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昇和 대장을 물고문한 보안사 수사관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가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鄭昇和
1979년 12.12 군사반란 . 당시 계엄사령관 鄭昇和 대장은 全斗煥 국군보안사령관이 보낸 연행팀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끌려가 물고문을 받았다고 증언하였다. '12.12 사건-정승화는 말한다'(1987년, 까치)라는 회고록에 실린 自述 부분을 소개한다.
*물고문을 당하다
보안사령부 분실에 끌려오게 된 다음날인 12월 13일 아침 7시 30분쯤, 병사로 보이는 사복차림의 청년이 오그라진 알미늄 食器 둘에 각각 담은 국과 밥을 알미늄 쟁반에 받쳐 가져와서는 내가 조사받던 책상 위에 놓고 갔다. 조사반 중 한 반원이 나더러 아침식사이니 먹으라는 것이다. 나는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수저를 들어 조금 먹곤 쟁반을 물렸다.
오전 8시경이나 되었을 무렵에 건장한 두 사내가 들어오더니 ‘빨리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쪽에서 나의 손목을 각각 잡고 꼼짝 못하게 하여 데리고 나갔다.
내가 갇혀 있던 건물 옆에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다. 2층으로 끌고 가더니 어느 방에 들어가는데 그 방이 보기에 고문하는 방인가 싶었다. 그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긴 鐵製의자에 앉히더니 거기에다가 비끄러매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놈들이 나를 고문하려는 구나 직감하면서 주위에 있는 5~6명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날 고문을 할 모양인데 내가 육군 대장으로서 너희들에게 고문당할 수는 없다. 고문을 당하기 전에 내 예비역 편입원을 써놓고 당해도 당해야겠다.”
그중 한 명이 “그런 것 안 써도 이미 예편되었으며 참모총장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두 명이 나를 의자에 비끄러매어 머리를 뒤로 잡아 제치고 여러 명이 소리를 꽥꽥 지르고 위협을 하며 분위기부터 살벌하게 만들더니 곡괭이 자루인 듯한 몽둥이로 내 허벅지 위를 치고, 정강이를 치고, 목뒤를 치기도 하며, 마치 미쳐 날뛰는 것처럼, 서로가 격려라도 하는 것처럼, 신명이 난 듯 교대로 치며 무조건 나더러 “바른 대로 말해, 이 자식, 김재규하고 공모했지. 다 알고 있는데 이 자식 거짓말해야 소용없어”하며 마구 날뛰었다.
그러한 고문은 견딜 수 있었으나 머리를 젖히고 얼굴에 물수건을 씌운 다음 주전자 물을 계속 얼굴 위에다가 들이붓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숨을 코로 쉴 수 없어 입으로 쉬니 물이 목구멍을 막아 물을 먹는 순간 그때마다 약간씩 숨을 쉬게 되어 한참 당하니 정신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 때 죽어야 했을 것을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가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때도 건강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 이들의 無知한 고문은 결국 나의 생명을 끊게 되겠구나 하고 체념했던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난 게 후회스러웠다
그들은 얼마 동안 물고문을 하더니 중지하였다. 나는 그래도 의식이 남아 있어서 고문을 그만두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나를 고문 의자에서 풀더니 발가벗기고 알몸에 낡은 전투복을 입힌 뒤 끌어다가 처음 신문받던 받침대에 눕혀놓았다. 나는 다시 얼마동안 정신을 잃었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가 한숨 자고 깨어났다. 온 몸이 쑤시고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꾹 참고 견디었다.
아마 밤이 다시 돌아와 깊은 암흑 속 같은데 누군가가 다시 잠이 든 나를 깨운 뒤 일으켜 세우더니 다시 신문 의자에 앉히려고 했다. 나는 아득한 현기증을 느꼈다. 한참 동안 어지러워 몸의 균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의 이런 상태를 살핀 그들은 나를 다시 침대에다가 가져다두었다. 자는 둥 마는 둥 밤을 새우고 나니 다음날은 억지로 일어나게 하였다. 어쩔 수 없어 침대에서 간신히 일어나 앉으니 어지럽고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운 것은 여전하였지만 그래도 온 몸이 쑤시는 것은 좀 덜하였다. 몸에는 시퍼렇게 멍든 곳이 곳곳에 있었다. 얼굴도 눈두덩을 포함하여 군데군데 멍이 든 것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앉아 한참 동안 마음을 다잡아 진정을 하고 나니 가까스로 균형을 잡고 앉을 수가 있게 되었다. 어지러워 균형을 잡기 힘든 것은 약 1주일간 계속 되어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무엇이든지 붙잡고 진정을 한 다음에야 일어설 수가 있었다.
조사관들은 또다시 10월 26일 저녁 김재규와의 공모관계를 실토하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10월 26일 오후 5시경 김재규로부터 전혀 다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채 김재규가 오라는 곳으로 간 사실부터 자세히 다시 설명했다. 어쩔 수 없었던지 그들은 일단 나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 조서를 작성하였다.
조사가 끝나면 다음날 어디에 보고하여 다시 지시를 받는지 지금까지의 나의 진술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하며 또 다시 조서작성을 시작했다. 그러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하였다. 조사반의 주장은 내가 김재규와 형·동생하는 사이인 데다가 김재규가 그러한 거사를 하는 데 나와 아무런 협의가 없었을 리가 없었다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조사관들은 위로부터 지시를 받고는 김재규가 실토를 하였다느니 증거가 확보되었다느니 하면서 共謨사실을 시인하라고 윽박지르기도 여러 차례 했다.
나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느냐. 나도 모르는 공모사실을 어떻게 시인하라는 말인가’하고 계속 부인했다. 그들은 날 보고 ‘육군 내에서도 소문난 명석한 두뇌를 가진 자라 거짓말도 잘 꾸며 댄다’면서 갖은 협박과 억지를 쓰며 나를 김재규의 공모자로 만들려고 혈안이 되었다.
처음에는 막연히 김재규와의 共謨관계를 실토하라고 추궁했으나 나중에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김재규로부터 擧事에 협력하도록 巨金을 받았다고 했다. 게다가 김재규가 나와의 事前협의를 실토하였다고 하다가는 끝내는 김재규가 체포된 후에도 내가 김재규 일당의 재판을 적당히 하여 김재규를 살려주려고 한 것이 분명하다고 억지를 썼다. 그들은 또 내가 金桂元 실장을 무죄로 하려고 했다느니, 당시 경호실차장이던 李在田 장군을 불기소 처리한 것은 朴대통령 시해에 관련된 重罪人인 줄 알면서 고의로 석방한 것이라느니, 또 이후락 씨의 해외여행을 승인한 것은 큰돈을 받고 해준 것이라느니, 참으로 저희들 마음대로 온갖 누명을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신문을 계속했다.
상식 이하의 주장과 이성을 잃은 행위를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이 며칠 동안 내가 태어나고 내가 평생을 바쳐 봉사한 내 나라가, 특히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정열을 쏟아왔으며 믿고 사랑하던 우리 육군이 나에게 이러한 못된 짓을 가하고 터무니없는 거짓을 조작하여 뒤집어씌우는가 생각하니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육군에 대한 사랑과 기대가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르며 이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오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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