머에는 광대한 앎의

영역이 있으며, 생각이란 단지 그러한 앎의 영역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신은 또한 깨우치게 될 겁니다.

아름다움과 사랑, 창조력과 기쁨, 내명의 평화 같은 진정 중요한

것들은 마음 너머에서 온다는 것을

 

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으라

마음이란 당신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단적인 문화의 소산일 뿐

아니라 당신 자신이 겪은 과거 역사의 산물이가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눈을 통해 혀재를 보고 판단하면서 완저히 왜곡된

시각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머릿곡에서 들이는 목소리에 가능하면 자주 귀를 기울이기 시작

하십시오. 낡은 축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오랜 세월 되풀이해서 들려왔던

사고 유형에 특히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라'는 의미입니다. 머리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그 자리게 목격자로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문 아무런 견해도 갖지 말고 그저 듣기만

하십시오. 아무헌 판단도 하지 말고 비난도 퍼붓지도 마십시오. 목소리가

들리면, '아, 목소리가 들이는 구나'하고 알아차리기만 할 뿐 거기에

끼어들지 않고 '여기'에 남아 그저 지켜보가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생

하게 깨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자기 자신의 현존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을 초월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당신은 그 생각뿐아니라 그 생각의

목격자로 서의 자신 또한 의식하게 됩니다. 새로운 차원의 의식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주의를 기울임에 따라. 그 생각의

저변이나 뒤안에 있는 더 깊은 곳의 당신 자신을, 그 현존을 느끼게 됩니다.

그때 당신을 점령하고 있던 생각은 힘을 잃고 재빨리 자리를 피합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더 이상 거기에 힘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자리를 비키면 당신은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무심의 틈새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무심의 틈새를 경험할 때, 당신은 내면의 고요와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평소에 마음에 가려져 있던 존재와의 자연스러운 합일감이 바로 이것입니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고요와 평화의 느낌이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사실,

그 깊이는 끝이 없습니다.

 

내면의 연결 상태 속에서 당신 자신을 생각과 동일시 했을 때보다 훨씬

더 또렷이 깨어 있게 될 것입니다. 존재의 충만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와 더불어 에너지 장의 진동 주파수가 높아 져서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생명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무심의 여역으로 깊이 들어감에 따라, 소위 순수의식 상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모든 생각과 감정, 육체뿐

만 아니라 외부 세상 전체가 상대적으로 무의미해집니다. 순수 의식의

상태는 자기 중심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기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당신은 그제야 '나 자신'에 대한 예전의 생각들을 뛰어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혀존이야말로 당신 자신의 진정한 본질이며, 동시에 당신보다 훨씬

더 위대한 무엇입니다.

 

 

생각하는 자를 지켜보는 대신 단순히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

만으로도 마음의 흐름 속에 틈새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단지 이 순간을

확고하게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의 음직임으로부터 우리의 의식을 거두어들여서 주의를 집중하고 예

민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무심의 틈새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명상의

핵심입니다.

 

이는 일상행활을 계속하면서도 할 수 있는 수행방법입니다. 단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일상적인 활동에 목적을 부여하고 거기에 최대한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그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십시오.

집이나 직장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계단 하나나에, 걸음을

옮겨놓는 동작 하나라나에, 들이쉬고 내 쉬는 호흡 하나하나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온전히 지금 이순간에만 존재하십시오. 손을 씻을 때에도

거기에 수반되느느 모든 감각에 주의를 기울여 보십시오. 물이 흐르는 소리와

물이 닿는 느낌.....

 

고요하지만 강렬한 현존의 감각을 느껴 보십시오.

 

깨달음을 향한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마음의 흐름 속에서 어떤 틈새를 만들 때마다

의식의 빛은 점점 더 밝아집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

마음은 도구이며 연장입니다. 마음이란 특별한 과업에 사용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내려놓아도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 중에서 80~90%는 반복적이고 부질없는

잡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왜 생각에 중독될 수밖에 없나요 ?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내용물과 활동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정함에 따라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기초해서 자신이 누구인자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거짓된 자아를 '에고'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에고란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함으로써 창조된 거짓된

자아를 뜻합니다.

에고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에고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

스로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으려고 하고 거기에서

어떤 해방감이나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에고는 과거의 눈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현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자유를 향한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마음이 지배하는 단계는 의식의 진화에 있어서 한단계 지나지 않습니다.

생각은 의식의 작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생각은 의식 없이는 존재할 수

없지만, 의식은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생각을 딛고 솟아나는 것입니다.

끊임엇이 이어지는 내면의 중얼거림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펑화롭게,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마음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심이란 생각의 헤아림이 없는 의식입니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만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은

그런 상태에 있을 때에만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죠

 

마음이란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도구입니다. 다른 마음들과 대적할 때

공격과 방어를 하고, 정보를 얻고, 저장하고, 분석하는 일은 잘하지만

창조적이지는 않습니다. 진정하 예술가들의 창조력은 자신이 알든 모르든

무심의 장소로부터, 고요한 내면으로부터 나옵니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생각이 멈춘 순간의 고요한 상태에서 창조적인 돌파구가

열렸다고 말해 왔습니다.

 

지름 0.2밀리터도 안 되는 인간 세포의 DNA가 어떻게 600쪽 분량의 책

100권 정도를  채울 수 있는 지령을 담고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 속에서 작용하는 지성이 얼마나

광대한지 알것입니다. 마음이 그러한 지성과 다시 연결된다면 경이로운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마음은 자시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보다 훨씬 더 위대한 지성이 작동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마음이란 단지 생각만을 일컫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생각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무의식적인 반응까지 포함합니다.

 

감정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납니다.

감정이란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반영

이라고 말할수도 있을 겁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판단하고 해석하면서 그러한 생각들을

자시 자신이라고 동일시하면 할수록, 다시 말하지면 지켜보는 의식으로서

현존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감정적인 에너지 소비가 더 많아집니다.

 

몸이 말하는 바에 가만히 귀 기울여 보십시오. 그러면 감정이 말하는 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표면적인 생각과 무의식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은 아주 흔한 일입니다. 무

의식적인 마음 활동이 아직 생각으로 인식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

만 그 경우에도 무의식은 항상 우리 몸 안에 감정으로 나타나며, 우리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지켜보는 것은, 앞선 이야기했던 것처럼 생각을 지켜보

거나 귀 기울이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습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생각

은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반면, 감정은 물질적인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어서

주로 몸 안에서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감정 자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감정을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연습하면, 당신 안에 있는 무의식적인 모든 것이 의식의 빛

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지금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라고 이 질문이 올바른 방향을

가리켜줄 것입니다. 하지만 분석하지 말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내면에 주의를 집중하십시오. 감정의 에너지를 느껴보십시오. 만일 아무 감

정이 없다면 몸 안의 에너지 장을 향해 좀더 깊이 들어가십시오 그것이

존재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감정은 우리를 점령하려 하고, 대가는 그렇게 되고 맙니다. 거기에 휩쓸리

게 되면 감정은 일시적이난마 '나'가 되어 버립니다.

생각과 감정은 서로를 돌고 도는 못된 습성이 있어서 서로를 부채질합니다.

일련의 생각들은 감정의 형태로 스스로를 확대하고, 감정의 진동 주차수는

애초의 생각들에 계속해서 먹이를 제공합니다.

 

감정의 원인으로 인식되는 상황이나 사건, 또는 사람에 대한 생각을 거듭할

수록 그런 생각들이 감정에 에너지를 불어넣고, 그렇게 에너지를 얻은 감정

은 다시 생각에 에너지를 불어넣는 식으로 서로를 키워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우리 자신은 이름과 형상 너머에 있습니다.

 

두려움이란 지속적인 위협을 느끼는 것만이 아니다. 자포자기와 자신의 불

완전함을 깊이 느기는 것도 포함된다.

인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이런 감정은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은

만큼 그냥 '고통'이라고 부르는 편이 적당할지도 모릅니다.

 

마음이 하는 주요한 과업 중 하나는 이런 감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거

나 그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고통을

덮어두는 정도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사실, 마음이 고통을 없애려고

싸우면 싸울수록 고통은 점점더 심해집니다. 마음은 결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차제가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서장이 불을 질러 놓고는 방화범을 찾아 헤매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는 일을 그만둘 때까지는 이런 고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에고의 옷을 벗어 던져야만 합니다.

에고라는 거짓된 자아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만이 진정한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겁니다.

 

사람과 기쁨은 진정한 자신과 연결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생각의 지배로부터 우리 스스르를 해방시키기 전까지는

꽃피울 수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 너머

월씬 더 깊은 차원에 존해는 것입니다. 감정을 완전히 의식하고 느낄 수 있

어야만 그 너머의 것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존재의 심오한 상태입니다.

자신의 진정하 ㄴ존재와 내적으로 연결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는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립이 없습니다.

 

쾌락은 항상 외부에서 오지만 기쁨은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쾌락이 떠난 자리에는 고통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의 깊은 평화를, 고요하면서도 진정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잠시 잠깐

경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 상태야말로 우리 본연의 모습이지만, 대개는

마음에 의해 흐려지기 일쑤입니다.

 

하늘이 잔뜩 흐려 있을 때에도 태양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태양은 여

전히 구름 뒤편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모든 탐욕은 순수한 존재의 기쁨 대신 외부 세상과 미래에서 구원이나 만

족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깨달음을 '성취'하려고 하지 마

십시오.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십시오. 마음을 지켜보는 자로서 남아 있어

야 합니다.

 

마음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 다시 말하자면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습니다.

쾌락은 결국 고통으로 변하게 됩니다.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 주었던 인간

관계 또한 그렇게도 덧없이, 그렇게도 쉽사리 고통의 원인이 되어 버립

니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부정과 긍정은 동전의 양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족이든,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에고의 상태로 있는

한 잠재적 고통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 내는 고통과 육체 속에 아직 살아남아 있는 과거의 고통이

그것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있는그대로 받아들이라

지금 이 순간에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거나 "있는 그대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한 저항은 생각의 차원에서 보면 판단의 형태를 띠고, 감정의 차원에

서 보면 부정의 형태를 띱니다.

 

마음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을 부정하고, 거기서 탈출하려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째서 '지금'을 습관적으로 부정하는 걸까요

마음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이 없으면 기능하지 못하고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빈다. 그래서 시간을 초월하는 지금을 위협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마음은 자신이 지배자로 남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을 과거와 미래로 덮

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과 분리될 수 없는, 무한히 창

조적인 '존재'의 잠재력과 생명력은 시간에 의해 가려지게 되고,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마음에 의해 흐려지게 됩니다.

 

마음속에만 존재하며 실재하지 않는 미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지

금'을 축소해 버리면서 매번 그 짐을 더욱 무겁게 하고 있습니다. 집단이나

개개인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쌓을 뿐인 시간 속에는 과거에 기인하는 엄

청난 양의 고통의 잔재물로 남아 있습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면, 과거에 받은

고통의 찌꺼기를 당신 안에 차곡차곡 쌓아 두고 싶지 않다면 더 이상 시

간을 창조하지 마십시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있을까요? 현재의 순간만이 내

가 갖고 있는 전부하는 것을 깊이 인식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을 삶의 구

심점으로 삼으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 살면서 실제로 필요한 경우에만 과거와 미래를 잠깐씩 방

문하도록 하십시오

 

현재의 순간에게 항상 '네'하고 말하십시오. 이미 그러한 상황에 저항하는

것보다 무익하고 어리석은 태도가 있을까요? 삶은 항상 '지금'이 있을 뿐

인데도, 그러한 삶 자체에 반대하는 것보다 더 미친 짓이 있을까요?

있는 그대로 내맡기십시오. 삶에게 '네'라고 말하십시오.

그제야 삶은 당신을 거역하지 않고 당신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불쾌하다 든가 못마땅하다는 이름표를 어떻게 붙이든지 그

과정을 지켜보십시오. 이처럼 이름표를 붙이는 행위가, 그칠 줄 모르고 판

단을 계속하는 행위가 고통과 불행을 창조합니다.

 

그 마음 자리를 지켜보십시오

마음이 작용하는 것을 지켜봄으로써, 당신은 되풀이되는 마음의 저항 습관

에서 빠져 나오게 되고,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도록 허용할 수 있게 됩니다.

외부조거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내면의 자유를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고, 필요한 행동이나 가능한 행동

을 취하십시오.

 

받아들이십시오. 그러고 나서 행동을 취하십시오. 지금의 순간이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그것을 선택한 것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언제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움직이녀서 거기에 저항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삶 전체가 기적적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라

지금의 힘에 접속되지 않으면, 당신이 경험하는 모든 감정적인 고통은

그 찌꺼기를 남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가, 갑작스럽게 이질적이고 험악한 모습을

보고는 감짝 놀라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

안에 있는 그런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업장이

잠복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을 잘 포작하십시오

 

에고가 드리우는 어두운 그림자인 업장은 의식의 빛을 두려워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봐 겁을 먹고 있습니다. 업장은 거기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어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고통과 대면하기를 무의식적

으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만 살 수 있습니다.

 

업장은 장담하건대 그것은 우리의 현존하는 힘을 견디지 못하는 허약한 환영에

불과합니다.

 

어떤 영적 가르침들은 모든 고통의 궁극적으로 환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은 진리입니다.

 

업장은 우리가 그것을 직접 관찰하면서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고, 우리 안의 에너지 장을 느끼고, 거기에 주의를 기울

이는 순간, 업장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했던 의식은 깨지게 됩니다.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들어오는 것이빈다. 나는 그것을 '현존'이라고 부릅니다.

 

업장과 싸우려 들면 내부 갈등이 일어나서 더 많은 고통이 생깁니다.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지켜본다는 것은 그 순간에 "있는 그대로'를 받아 들인다는

뜻입니다.

 

구르고 있는 바퀴를 더 이상 밀지 않아도 얼마 동안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고통의 작용 또한 어느 정도의 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몸이

여기저기 아프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면의 공간을 빈틈없이 수호하십시오. 그러면 업자은 더 이상 우리의 생각을

조종하지 못하게 됩니다.

 

무지의 어둠에 휩싸인다는 것은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실어 버려서. 더 이상 지며보는 자로서의 진정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내면에 일어나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업장이라는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그것이 업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받아즐이십시오. 거기에 대해 생각하지 마십시오. 느낌을 생각으로 바꾸지 말고,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지 마십시오. 현재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십오.

감정적인 고통이 일어나면 그것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지켜보는 자'로

침묵의 관찰자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힘입니다.

생생하게 깨어있는 의식의 힘입니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아차리

십시오.

 

심리적인 두려움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대한 것이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도 마음을 늘

미래에 가 있곤 합니다. 그래서 조바심이 생겨나는 겁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만들어 낸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이라는 점을 상기하십시오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에고가 우리 몸을 향해 끊임없이 내보내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계속 받다 보면 어떤 감정이 들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두려움입니다.

 

마음과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내가 옳든 그르든 그것이 자의식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게 되면,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옳아야 한다는

일종의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강한 욕구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때의 자의식은 마음이 아니라 내면의 더 깊고 진정한 곳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어 있는 의식의 빛 속에서 무지의 어둠은 재빨리 용해될 겁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구란 힘을 가장한 연약함입니다.

진정한 힘은 내면에 있으며 우리는 그 힘을 지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에고는 온전함을 찾아 헤맨다.

에고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에고는 자아를 느끼려고 하는 마음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자신을 외부에

있는 것들과 동일시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우리 자신은 아닙니다.

 

아무리 늦어도 죽음이 임박해 올 무엽이면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내고 말 테니까요.

삶의 비밀은 '죽기 전에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마음속에서 나를 찾지 말라

마음이란 근본적으로 결함을 지닌 것이란 사실만 이해하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당신은 이제, 누구나 다 근본적으로 무의식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여

거짓된 자아인 에고를 창고하고, 그러한 에고로 하여금 '존재' 뿌리를

내린 진정한 자아의 대리 역할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근본적으로 잘못 작용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거기서 파생되는 수많은 문제들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마음이나 감정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서

비롯된 일임을 알아차리게 되면, 우리는 거기에서 벗어나 비로소 '현존'하게 됩니다.

현존하고 있을 때는 마음과 뒤엉키지 않으면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마음 안에서 찾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 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에고의 마음이 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

 

시간에 미혹되지 말라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시간의 덫에 갇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과 기대감을 통해서만 충동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선물하고,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구원과 성취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환상입니다.

 

당신이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은 시간에서 벗어난 한 지점인 '지금'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왜 지금 많이 가장 중요할까요?

무엇보다 '지금'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현재'야말로 우리의 전체 삶이 펼쳐지는 무대이며, 언제나 우리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삶은 지금입니다.

지금이 아닌 삶이란는 건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이 가장 소중한 두번째 이유는, '지금'만이 마음이 제한하는 범위

너머로 우리를 데리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만이 시간도 없고

형태도 없는 '존재"의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인 것입니다.

 

지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한 일도 과거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일도 '지금'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어떤한 일도 미래 속에서 일어날 수는 없습니다.

미래의 일도 '지금'속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깨닫는 순간.

마음으로 부터 '존재'로,

시간으로부터 현재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것입니다.

갑자기 만물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게서

에너지가 내뿜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차원으로 가는 열쇠는 현재에 있다.

생명의 위태포운 긴급 상황을 당하면, 상대벅인 시간개념을 떠나는

의식의 대전환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과거와 미래를 가진

인격이 극적으로 후퇴하고, 아주 평온하면서 동시에 매우 기민하고

강렬한 현존 의식이 대신 들어서는 것입니다.

 

고대의 영적 스승들은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이야 말로

영적 차원으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보았습니다.

 

선의 핵심은

칼날 위를 걷듯 예리하게 깨어 있는 것으로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것입니다.

 

순수하고 완벽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어떠한 문제도,

어떠한 고통이나 번민도, 진정한 당신이 아닌 것은 그 무엇도 당신 안에

살아남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속에서 시간이 없는 차원에서 당신이 지닌 모든 문제는 용해되어

버립니다. 고통이나 번민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고통은 '지금' 속에 살아남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힘

당신은 잠시 동안 시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지금 속으로 들어가서. 마음의 스크린을 거치지 않은 채 나무를 인식한 것입니다.

생생한 깨어 있는 상태에서 나무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시간이 없는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깨우침이 일어납니다.

그런 깨우침 속에서는 살아 숨쉬는 만물의 영혼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그 나무를 알 수 없습니다.

나무에 관한 사실이나 정보를 알 수 있ㅇ르 뿐이죠.

내 마음은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당신을

알 뿐입니다. 깨어 있는 존재만이 직접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생각과 감정을 지켜보십시오

여러 상황에 대처하는 당신 자신의 반응을 지켜보십시오

마음의 감시자가 되십시오. 당신이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나 상황에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 자신의 반응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관찰하는 것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마십시오.

생각을 지켜보고

감정을 느끼고

반응을 관찰하십시오

그런 것들을 개인적인 문제로 삼지 마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관찰하고 있는 대상에서 느꼈던 것보다

강력한 무언가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뒤한에서 고요하게 머물며

지켜보는 자가 되십시오.

 

마음과 자신과 동일시하면 마음은 더욱 강해집니다.

하지만 마음을 관찰하는 자가 되면 마음은 힘이 약화됩니다.

마음과 동화되면 더 많은 시간을 만들어 내지만, 마음을 관찰하면

'시간 없음'의 차원이 열리게 됩니다.

 

현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게 되면, 시간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지금'속으로 들어가기가 훨씬 수월합니다.

 

자기관찰을 함으로써 우리는 저절로 삶 속에 현존하게 됩니다.

마음을 관찰하고 있을 때는 더 이상 그 함정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속하는 것이 아닌 무엇인가 다른 요인이 들어와서 자기를 지켜보게 됩니다. 

 

심리적인 시간에서 놓여나라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항상 '지금'에 주목하면서 시간을 주변

장치로 인식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계속 사용하면서도 심리적인 시간에서 자유롭습니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지금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고 있다면

당신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잘못을 떠나지 못한 채 자기를 비판하고 저주하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 실수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잘못을 자기 자신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시간이 되어서 당신의 거짓된 정체성과

연결될 것입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어쩔 수 없이 심리적 시간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향해 나아간다면,

당신은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지만,

바로 이 순간 내딛는 발걸음을 존중하고 거기에 최대한 집중합니다.

하지만 그때, 목표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어 미래의 행복이라든가

성취감, 자기 만족을 너무 의식하게 되면, '지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더 이상 길가에 피어 있는 꽃을 볼 수도 없도

그 향기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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