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영웅들의 후대에 남기는 마지막 유훈...

 

*몽골제국 창시자 징기스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살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백성은 어린애와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배운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없애 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스칸이 되었다.


*원나라 초대 황제 쿠빌라이칸

우리 할아버지 칭기즈칸께서는 벽돌집에서 농경민족과 어울려 정착해 살면

그때가 곧 할아버지께서 세우신 몽골제국이 망하는 날이라고 하셨다.

거란족과 여진족은 비록

유목민이었지만 불행히도 할아버지 칭기즈칸의 훈계를 듣지 못해서 마지막에는

한족 돼지처럼 게으른 사대부 집단으로 변했다.

금나라의 마지막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너희도 잘 알 것이다.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고, 기술은 끝없이 바뀐다.

아무리 어려운 난관에 부딪혀도 반드시 방법이 있음을 믿고,

아무리 하찮은 적이라도 우리하고 다른 기술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한시도 잊지 말라.

내가 최고라고 자만하지 말라.

옆을 보고, 앞을 보고, 뒤를 보아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라.

상대가 강하면 너희를 바꾸고, 너희가 강하면 상대를 바꾸어라.

한 번 떠났으면 고향이라도 돌아보지 말 것이며,

헤어졌으면 부모라도 그리워하지 마라.

세상을 살되 한 뼘이라도 더 넓게 살고, 사람을 사귀되 한 명이라도 더 사귀며,

기술을 배우되 한 가지라도 더 배워라.

그러나 우리의 유목정신을 잊고 남만인들의

농경사고에 물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에도막부 창시자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서두르면 안 된다.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

굳이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

마음에 욕망이 생기거든 곤궁할 때를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장구(無事長久)의 근본, 분노는 적이라 생각하라.

승리만 알고 패배를 모르면 해가 자기 몸에 미친다.

자신을 탓하되 남을 나무라지 마라.

미치지 못하는 것은 지나친 것보다 나은 것이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

풀잎위의 이슬도 무거워지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주나라 태공망 齊의 제후 강태공(姜太公)

내가 수십년간 낚시를 벗하며 때를 기다리는 동안

조강지처마저 나를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고서야 문왕 서백을 만나

은나라 주왕(紂王)을 멸하고 주나라를 세웠다.

나는 숱한 세월을 낚으며 늙은이가 되었지만

결코 하늘을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고

그 인내의 결실이었던 단 한번의 기회로도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漢나라 회음후 한신(韓信)

용모가 볼품없어서 되는 일이 없다고 푸념하지 말라!

나는 어렸을때 보잘것 없는 외모 때문에 불량배의 가랑지사이를

기어건너는 치욕을 당했고,

빨래터 노파의 밥을 빌어먹기도 했다.

초패왕 항우는 나의 볼품없는 용모를 업신여겨

범증의 천거를 번번히 거부하며 십년간이나 말단벼슬아치

집극랑 자리를 맴돌게했다.

항우에게 실망하고 유방 밑으로 들어갔으나 연전연승하며

'해하'에서 항우를 완전히 섬멸하고 천하를 유방에게 안겨줄때까지

갖은 수모를 견뎌내야했다.

나는 초라하기 짝이없는 몰골뒤로 천하웅비의 뜻을 감추고

뭇사람들의 갖은 야유와 모욕을 참아내며

기어코 전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


*漢나라 사기의 작가 사마천(司馬遷)

한때 자존심과 명예를 짖밟힌 치욕을 당했다고 생(生)을 포기하지 말라!

나는 벗 이릉장군을 변호하다 무武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생식기가 짤리는

궁형의 치욕을 당하고도 목숨을 부지하였다.

당시 궁형의 수치를 못참고 자살하는 者가 많았으나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못다 이룬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나는 거세된 남자가 모진 생명을 질기게 끌고간다는 온갖 조롱을 참아내며

옥중에서도 저술을 계속하여 마침내 <사기>를 완성한 불세출의 역사가가 되었다.


*중국유일 唐나라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여자로 태어나서 하고픈 일을 못한다고 얼고만 있지 말라!

나는 아버지 무사확의 후처소생 둘째딸로 태어나 갓 14살때 최말단

후궁이 되어 당태종 이세민을 가무로써 섬겼다.

황궁생활초기 나의 경쟁자는 여자였으나

비구니로 물러앉았다가 태종의 아들 고종의 총애를 받으며

황궁으로 돌아와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생산하며 황후가 된 후부터

나는 남자들과 힘겨운 전쟁을 시작했다.

장손 무기를 내쳤고 상관의를 처형하였으며 심지어

나의 4명의 아들마저 차례로 버렸다.

내 나이 67살..

여자든 남자든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철옹성을 만들고나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女皇帝)가 되어 15년간 천하를 다스렸다.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朱元璋)

집안배경이 나빠서 요모양 요꼴이 되었다고 변명하지 말라!

나는 오랑캐의 나라 원대말기 안휘성의 빈농 한족집안에서

태어나 17살에 고아가 되어 탁발승으로서 가뭄과 기근에 찌든

험악한 세상과 맞서야 했고 전란통에 비적 무리의

일개 졸개가 되었을때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이가 없었다.

그후 혁혁한 전과를 올린 공으로 반란군의 2인자가 되어

원나라 몽골군을 중원에서 몰아낸 후에도

양반 사대부집안의 멸시와 견제속에서 시달려야했다.

나는 송곳하나 꼿을 땅이 없었던 빈농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고아가 되었을때 조차 부모를 원망하지 않았으며

결국 몽골오랑캐를 몰아내고 한족(漢族)천하를 회복한

명나라의 초대 창업 황제가 되었다.


*청나라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

나이가 어리다고 어미의 치마폭 뒤에 숨어 칭얼거리지 말라!

나는 8살때 황제가 되었고 13살때 결혼을 했으며

14살 때 부터 스스로 친정(親政)을 시작했다.

응석을 부릴 겨를도 없이 오삼계,상가희,경계무의 삼번난(三藩亂)을 제압하고

몽고를 평정했으며 티베트까지 원정했다.

나는 어린 나이의 어리광도 모른채

군주가 되어 61년간 천하를 호령할 수 있었다.


*청대말 거상 호설암(胡雪巖)

돈이 없어서 재기할 수 없다고 낙담하지 말라!

나는 미천한 집안에 태어나 아버지가 일찍 죽는 바람에 학업도 못마치고

전장(錢庄)에 들어가 똥오줌을 치우고 마루를 닦으며

잔심부름으로 어린시절을 보냈다.

빈손으로 사업을 일으켰고 다시 빈털털이되는 과정을 겪고 또 겪었지만

내가 살아있는 한 아무리 빈손이라도 언제든지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한푼도 가진게 없는 가운데도 스스로의 재기를 믿었고

내게 없는 것을 메꾸어주는 인재를 대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았다.

큰 상인이 되는데 돈 보다는 사람이 더욱 소중함을 일찍이 깨달았던 나는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장사의 신 "상성(商聖)"이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총리 주은래(周恩來)

만년 2인자라고 보스자리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지 말라!

나는 1935년 준의회의에서 모택동을 모시고 만리장정을 따라나선 때부터

죽는 그날까지 41년동안 2인자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공산당초기 탑리더의 코스를 밟던 내가 가난한 농부의 아들

모택동을 중국혁명의 지도자로 추천하고 스스로를 낮췄던 것은 인민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그에게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총리시절 행정보고를 함에 모주석의 침상옆에 꿇어 앉아야했고 방광암수술을

받고싶어도 毛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수술을 2년간이나 미루어야했다.

방광암으로 죽어가는 초읽기의 시간속에서도 미.일과의 수교, 문화대혁명의 폐허속에

놓인 국가경제재건, 등소평을 재신임하는 권력의 재편성을 위해 촌음을 다투었다.

나는 사망하는 순간에도 "다 죽어가는 나 따위는 돌보지말고 다른 아픈 동지들을

돌보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며 인민의 마음속에서 영원한 1인자,

인민의 벗으로 다시 태어났다.

년 권력투쟁끝에 최고실권을 장악했다.

나는 세번 쓰러지고 네번 일어난 역전의 용사로서 마지막 정치적 위기였던

천안문사태의 시련을 견뎌내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오뚜기 부도옹(不到翁)’

개혁개방의 총설계사가 되었다.

 

 

 

용기와 희망을 잃지 말고 이겨나갑시다.

인생의 참의미는 목적을 달성함에 있지않고 시련을 이겨나가는데 있다 합니다.

반응형

'명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채근담(菜根譚)의 명언  (0) 2020.12.09
Don't give up.  (0) 2020.12.09
자기긍정의 50가지 법칙  (0) 2020.12.09
말의 위대한 힘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0) 2020.12.09
뇌의 메카니즘을 깨달으라  (0) 2020.12.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