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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개항

1853년 7월 8일

이제 막 강대국의 위치에 접어들었던 미국은
함선 4척을 이끌고 도쿄의 요코스카항에 도착했다.


미 해군의 페리제독은 본국으로부터
태평양 항로의 개척과
식민지 개척에 대한 명령을 하달 받았다.

사신
"여기 왜 왔음?"

페리 제독
"항구 개방하고
우리랑 통상거래 하자능!"

사신
"누구 맘대로?"

그러자 페리제독은 엄포를 놓았다.

페리 제독
"아놔, 세상 물정 이렇게도 몰라서야.
요즘 우리 소식 못들었나?
이거 함 봐주겠음?"

당시 페리 제독이 끌고온 증기 기관선은
일본인들이 보기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괴물과도 같았다.


엄청난 위력의 대포도 보여줬다.

협상하러 온 일본 사신들은 크게 기가 죽었다.

사신
"자..잠깐만 기다려봐. 물어보고 올게."

그리고 이때 일본인들은
과연 무슨 선택을 했을까?

① YES
② NO



사실 일본은 200여 년동안
문을 걸어 닫고 쇄국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지만..

외부 세계에 대해
전혀 무지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일하게 대외소통으로 쓰일 수 있었던 창구인
나가사키를 통해서
네덜란드와 꾸준히 거래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중국도 마카오를 통해 서양과 교류하고 있었다.

맞다!
17~18세기 조선만 우물 안 개구리였던 것이다.


때문에 17~18세기 일본의 지식 계층 사이에는
네덜란드어를 구사하고

유럽의 천문학과 지리학,
의학에 능통한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 당시 일본인들이 알고 있던 세계

또한 13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 군함에게 탈탈 털린 청나라 소식도 익히 알고 있었다.



"서양의 힘은 상상한 것보다 훨씬 크구나!"


"그러게. 천하의 중국을 이기다니!"

그런 두려움이 가중되던 시기에
페리 제독의 군함이 떡하니, 일본에 타나난 것이었다.

곧 막부에서는 뜨거운 논쟁이 일어났다.


문호개방을 할 것이냐?
전쟁을 할 것이냐?



이런 논쟁이 오갔지만
결국 일본은 실리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전쟁으로 서양을 이기기란 무리데스."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페리제독 일행을 환영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신이 난 페리제독은
자신이 가지고 온 문명의 이기들을 마음껏 자랑했다.

시계, 망원경, 기계 등을 보여주며
미국의 공업혁명이 이뤄낸 성과들을 뽐냈다.


그 중에 소형 증기기관차 모형을 보여줬는데..
이게 가장 효과가 컸다.


"거참, 신기하구만.."


"어떻게 혼자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구경하던 일본 관리들은 신기해 하는 한편,


자신들이 사는 세상과
바다 건너 저편의 미국과의 거리차를 뚜렷하게 실감하게 됐다.


●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 시부사와 에이이치

일본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바깥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청년은
유럽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시부사와 에이이치

1867년 27살의 시부사와는 일본 대표단의 일원으로
프랑스 파리 만국 박람회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당시 만국 박람회는
첨단 문물들을 전시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국가간에는 치열한 산업화 경쟁의 장이었다.


바로 그런 곳이었으니,
아시아 변방에서 온 일본인들은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에
입을 다물줄을 몰랐다.


"소오름이.."

크게 놀란 시부사와는 파리에 남아
좀 더 서구 문물을 살펴보기로 결심을 한다.

그러다가 벨기에를 방문했는데..

여기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가
그를 친히 접견했다.

레오폴드 2세
"니들도 근대화 하고 싶지?"

시부사와
"당연한 말씀을.."

레오폴드 2세
"그렇다면 철강부터 있어야함.
철강이야 말로 근대화의 초석이거든."

시부사와
"아!"

레오폴드 2세
"그렇담 어찌하냐?
우리 벨기에산 철강을 구매하라고.
가격 대비 품질 짱임!"

순간 시부사와는 할 말을 잃었다.

시부사와
'세상에 국왕이 외국 손님을 접견하는 자리에
친히 비즈니스를 하다니..'

너무도 낯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시부사와
'상업을 중시하는 마인드!
이게 바로 오늘날 유럽을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어준거임."

사실 시부사와는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공부하며
공자의 말씀을 진리로 여겼던 유학자였다.

하지만 유럽을 견학하면서
그의 고정관념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868년 11월 시부사와 에이치는
새로운 생각을 품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 존왕양이 운동 : 천황을 숭상하고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

하지만 강압적인 개항은
일본 정부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드러냈다.

당시까지 일본은
700년간 동안 막부라는 군사정권이 다스리던 나라였다.

그런데 미국과 개항을 하면서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던게 화근이었다.


사무라이1
"미국의 요구를 무조건 받아들이다니!"

사무라이2
"일본은 자존심도 없는가?"

때문에 (하급)무사들은 불만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불만은
곧 막부 정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무사들은 왕정복고를 내세우면서
막부를 쓰러뜨리게 된다.


그리하여 천황의 통치하에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1868년 메이지 정권이었다.

이때 메이지 천황은 16세의 나이에
일본의 최고 지도자가 됐다.


하지만 어린 천황 앞에 놓여진 것은
탐욕스런 서구 열강들이었다.

미국에게 문호를 개방 이후
소문을 듣고, 서구의 여러 나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과 프랑스 등과
차례대로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후 일본은
여느 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열강이 판매한 물건들의 시장이 됐고
저가의 원료 공급지로 전락하게 됐다.


항구를 개방한지 겨우 반년 만에
100만냥에 달하는 일본의 금화가 유출되기도 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는 오히려 불황에 시달렸고
국민들의 원성은 높아만 갔다.


일본인들이 만든 물건은
애초에 서양의 공산품과는 경쟁이 안 됐고

대신 일본의 막대한 자원들은
서양인들에게 헐값으로 수탈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물가가 올랐다.


"요즘 왜 이렇게 물가가 높은가?"


"서양 오랑캐들이 차, 쌀, 원료 등을
닥치는대로 쓸어가니깐 그렇지."

여기까지만 보면
일본이 다른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와도 같아 보였다.


● 메이지유신 : 일본 근대화의 출발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젊은 천황을 맞이한 일본은
위기의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것이다.

1868년 4월 15일
메이지 천황은 개혁의 서문을 발표했다.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① 봉건제도 철폐, 근대적 중앙집권국가 출범



② 신분제도 철폐



③ 자유 보장



④ 의무교육과 징병제



⑤ 성씨 사용




일련의 것들은
부국강병을 위한 기본방침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메이지 유신 체제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을 발표할 시점,
때마침 시부사와가 유럽에서 돌아왔다.
시부사와

일본 정부가 그를 간절히 필요로 했음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정부에서 재정을 맡게되는데,

그로인해 일본은
대대적인 화폐 개혁, 공채 발행 등을 단행하게 된다.


"왜 가장 먼저
화폐 개혁과 공채 발행부터 했던거임?"


"사업을 하려면
일단 돈이 필요하잖아.

그래서 화폐를 개혁해서 돈을 찍고
공채발행을 해서 민간으로부터 돈을 빌렸던 거임."


● 이와쿠라 사절단 : 독일의 근대화에서 해법을 찾다

1871년 100명이 넘는 사절단이
요코하마를 출발하여 구미 각국으로 떠났다.

사절단 중 49명은 메이지정부의 고관들이었는데
이는 정부 관료 중 무려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다.


당시 일본이 얼마나 서구 문명 배우기에
혈안이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들 가서, 많이들 배워오라고!"

수립된 지 3년 밖에 되지않은 메이지 정부는

이 대규모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그 해 재정수입의 2%라는 큰 돈을 지원했을 정도다.


이후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구미의 12개 국가를 시찰하고

100여권에 달하는 시찰실록을 작성했다.



"정부의 아낌 없는 지원,
고위정부 관료들의 참여,

충분한 기간동안 이뤄진
시찰단의 대대적인 외국 방문은

가히 세계 역사적으로도
전례 없는 사건이었어."


"아! 일본은 그만큼 절실했구나.."

그런데 그 시점에서 조선은
서양을 철저히 배척하겠다며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고 있었으니(1871년)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대규모 사절단은
미국을 거쳐 유럽을 순방했고

관료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 이와쿠라 사절단

그리고 이렇게 표현했다.

오쿠보
"우리는 서양의 발달된 모습에 일단 놀란다.
그리고 심취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다짐한다.
미친듯이 배워서
꼭 그런 수준에 도달하겠노라고!"

그런데 일본 사절단은 여러 서구 세계 중에서
독일에서 본인들의 성장 모델을 찾아낸듯 하다.


독일을 통합한 피와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첫 부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비스마르크
"오늘날 세계 각국은
겉으로는 예의를 지켜가며 상호거래를 중시하지만
그것은 사실 겉치레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약자를 무시하고
약탈하려는 속셈을 잊어서는 안된다능."

그 말에 일본인들은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러면서 비스마르크의
정부 주도식 공업 발전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후발주자가 선진국을 따라잡으려면
민간에 맡겨서는 세월아 네월아임."


"그러게 요즘 독일 좀 보라고.
유럽에서 가장 성장 속도가 빠르잖아."

1,300여년간 중국을 모방하던 일본인들은
드디어 새로운 스승을 찾아낸 것이었다.


● 식산흥업 정책 :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발전시키다

귀국 후 일본 관료들은 단단히 서양뽕,
그중에서도 독일뽕을 먹게된다.

특히 사절단의 단장이었던 오쿠보 토시미치는
스스로를 동방의 비스마르크라 불렀을 정도다.

오쿠보
"두고봐라. 일본을 제2의 독일로 만들테니.."

오쿠보는 곧 내무부 장관으로 승진하게 되었고
근대화 프로젝트를 핵심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가장 먼저, 그가 설립한 것은 면방적 공장이었다.


"기계는 프랑스에서 사오고
설비기사도 프랑스에서 데려 왔지."


"그런데 공장에서 일할
노동자를 찾기가 힘들었어."


"왜?"


"당시 일본은 요란한 굉음을 울리는 공장의 기계가
사람의 영혼을 빼앗는 요물로 생각했거든."


"아! 미신은 어느 나라나 있었구나."

그래서 정부는 국민들의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이런 꼼수를 쓰게되는데..

바로 정부 고관들의 딸들을
공장의 여공으로 취직시키는 것이었다.



"헐! 고관의 딸이 공순이라니?"


"당시에는 인식이 달랐어.

서양의 기계를 다룰줄 아는 숙련된 여공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전문직종자였거든."


"그리고 이들 여공들은
전국 각지로 파견되어 기술을 전파했지."

때문에 일본의 면방적은
최초로 국제 시장에서 경쟁을 갖춘 일본 상품이 되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다른 기계도 하나씩 사오게 되었다.

오쿠보
"광산에는 독일 기계를 들여오고,
군수공장에는 영국 기계를 들여오는거야."

한편 메이지 정부는
민간기업에게도 사업 기회를 열어줬다.


오쿠보
"시작은 정부가 하지만,
성장은 민간기업이 하도록 맡기는게 바람직함."

하지만 여기에는 이런 꿍꿍이도 있었다.

오쿠보
"대신 정부의 특혜로 성장한 민간기업들은
정부가 하는 일에도 잘 협조하겠지."

결국 민간기업을 성장시키는데에는
'정경유착'이라는 속셈도 깔렸던 것이다.

당시 이렇게 만들어진 민간기업으로는
대표적으로 미쓰비시, 미쓰이, 쓰미토모를 꼽을 수 있다.



● 또 다른 성공 비결 : 토지개혁과 농촌 실업자

메이지유신은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무엇보다 돈이 많이 필요했고,
또 일할 노동자들이 필요했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자발적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다면

민간이 다 알아서 하는거니깐
정부가 굳이 나서서 할 필요는 없었음."


"그런데?"


"일본은 그게 불가능하잖아.

농사만 짓고 살던 사람들이
어느 세월에 스스로 깨닫고 산업혁명을 이뤄내겠어?"


"아!"


"그래서 일본은 공장도 정부가 만들고
노동자들도 정부가 끌어들여야만 했어."


"그렇구나."

그렇다면 일본은 어떤 식으로
근대화에 필요한
재정과 노동력을 확보하게 되었단 말인가?

먼저 일본은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게 된다. (토지개혁)


"어? 일본은 원래 토지 사유화가 없었어?"


"전통시대 모든 농경국가에서
토지 사유화는 원천적으로 지켜지기 어려웠어."


"어째서?"


"전통시대 농경국가들은
어떤 것으로 재정을 확충했지?"


"그야, 농민들의 수확물로.."


"그렇지.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땅이라는 이유로 농사를 짓지 않아봐.
그러면 어떻게 됨?"


"국가는 세금을 걷지 못해 손해를 보게되나?"


"맞았어. 그래서 농경국가에서는
아무리 자기 땅이라고 해도
함부로 용도를 변경할 수가 없었어."


"아!"


"그래서 전통시대에는 토지의 사유화가
제대로 지켜질 수 없었다는 얘기임."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농경국가에서 산업국가로 탈바꿈하려 했기 때문에

토지의 사유화를
대대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때문에 곡물 수확량에
비례해서 거둬들였던 세금을

토지가에 비례해서
세금을 걷는 방식으로 바꾸게 된다. (☞지조개정)

그러면서 세율은 팍팍 올렸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세율을 높이면 국가 재정에 도움이 됨.
그러면서 농민이 몰락해.

그런데 농촌에서 농민이 몰락해야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올꺼 아님?"


"아! 그렇구나."

그리고 이런 예상은 맞아 떨어져서

일본의 영세 농민들은 곧 세금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지주에게 땅을 처분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지주들에게 땅은 더욱 집중되었기 때문에
지주들을 통해 ☞규모의 경제는
보다 쉽게 창출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농민들은 대량 실업자가 되어
곧 '값싼' 임금의 노동자로 활용되어질 준비를 하게되었다.


"이런걸 보면 근대화는
노동자의 피와 눈물로 이뤄질 수 밖에 없는듯."


"통과의례야.
성장이 없으면 분배도 없어!"


● 부작용 : 보수파들의 반격

하지만 지나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1878년 5월 18일 근대화를 주도했던
내무장관 오쿠보가 암살 당한 것이다.
오쿠보

매이지 유신이 일어난지 11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서구적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사실 그동안 정부의 관료들은
지나치게 전통을 무시하고

서구식 일변도로만
개혁을 주도한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정치인들은
공업발전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만을
성급하게 얻어내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심지어 이런 주장까지 있었다.


"영어를 모국어로 삼아야 함."

"서양인과 결혼하여 인종을 개량해야 한다능."

이 모든 것은 서양식만 진리고
전통문명은 철저히 부정하는데서 나타난 결과들이었다.

그러면서 개혁은
불공평하게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에

빈부격차와 사회적 모순은
점차 심화되고 있었다.


특히 1881년 일본 정부는

투자액의 1/30에도 미치지 못하는 헐값에
정부의 사업을 민간에게 팔아넘기고 말았다.


"국민의 혈세로 기업을 세우더니
그걸 관리와 기업가가 결탁해서 헐값에 넘겨?"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폭동 직전까지 상황은 치달았다.

결국 천황이 직접 나서서
부패한 관리들을 파면하고 나서야, 사태는 수습될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 전통스포츠인 스모를 금지했었다.



"반나체 상태로 상대선수와 힘을 겨루는 모습은
야만적이고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민심이 악화됐다.


"우리에게 이젠 스모 경기도 보지 말라고 하네!"


"대체 누굴 위해서 개혁을 하는거임?
서양 오랑캐한테 잘 보이려고?"

역시나 폭동 직전까지 상황은 치달았다.

때문에 천황은
급하게 상황을 추스릴 수 밖에 없었으니..

직접 도쿄에서 스모 대회를 주최하고
대회에 참석해, 스모 폐지정책을 철회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일련의 사건으로

정치인들은 개혁의 발전방향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 신 헌법의 발표 : 군국주의의 씨앗

19세기 말, 일본에는 개혁과 전통이 충돌한 결과
사회적 모순이 곳곳에 만연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의무교육을 받으면서
머리가 커진 국민들은
곧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로는 대대적인 시민운동도 발생했다.


그러자 메이지정부는
헌법 제정과 국회 설립의 필요성을 느끼게된다.

이토 히로부미
"아놔, 법과 정당이 필요함.
그렇지 않으면 정권이 통째로 무너질지도 모름."

일련의 개혁은 오쿠보의 후임인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추진되게 된다.

그는 헌법을 제정하여 입헌주의를 만들게 했다.

이토 히로부미
"무조건 서구식만 수용하지 말고
헌법에 일본의 전통사상도 반영하자능."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법이었는데
만들고 보니, 꽤나 이상해졌다.


민권을 보호한다는 헌법에
천황의 절대적 권력을 강조한 조항이 추가된 것이다.


"읭?"


"전통적으로 일본인들은 천황을 신처럼 모셨어.
그러니 어쩔 수 없었던거임."

이런 생각은 근대화에 앞장섰던
정치인들 또한 공감하던 부분이었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는
이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이토 히로부미

헌법이 발표되자

천황의 존재는 신처럼 신성하게 되었으며,
천황에게는 군 통솔권과
대외전쟁 선포권 등 모든 대권이 쥐어지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은
겉으로는 다수의 당이 존재하는 다당제였지만

실제로는 천황제라는
일당 통치가 되어버렸다.


"이런 법을 제정했으니
장차 일본이 군국주의로 빠지게 된거였음."


"왜"?"


"보라고. 천황에게 절대권력이 쥐어줬으니,
천황만 잘 꼬시면
일본의 야심가들은 뭔 짓이든 할 수가 있었어."


"어떻게?"


"천황의 뜻이라고만 하면
대외 확장이든, 정치 탄압이든, 전쟁이든

아무런 반대 없이
일사천리로 강행할 수 있게 되거든."

하지만 이런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헌법이 공표되자

일본은 다시 안정을 찾고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극단적인 서구화는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때문에 일본 사회에는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양복의 유행과 동시에
기모노는 가장 아름다운 예복으로 남겨졌고


서양식 술집이 많아졌지만
차를 음미하는 일본식 다식은 여전히 유행하게 되었다.

서구의 팝송과 재즈가 불리기 시작했지만
가부키는 여전히 대중적으로 인정받았고


화려한 서양의 유화가
일본인들의 시각을 끌어당길때

일본의 풍속화는
세계의 회화의 한 장르로 자리잡고 있었다.



● 근대화의 지름길 : 탈아론

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정부 통제에 의한 발전 방식을 꾀했고

무엇보다 공업화를 통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하여 빠르게 결실을 보게 되었다.

1910년 당시 일본 남성의 95% 이상,
여성의 90% 이상이 고등교육을 받았다.

일본과 영국의 철도노선의 총 길이 차이는
메이지 유신 초기 때 1,000배에서
40년만에 4배로 줄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서양의 공업강국과 비교하자면
일본은 낙후되었고 뒤쳐져 있었다.


▲ 1890년 1인당 GDP (2010년 달러가치 기준 : 매디슨 논문)

때문에 일본인들의 조바심은 상당했다.

어떻게 하면 가장 빠른 방법으로
유럽의 강국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당시 일본인들은 그 지름길을 찾고 있었다.


1876년, 메이지유신 8년 후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약탈을 하기 시작했으니,

▲ 운요호 사건 (1875년)

이때가 일본이 미국에 문호를 개방한지
22년째 되던 해였다.

그리고 부국강병이라는 구호아래
가장 우선적으로 군대를 개혁했다.


사실 '강력한 군대'를 가지는 것이
당시 메이지 유신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19세기말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발전을 위한 지름길을 이렇게 제시했다.


▲ '탈아론'을 주장했던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의 화폐 모델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망설이면 안됨.
이웃나라의 성장을 앉아서 구경하면 안됨.

공동으로 아시아를 부흥시키자고?
그러다가 모든 기회를 다 놓침.

우리는 그런 대열에서 빠져나와
서방의 문명국과 그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능."

소위 탈(脫) 아시아론이었다.

당시 서구 열강들은 세력확장을 위해서
서로 치열한 쟁탈전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강대국이 되고 싶었던 일본은

서구 열강의 행동을 고스란히 모방하여
서둘러서 무력쟁탈전에 동참하게 된다.

후쿠자와 유키치
"망설이면 기회도 없음.
서양넘들이 다 쓱싹 해치우거든."

때문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경제가 성장하는만큼
대외확장에도 노력하게 되었다.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수년간 지속해서 대외침략을 지속한 일본은

조선과 중국을 침략해
대량의 자원과 전쟁 배상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중국에 받아낸 배상금만 해도
한 해 정부수입의 4배가 넘었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배상금의 절반 이상을
일본은 해군력을 육성하는데 투여했고

몇차례 전쟁의 승리를 맛보자
일본의 군국주의 야심은 더욱 더 커져갔다.


"원래 뒤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잖아."

결국 그들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서
태평양과 인도양을 독차지하려는
원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으니..

그런 야망은 지속적인 침략전쟁으로 이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 폐허가 된 일본, 어떻게 다시 일어섰나?

하지만 그러다가 쪽났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터진 것.


이로써 세계제패를 꿈꾸던
일본 군국주의의 야망은 끝나게 된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에서부터 80년동안 쌓아왔던
일본의 근대화는
단 한차례의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당시 일본은 가루가 되도록 부서졌기 때문에

승자인 미국은 전후 몇년 동안
사람들이 굶어죽지 않게 하기 위해

일본에 거액의 지원금과
엄청난 양의 쌀을 지원해 줄 수 밖에 없었다.

▲ 전후 일본인

누가 봐도 일본은 끝이 났다.

그러나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일본은 모든 것이 사라진지
겨우 20년만에 경제를 모두 되살려 버렸기 때문이다.

▲ 1960년대 일본

1955년부터 1964년사이에
일본의 연간 성장율은 9%를 유지했다.

그리고 1965년부터 1970년까지의 성장률은
무려 10%를 넘었다.

일본의 기적적인 성장원인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이유가 뭐임?
역시 한국전쟁 빨인가?"

그러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이거다.


"일본은 패전 이후 폐허로 변했지만,

걔네들은 이미 항공기도 만들어봤고
축구장 두개만한 크기의 전함도 만들어봤어."


"그런 과학기술과 인재,
공업화를 통해 얻은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이야."

즉 눈에 보이는 건축물 같은 하드웨어는 사라졌지만
소프트웨어는 남아있었고

그것이 전후 일본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이었다.


참고 문헌 : 경제사 오디세이(최영순), 대국굴기(중국 CCTV), 메이지 이야기(최승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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