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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군의 일본 본토에 대한 첫 폭격은 둘리틀 특공대(Doolittle Raiders)에 의한 공습이였다.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본토가 공습받았다는 충격에 휩싸이긴 했지만,

일본에게 치명적인 것은 아니였다.

 

그 후에도 미군은 중국 내륙의 비행장들을 활용하여 일본을 폭격하긴 했지만, 효과적이진 못했다.


1944년 6월 사이판 전투로 사이판을 미국이 점령하면서 B-29의 작전반경이 일본 본토 전역으로 들어가면서 일본 본토 폭격이 가능해졌다.

(사이판과 괌에서 도쿄까지는 약 2,500km 정도였고, B-29기는 비행거리는 5,000km 였기 때문에 사이판 점령이 일본 공습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미군 공병대는 사이판 점령 불과 1~2개월 만에 사실상 임야나 다름없던 중부 사이판 평원에다가 B-29를 위한 활주로 5~6개 이상과 관제탑, 유류고, 정비창, 막사 등 주요 기반시설을 완비한 초대형 비행장을 건설해내었다. 

 

일본 본토 폭격 초기에는 효과가 미미했다.

일본군 방공전투기가 도달하기도 힘들고, 도달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는 7,000 ~ 9,000m 이상의 고고도에서 폭격을 하다보니 명중률이 낮았다.

게다가 일본 상공에서는 제트기류에 심해서 폭탄의 명중률이 최악이 돼버렸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서 운항하기 위해서는 폭탄 또한 폭장량의 절반 이하 밖에 실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무사시노에 위치한 군수 공장을 폭격할 때는 B-29 약 100여 대가 출격하여 1,000 파운드 폭탄 수천 발을 때려부었는데, 명중률은 2%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미군의 공습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았다.

 

도쿄의 방공화기로 배치된 기관총.

 

일본 시민의 방공 훈련

 

 

로리스 노스태드(Lauris Norstad) 중장은 이를 보다 못해 전략폭격대장(제21폭격기 사령부 사령관)을 헤이우드 핸셀(Haywood S. Hansell) 소장에서 커티스 르메이로 교체했다.

 

이 커티스 르메이 등장은 일본에겐 재앙의 시작이었다.

 

 

 

르메이는 안전하지만 비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주간 고고도 폭격은 집어치우고, 

대공방어가 취약해지는 야간에 B-29를 대량으로 투입해 1,500 ~ 3,000m의 저고도에서 한꺼번에 폭탄을 들이붓는 것으로 전술을 바꿨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일본 가옥은 목조건물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기존에 사용하던 고폭탄 대신에

B-29에 소이탄을 한가득 꽉꽉 채워 보내기로 하였다.

일반적인 작전이라면 2달 동안 쓸 수 있는 소이탄 물량을 5일 안에 퍼붓기로 한 것이었다.

 

 

폭탄 적재 중인 B-29폭격기

 

 

M47 소이탄을 적재한 폭격기

 

사용된 폭탄들

  • M47 소이폭탄(AN-M47A2) - 100파운드(45kg)의 네이팜탄(겔화 휘발유)으로 미군 최초의 소이탄이다.  철제 탄통 안에 젤리 형태로 가공한 기름 약 18kg을 봉입하고 탄두에 화약을 장전했다.   
  • M50 소이탄(AN-M50A2) - 4파운드(1.8kg)의 마그네슘 소이탄으로 영국군의 M2 소이탄을 미국 육군이 제식화한 것으로 알루미늄 분말과 산화 철을 육각형 모양의 통 모양의 금속제 용기에 충전하였다.   직경 5cm, 길이 35cm, 중량 2kg으로 소형 소이탄이었으며, 34발이 수습되었지만 일정 고도에서 산산조각으로 낙하하였다.   원래는 독일의 콘크리트 건물을 파괴할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목조 가옥에 적합했다.
  • M69 소이탄(AN-M69) - 6.2파운드(2.7kg) 네이팜탄.   1942년에 개발된 M56 꼬리 부분 점화식 폭탄의 개량형.   직경 8cm, 길이 50cm에, M50 소이탄과 마찬가지로 육각형의 금속제 용기에 젤리 상태의 네이팜제와 마그네슘이 충전되어 있었지만, 보통 38발이 수습되어 E46-500파운드 수습 폭탄(집속탄)으로서 투하되었다.   일정한 고도에서 산산조각이 났지만 다른 소이탄과의 차이점은 수평 안정판이 없고 대신 1.2m의 스트리머로 불리는 면으로 만든 리본이 낙하할 때 꼬리 부분에서 튀어 나와 자세 안정과 낙하 속도를 조절했다.  일본 가옥의 기와 지붕을 관통시키기 위해서는 격돌 시 속도를 너무 빨리 할 필요가 없었고 스트리머에 의한 감속으로 M50 소이탄의 1/4 속도로 억제됐다.   이 스트리머에 불이 붙어 타면서 낙하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마치 "불의 비"가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육각형의 금속제 용기가 건물의 지붕을 뚫고 나가면, 도화선이 작동해 5초 이내에 TNT 화약이 작렬하고, 그 후에 혼입된 마그네슘 입자에 의해서, 포대에 들어간 네이팜제를 점화해, 그 추력으로 육각형의 금속제 용기를 30미터 날려 반경 27미터의 불의 고리를 만들어 주위를 태워 버렸다.   내부에 들어 있는 젤리 모양의 네이팜제에서, 이 소이탄은 「goop bomb」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소이탄 폭격작전을 예배당 작전(Operation Meetinghouse)이라 이름 붙이고

1945년 3월 9일 사이판과 티니안 섬에서 344기의 B-29 폭격기가 출격했다.

B-29는 조금이라도 폭탄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폭격기 후방 기총을 제외한 모든 방어기총과 탄약을 제거한 후, 최대한 소이탄을 가득 싣었다.

그리고, 기존의 고고도 폭격 대신 5천 피트(약 1.5 km)의 저공에서 폭격기 1대당 7톤씩, 소이탄(네이팜탄) 총 2400여 톤을 도쿄에 떨어뜨리기로 했다. 
도쿄시각으로 3월 9일 밤 10시 30분, NHK방송이 B-29 편대의 도쿄 접근을 알렸다.

적기에 관한 정보는 도쿄 만(灣)으로부터 남쪽으로 오가사와라 군도까지 이어진 일련의 섬에 배치된 감시원들에 의해 잇따라 중계되어 들어왔고, 얼마 후 첫번째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렸다.

그리고, 몇시 간 뒤인 밤 12시 직전, 제 1번기가 동쪽으로부터 저공으로 급히 접근하여 30kg짜리 네이팜탄 뭉치를 풀어놓았다. 그것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지상에서는 화염이 선을 그리며 분출하여 밤하늘을 밝혔다.

제 2번기는 스미다 강(隅田川) 상공에서 제 1번기의 진로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며 소이탄을 투하하였다.

제 1번기와 제 2번기가 교차하며 던진 소이탄으로, 도쿄의 공장, 상점, 소주택이 몰려있는 도쿄의 동북지역에 거대한 불의 X자가 조용히 그려졌다.

그리고 곧 이어 불의 X자를 표지 삼아, 폭격기 280여 대가 폭음을 울리며 3000 m의 고도로 진입해왔다.

도쿄 시민들은 그렇게 낮은 하늘에서 그렇게 많은 B-29의 엔진 폭음과 진동이 울려퍼지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제까지의 공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상황이란 것을 다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날 6시간 동안 300여 대가 넘는 B-29들은

E-46 확산탄 8500발과 M-69 소이탄 자탄 50만 개, 네이팜 소이탄 총 1700톤을 투하했다.

 

도쿄는 불지옥이 되었다.

 

 

 

 

 

 

 

불타는 도쿄

 

 

 

 

 

 

 

 

 

대공습 이후 도쿄 스미다구 료고쿠 주변 (東京都 墨田区 両国)

 

 

 

 

도쿄 대공습 이후 아사쿠사

 

 

입구만 빼고 다 타없어져 버린 일왕의 궁

 

 

 

 

 

 

 

 

 

하지만 이날 도쿄 대공습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이틀 후인 3월 11일엔 나고야와 센다이

 

화염에 휩싸인 나고야

 

 

13일엔 오사카

 

폭격당하는 오사카

 

 

 

16일엔 고베

 

고베 폭격

 

 

19일에는 다시 나고야가 공습의 타겟들이 되었다.

나고야 공습 후 폭격이 잠시 멈췄는데

약 두 달치의 폭탄을 르메이가 10일만에 다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오사카는 일본 최대의 공업거점이었기에 1700여톤의 소이탄이 퍼부어진 오사카는

더 이상 일본제국의 엔진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참고로 이때 오사카성도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또한 미군은 공습에 앞서 공습예고 삐라를 뿌려서

 

어떤 도시들이 폭격을 당할지 친절히 알려주는 패기를 보였다.

 

미군이 공습 전 일본에 살포한 삐라. "공습예고. 이 도시가 미 공군 다음의 공격 목표입니다." 라고 써있다.

 

미 공군은 공습타겟이 될 도시들을 하나하나 삐라에 적어 넣었다.

 

 

어디 어디 도시를 폭격할지 알려주고 그걸 실제로 실천하는 미군의 언행일치에 일본인들은 엄청난 공포에 휩싸였다.

르메이의 이러한 무차별적이고 쉴 틈 없는 폭격으로

폭격이 시작된 3월부터 폭격이 소강상태에 이른 7월까지

약 10만톤의 폭탄을 소비했고

30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26개의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 기습 작전 때에 한 독백이 있다.

"もしかすると、私たちは、眠れる獅子を触ったのではないだろうか?"

(우린 잠자는 거인을 깨운게 아닐까?)

 

맞다.  일본은 잠자는 거인을 깨웠다.

그리고, 처참하게 얻어 맞고, 항복하게 된다.

 

 

 

 

 

 

 

1945년 3월 10일 도쿄대공습 후 일본 최초의 바인 카미야 바(사진위 왼쪽)와 마쓰야 아사쿠사 백화점(사진 위 오른쪽)의 모습과 70년이 지난 2015년 3월 7일 아사쿠사 지구의 카야미 바와 마쓰야 백화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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