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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anini Sonata Op.3 No.6

 

 

 

 

니콜로 파가니니, Niccolo Paganini (27 October 1782 – 27 May 1840)

                                              

 

이탈리아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으며,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그뒤로 지방의 오페라극장 지휘자이며 바이올린 연주자 죠반니 세르베토(Giovanni Servetto)에게, 그다음에는 유명한 산로렌초 성당의 악장 자코모 코스타(Giacomo Costa)에게 지도를 받았다.

그는 9세인 1791년에 첫 바이올린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그후 파르마에서 알레산드로 롤라(Alessandro Rolla)와 가스파레 기레티(Gasparo Ghiretti)에게 배웠다.

그리고 13세 때인 1795년에는 다시 A.롤라에게 바이올린을, 기레티에게 작곡을 배우면서 그는 그 무렵부터 연주여행과 초인적인 기교를 발휘하기 위한 난곡(難曲)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797년 아버지와 동행하여 롬바르디아 순회연주를 했는데, 연주회가 거듭될수록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곧 아버지로부터 독립했으나 도박과 연애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한 번은 빚 때문에 바이올린을 저당잡히기까지 했고 그 소식을 듣고 그에게 '구아르네리 바이올린'을 빌려준 프랑스의 상인 덕택에 겨우 연주회를 가질 수 있었는데, 그 상인은 그의 연주를 듣고 그 바이올린을 파가니니에게 주었다.

1799년 루카에서 연주회를 열어 대성공을 거둔 후, 북부 이탈리아 각지를 돌며 화려한 연주생활에 들어갔다.

1801∼1804년 어느 귀부인과의 동거생활로 연주활동에서 떠나 어렸을 때 배운 기타에 열중하였다가 1801~07년 그는 새로운 특징이 돋보이는 기교를 선보인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24곡의 카프리치오>,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6곡의 <소나타 작품 2>, <작품 3>을 썼다.

 

어려서 인기를 한몸에 받는 우상이었던 그는 명인들이 지니는 낭만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으며 바이올린 연주 기교에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1805년에는 연주활동을 재개, 다시 이탈리아로 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나폴레옹의 누이 엘리자 보나파르트 바치오키의 추천을 받아 피옴비노의 음악감독으로 선출되었다.

1813년에는 이탈리아 여러 지방을 돌며 자신이 작곡한 곡들만으로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밀라노에서 한 시즌에 36회나 연주회를 열었었다.

1815년에는 베네치아로 옮겨 그 곳의 무용가이자 여가수 안토니아 비안키를 만나 두 사람 사이에 남자 아이가 태어났으나 그들은 2년 후에 헤어졌다.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졌으나 그의 명예욕과 활동력은 건강과는 반비례적으로 불타올라, 1823년에는 빈을 방문하여 이른바 파가니니 선풍을 일으켰다.

이 선풍은 다시 프라하, 드레스덴, 베를린을 휩쓸고, 1828년 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831년 파리와 런던을 비롯 영국 각지에서의 공연도 대성공이었다.

이 여행에서 파가니니는 거만의 부(富)와 연주사상 공전의 명성을 얻은 후, 1832년에 가진 영국과 스코틀랜드 순회연주로 부자가 되었으며 그해에 제노바로 돌아왔다.

1833년 파리에 정착해 베를리오즈에게 교향곡 <이탈리아의 아롤드, Harold en Italie>를 쓰도록 의뢰했으나 그는 이 곡의 비올라 독주 부분이 그리 훌륭하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연주하지 않았다.

그가 투자했던 도박장 "카지노 파가니니"가 실패하자 1839년 마르세유로, 나중에는 니스로 옮겨갔다.

 

파가니니는 고난이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유명해졌지만, 일각에서는 진지한 음악이 아니라 경박한 잔재주를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비난도 받았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하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는가 하면, 현을 한두 개만 걸고 연주하고,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는 등, 그의 놀라운 실력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실로 무궁무진하다.

처음에는 그의 어마어마한 명성을 반신반의하던 관객들조차도 한두 곡만 듣고 나면 모조리 그의 팬이 되어 열광할 정도였다.

 

그러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많은 재산을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급격히 건강이 악화되어 1840년 인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기의 연주법을 비밀에 붙이고 제자도 까밀로 시보리(Camillo Sivori) 단 한 사람 뿐이었으며, 많은 명바이올린 연주자들처럼 유파(流派)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법은 현재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

 

파가니니의 낭만적인 성격과 모험심은 그가 살던 시대에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인물에 얽힌 전설을 만들어 낼 정도였다.

그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다거나 살인죄로 감옥에 갔다 나왔다는 등 소문이 무성했으므로 그가 죽은 뒤에도 정식으로 묘소에 묻히기까지 5년간이나 세월이 흘렀다.

그는 오랫동안 욕심쟁이 수전노로 여겨져왔으나, 그에게 의존적이며 그의 너그러움을 이용해 끊임없이 도움을 요구하던 추종자들로부터 벗어나고자 애썼던 그의 열망을 헤아려본다면 그를 좀더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작곡가 베를리오즈에게 그가 2만 프랑을 선사했던 것은 별 특징도 없는 관대함으로 볼 수도 있지만, 아마도 파가니니는 '베토벤의 후계자' 베를리오즈의 가치있는 재능을 인식하고 그 작곡가를 도와주는 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주로 카프리치오, 바이올린 협주곡, 일련의 변주곡 등에 바탕을 둔 그의 바이올린 기법은 운지법과 심지어 조율에서조차 새로운 피치카토 효과와 화성을 폭넓게 사용했으며 눈부실 정도의 즉흥 연주를 보여주었다.

또한 1~2개의 바이올린 현을 끊어버리고 나머지 현 위에서 작품을 계속 연주하는 것 같은 재주를 부렸던 훌륭한 연주가이기도 했다.

그가 혁신적으로 바꾸어놓은 바이올린 기법은 후대 거장들, 특히 파블로 사라사테와 외젠 이자이 등이 모방했다.

그밖의 작품들로는 제1곡인 <D장조 협주곡>이 특히 인기를 모았던 바이올린 협주곡 6곡, 바이올린과 기타를 위한 소나타 12곡, 바이올린·비올라·첼로·기타를 위한 4중주 6곡이 있다.

그가 일으킨 기법상의 영향은 피아노 음악뿐만 아니라 관현악에도 미쳤고 특히 그가 리스트에게 끼친 영향은 막대했다.

카프리치오의 주제들은 리스트·슈만·브람스·라흐마니노프의 작품에도 영감을 주었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야박한 데가 있다.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났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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