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바그너와 히틀러 - 예술과 현실의 ‘게르만 신화’ 

 

'게르만의 신화'  -  바그너의 손에서는 예술이 되고,

히틀러의 손에서는 현실이 된다!

 

 

바그너(Richard Wagner)

 

바그너(Richard Wagner)는 1813년 5월 2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빌헬름 바그너(Carl Friedrich Wilhelm Wagner)와 어머니 요한네 로지네 바그너(Johanne Rosine Wagner, 결혼전 이름: 페츠[Patz])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었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지 정확하게 6개월이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된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당시 알려진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그리고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을 한다. 그래서 바그너의 어린 시절은 예술계에서  활동을 하였던 계부 가이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계부 가이어도 일찍이 1821년 가을에 세상을 떠나게 되며 그 이후 바그너의 가족은 라이프치히에서 드레스덴으로 거처를 옮긴다.

 

바그너는 소년시절에 드레스덴 극장에서 연주되었던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보고 감명을 받으며, 특히 바그너 자신도 한번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바그너는 벌써 13살나이로 호프만(E.T.A. Hoffmann)과 섹스피어(W. Shakespeare)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며 그 결과 김나지움 학창시절(1828부터 라이프치히에 있는 김나지움을 다님)에 로이발트(Leubald)라는 드라마를 만든다.

 

물론 이시기에 나타나는 바그너의 작품들은 아직 천재성이 들어있다고 보기에는 너무 이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 그의 능력이자 성격일지도 모르지만 - 이러한 그의 어설픈 어린 시절의 작품들은 중간에 중단되지 않고 계속 작업되어 끝을 맺었다는 것에 어느 정도는 의미가 있다(예를 들어 후에 바그너의 주요작품인 "니벨룽겐의 반지"는 거의 26년에 걸쳐 완성된다).

끈기와 인내로서 노력한 몇 년의 세월들은 바그너를 능력있는 예술가로서 승격시킨다.

그러나 바그너는 김나지움의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결국 1830년 부활절을 기하여 니콜라이 학교를 떠나게 되며, 그 이후 1831년 2월까지 토마스 학교에 다시 편입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결국 대학 입학시험도 보지 못한 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하여 라이프치히 대학에 지원을 시도해 본다. 다행이도 바그너는 대학입학시험을 보지 않고도 그 대학에서 음악학도로서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게 되어 정식학생으로서 등록하게 된다. 이 시기에 특히 바그너는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였던 테오도르 바인리크(Thedor Weinlig)의 제자가 된다.

 

1833년부터 바그너는 본격적인 음악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1842년까지는 여러 도시를 방랑하는 젊은 오페라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 음악을 총괄하는 직책)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바그너가 카펠마이스터로서 각도시에서 활동했을 때 생성된 것으로 낭만적 오페라인 "요정들" (Die Feen 1833-1834, Wurzburg)을 비롯하여 코믹오페라 "사랑의 금지" (Liebesverbot 1834-1836, Magdeburg), 비극적 그랜드오페라 "리엔치" (Lienzi 1838-1840, Riga/Paris)를 들 수 있다.

 

바그너는 1836년 11월에 여배우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을 한다. 결혼한 이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으로 향하며, 거기서 다시  파리로 향하는데, 이 때부터 이들은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된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문학적 그리고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바그너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곳에서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걸음이 된다.

바그너는 우선 미완성된 "리엔치"를 1840년에 파리에서 완성하고, 1841년에는 자신의 시와 음악으로 만들어진 낭만적 오페라 "방황하는 화란인"(Der fliegende Hollander)을 작곡한다.

 

1843년 1월 2일에 "방황하는 화란인"이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자마자 바그너는 그 해 2월부터 1849년까지 드레스덴의 궁정 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된다.

이 시기는 바그너가 절정기에 도달하는 낭만적 오페라를 작곡한 때인데, 즉 "탄호이저"(Tannhauser 1842-1845)와 "로엔그린"(Lohengrin 1845-1848)이 그것이다.

1846년 4월에는 바그너가 처음으로 베토벤의 제9번교향곡을 지휘하기도 하는데, 베토벤에 대한 바그너의 존경심과 그의 음악적인 영향은 훗날에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바그너는 1849년에 36살의 나이로 드레스덴에서 일어났던 5월혁명에 가담하게 되어 지명수배에 오르게 되며, 이에 따라 그는 스위스의 취리히로 망명을 하게 된다.

 

1849년부터 1858년까지 지속되었던 취리히에서의 망명생활에서 바그너는 창작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미래의 예술작품"(Das Kunstwerk der Zukunft 1849)과 "오페라와 드라마"(Oper und Drama, 1851)를 비롯한 많은 저서들과 연속 4부작 시리즈 "니베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에 속하는 "라인의 황금"(Das Rheingold)과 "발퀴레"(Die Walkure) 등의 음악극(Musikdrama)이 만들어지는데, 이는 기존의 낭만적 오페라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의미한다.

 

1850년 8월에는 바그너의 낭만적 오페라의 대표작인 "로엔그린"이 바이마르에서 초연을 하는 시기이며, 1852년에는 베젠동크(Wesendonk) 부부와 친분을 갖게 된다. 여기서 바그너는 특히 베벤동크 부인 마틸데(Mathilde)와 연분을 갖게 되어 이를 기억하는 베젠동크-가곡들을 작곡하게 되는데, 이 가곡들은  불멸의 음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1857-1859)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예: 제2막의 사랑의 이중창과 제3막의 서곡).

 

1853년에는 바그너가 취리히에서 그 유명한 5월의 콘서트를 갖게 되는가 하면 런던에서는 8개의 연주회를 갖기도 한다. 리스트의 방문은 물론이고, 1857년에는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뷜로우(Hans von Bulow)가 결혼 기념여행으로 부인 코지마(Cosima: 리스트의 딸,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후에 함께 생활하게 된다)와 함께 방문을 한다.

 

취리히의 망명생활을 마치고 바그너는 1858년부터 1861년까지 베네치아, 루체른, 파리를 여행하게 되는데, 이 가운데 1859년에는 "트리스탄"이 완성되며 1861년에는 "탄호이저"가 처음으로 파리에서 연주된다. 1861년부터 1864년까지는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갖는 시기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1864년 5월에 뮌헨에서 루드비히 왕 제2세와의 만남은 앞으로 바그너의 <종합 예술작품>을 실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바그너는 뮌헨으로 거쳐를 옮기게 되며, 드디어 1865년에는 그곳에서 대망의 "트리스탄"을 뷜로우의 지휘하에 초연시킬 수 있었다.

 

1866년 4월에 바그너는 다시 스위스 트립쉔/루체른 (Triebschen/Luzern)으로 돌아오게 되며, 그곳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들"(Die Meistersinger von Nurnberg 1861-1867)을 완성한다. 1868년에는 이 작품이 뮌헨에서 초연되며, 같은 해 11월에 바그너는 그 유명한 철학자 그리고 바그너리안이었던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라이프치히에서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1872년까지 니체는 바그너를 자주 방문하게 되지만 그 이후로는 바그너와 결별을 선언한다.

 

뷜로우의 부인이자 리스트의 딸이었던 코지마는 바그너와 특별한 연인 사이가 되며, 1869년 6월에는 이 두 사람에게서 아들 지크프리드가 태어나게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직 완성을 보지 못했던 연속시리즈 "니베룽의 반지"중에 하나인 지크프리드가 ("발퀴레"를 뒤이어) 1864-1871년에 완성된다. 그러는 사이에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각각 1869년과 1870년에 뮌헨에서 초연된다.

 

1872년부터 바그너는 스위스 지역을 떠나서 독일 바이에른주 남동부지역의 바이로이트 도시로 거처를 옮긴다. 이곳에서는 바그너의 59살의 생일을 기념하여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를 짓기 시작한다. 이 건축작업은 4년에 걸쳐 완성된다. 이 시기에는 드디어 "니벨룽의 반지"의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Die Gotterdammerung 1869-1874)이 완성된다. 이 완성된 4작품의 "니벨룽의 반지"는 1876년 8월에 막 건축이 끝난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에서 리히터(H. Richter)의 지휘하에 초연을 하게 된다.

 

이것으로 사실상 그가 약 26년전부터 계획해왔던 <종합예술작품>이 일단락 실현되었다고 하겠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은 종교적인 성격의 "파르지팔"(Parsifal 1877-1882)인데 1882년에 이 작품도  바이로이트-축제연주하우스에서 초연되었다. 같은 해 11월에 바그너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베네치아로 여행을 하며 그리고 그곳에서 1883년 2월 13일에 생을 마감한다.

그의 시신은 바이로이트에 있는 하우스 반프리드(Haus Wahnfried)의 정원에 뭍혀있다.

 

 

 

바그너 가문과 히틀러와의 친분

 

히틀러를 숭배한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

 

바그너 가계에도 정치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히틀러와의 친분설이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당시 배낭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일부 바그네리안들은 단지 이런 히틀러가 바그너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바그너를 옹호하고 있지만 1850년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에서 이미 바그너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임을 제창하고 있다.

 

하지만 1883년 사망한 바그너가 히틀러와 직접적인 친분을 맺을 수는 없었다. ‘바그너=나치’라는 공식을 성립시킨 인물은 바그너의 영국인 며느리, 위니프레드이다. 1930년 남편 지그프리트 사망뒤, 남편의 누이들을 제치고 바이로이트의 대권을 장악했던 그는 노골적인 나치주의자였으며 히틀러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손자 고트프리트 바그너가 쓴 저서에는 그의 이러한 행각이 신랄하게 드러나 있다. 고트프리트는 “할머니는 1920년대부터 히틀러를 숭배했으며, 옥중의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쓸 원고지를 제공한 것도 할머니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생전에 바이로이트에 방문한 히틀러가 위니프레드의 두 아들, 현 바이로이트의 실제적 권력자인 볼프강과 빌란트(1966년 사망)와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흑백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현 세대들의 정치색까지 눈총을 받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은 위니프레드를 나치의 주요 협력자 중 한 명으로 지정하고 바이로이트 축제에서의 일체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로 인하여 두 아들 빌란트와 볼프강이 축제의 운영권을 상속받았다. 아들들의 계승으로 인하여 바이로이트 축제는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위니프레드는 세상이 바뀌어서도 좀처럼 ‘나치’ 딱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장남 빌란트가 죽고 나서도 14년을 더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히틀러를 옹호하던 그는 1980년 사망한 뒤에도 바이로이트의 누가 되었다. 1997년 고트프리트의 저서로 인하여 코너에 몰린 바그너 재단은 예정되어 있었던 위니프레드의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으로 인해 바이로이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작품 연주가 여전히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을 차별하고 대대로 악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 시발점, 바그너가 실은 유대인의 사생아 출신이라는 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바그너 가문의 우먼파워

바이로이트(Bayreuth)를 쥐락펴락하는 실세들

 

바그너 가문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벨에서 정치적 주도권은 주로 여성들의 전유물이었다. 지난 주 언급하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가 그러했고, 위니프레드 이전에는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자 리스트의 딸이자 한스 폰 뷜로의 전처였던 코지마가 있었다.

 

바그너의 절대적인 옹호자였던 코지마는 전 남편과 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을 버리고 스물네 살이나 연상이었던 바그너에게 찾아갔고 바그너가 죽는 순간까지 그의 예술적 이상을 실현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결과적으로 바이로이트 극장을 지을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2세와 더불어 코지마가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그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줄거리에서나 음악언어에서나 지극히 남성 중심의 세계관을 피력하고 있는(심지어 여성 등장인물조차 남성스럽기 그지없는) 바그너가 실은 여성 의존적인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의 이러한 행적은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바그너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가 어린 시절 얼마나 철부지이고 어리광장이였는가를 알 수 있는데, 이를 다 받아준 것은 그의 네 명의 누이들이었다.

 

그의 자서전에는 어머니 이야기 대신 누이들에 대한 애정이 묘사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에도 각별했던 누나가 10살 위의 로잘리였다. 로잘리는 양아버지가 죽자 불과 열일곱 살의 나이로 동생들을 먹여 살리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졌으며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임신 중 사망했다. 바그너의 주변 여인들은 이렇듯 처음부터 하나같이 생활력이 강했으며 또 삶을 주체적으로 주도할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바그너 가문의 발퀴레(<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여전사)적인 기질은 바그너가 죽고 난 뒤에도 후손들에 의해 끊이지 않고 계승되었다. 바이로이트 공동대표였던 형 빌란트가 급서한 뒤 운영 전권을 위임받은 볼프강 바그너는 몇년 전 차기 축제국 대표로 두번째 부인 사이에서 낳은 막내딸 카타리나(1976년생)를 지목해 바이로이트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금발의 아름다운 외모에 팬클럽까지 있을 만큼 인기가 높지만 나이가 한참 어린 데다 예술적으로 아무런 경력이 없는 그녀의 계승에 대해 볼프강 전처의 딸 에바와 형 빌란트의 딸 니케가 적극적인 반기를 들고 나섰다. 만약 카타리나가 대표직을 이어받을 경우, 카타리나의 어머니이자 볼프강의 아내인 구트룬의 섭정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카타리나와 달리 에바와 니케는 바그너 연출과 드라마투르기로서 이미 명성을 확고히 하고 있는 여전사들이다. 특히 최근 들어 니케의 활동은 유럽 전체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린 시절 바이로이트에서 자의반 타의반 추방당한 니케는 어엿한 바그네리안으로 성장하여 삼촌 볼프강 바그너의 정책에 대해 비판하고 바이로이트의 개혁을 주창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뮌헨 오페라 극장에는 니케가 드라마투르기를 한 <니벨룽의 반지>가 상연되며 커다란 화제를 불러 모았다. 바이로이트 극장 자체를 무대로 삼은 니케는 마지막 4부 <신들의 황혼>에서 바그너 오페라의 메카 바이로이트 극장이 불에 타 스러지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