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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닌그라드 포위전

 

언제

1941년 9월 8일 ~ 1944년 1월 27일

 

어디서

러시아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맨위 사진)2차대전 독일군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봉쇄 당시 번화가인 네프스키대로 주변에서 쓰러져 죽은 시체들을 수습하고 있다.

 

참여한 병력

독일: 약900일간 총 약 270만

소련: 약900일간 총 약 600만

 

결과

소련의 승리

 

제2차 대전에서 최장이라 할 수 있는 900여 일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레닌그라드 포위전(Siege of Leningrad)이다.

 

빌헬름 폰 레프 장군이 이끄는 50만 병력의 북부집단군은 18일만에 무려 600킬로미터를 전진했고,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선봉 부대가 목표인 레닌그라드의 도심에서 겨우 1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다가섰다.

기습 공격에 나선 지 79일째인 9월 8일에 독일의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에워쌌다.

1941년 9월 8일 소련의 마지막 육상 연결 통로가 끊어지면서 ‘레닌그라드 봉쇄’가 시작됐다.

레닌그라드를 포위한 독일군은 섣불리 도시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정규군은 물론이고 총을 들 수 있는 레닌그라드 젊은이를 모조리 동원해서 결사 방어에 나선 소련군을 상대로 시가전을 벌인다면 승리야 하겠지만 독일군도 감당하기 어려운 피해를 입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는 지상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그리고 “민간인 생명을 구하는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인구 330만의 거대도시 레닌그라드를 점령하지 않고 굶겨 죽이기로 작정했다.

독일군은 도시를 포위해서 물자 반입을 철저히 틀어막고 맹렬한 포격과 폭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워낙 짧은 시간에 포위되는 바람에 봉쇄에 미처 대비하지 못한 레닌그라드에는 식량이 턱없이 모자랐다.

배고픈 시민들은 새나 고양이를 잡아먹고 가죽 구두와 허리띠를 삶아먹는 것은 물론이고 도배 벽지 뒤에 붙은 풀을 긁어내어 수프를 끓이기도 했다.

영하 30도에 다가서는 혹한을 뚫고 식량 배급소에 가다가 쓰러져 거리에서 그대로 숨을 거두는 이가 속출했다.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죽은 사람의 살덩이를 찾아 다니는 자들을 단속하는 부대가 따로 편성될 만큼 사태는 심각했다.

굶주리고 추위에 지쳐 기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사망률은 나날이 치솟았다.

 

 

소련의 입장에서는 이런 피해를 무릅쓰고라도 레닌그라드는 지켜내야 했다.

레닌그라드 시민이 만약 희생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한다면 독일의 북부집단군이 이때 팽팽한 결전이 벌어지던 모스크바 전선에 고스란히 투입될 것이고, 그 결과로 모스크바가 독일 손에 들어간다면 소련은 그대로 무너질 터였다.

더구나 레닌그라드는 소련 해군 발트해 함대의 거점이자 소련 공업생산량의 10분의 1을 차지하는 군수공업의 요충일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기원인 러시아 10월혁명의 요람이며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이름이 붙은 도시였다. 레닌그라드의 상실은 물리적 측면과 더불어 심리적 측면에서도 헤어나기 힘든 충격을 소련에게 안겨주어 항전 의지를 꺾었을 것이다.

레닌그라드 시 당국은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 활로는 시 외곽의 동북부에 있는 거대한 라도가 호수였다.

극지방에서 휘몰아치는 겨울 바람에 호수 표면이 얼어붙었다.

얼음 두께가 20센티미터가 되면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가 지나갈 수 있게 된다.

시 당국은 라도가 호수 얼음 위에 30킬로미터의 길을 냈고, 이 경로를 이용해서 11월 20일부터 시민을 먹여 살릴 식량을 들여왔다.

독일군 항공기가 폭탄을 떨어뜨려 얼음을 깨뜨려도 몇 시간이 지나면 호수 표면은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한겨울에 얼음 두께가 1미터에 이르자 화물차 수백 대가 한꺼번에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식량을 실은 트럭들이 분주히 레닌그라드로 들어왔고, 적재함에 어린이와 병약자를 싣고 돌아갔다. 이 길이 바로 그 ‘얼음 길’ 또는 ‘생명의 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 독일군의 공습으로, 아니면 얼음이 얇아 깨지는 바람에 호수 밑으로 빠져버린 화물차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닌그라드 민관군의 결사 항전은 라도가 호수의 얼음 덕분에, 그리고 목숨을 걸고 그 위를 오간 용감한 운전기사들 덕택에 유지될 수 있었다.

 

레닌그라드 포위가 끝나고 한 시민이 말한

'트로이도 로마도 함락됬지만, 레닌그라드는 함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약 90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400만명의 군인이 사망

 

 

 

2. 모스크바 공방전

 

언제

1941년 10월 2일 – 1942년 1월 7일

 

장소

러시아 모스크바

 

참여한 병력
독일:100만명, 전차1800대, 전투기1000대, 포2500문,
소련군:150만명, 전차1000대, 전투기800대, 포6000문,

 

 

모스크바 공방전(Battle of Moscow,  러시아어 : Битва за Москву)는 1941-1942년 가을과 겨울 사이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방에서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투를 발한다.

이 전투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한 소련의 모스크바 방위와 이후 반격으로 이루어진다. 

히틀러는 소련의 가장 큰 도시이자 수도인 모스크바를 함락하는 것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암호명 보탄작전(Unternehmen Wotan)이라는 별도의 모스크바 공략작전이 계획되어 있었다.

원래의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모스크바 탈취를 소련 침공 후 3-4달 이내로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기의 파죽지세도 불구하고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군의 저항 때문에 늦춰졌다.

게다가 히틀러는 자원과 식량이 모여 있는 우크라이나와 코카서스 공략을 모스크바보다 우선순위에 둘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래서 중앙집단군이 전격전의 핵심전력인 예하의 구데리안 기갑군을 키예프 공략을 위해 남부집단군으로 전속시켜 전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집단군이 맡은 스몰렌스크 공략작전은 7월부터 9월까지 지속되어 2달간 모스크바 공략작전이 늦어졌다. 키예프와 스몰렌스크를 함락시킨 이후 남방전선으로 전속되었던 기갑부대의 재정비때문에 독일군의 공세는 일단 레닌그라드와 키예프에 이르는 전선에서 정지하였고, 모스크바 진격은 9월 30일이 되어야 재개되었다.

이 작전은 태풍작전(Unternehmen Teifun)으로 명명되었다.

이 작전의 목표는 겨울까지 모스크바를 함락시키는 것이었다.

작전이 재개된 직후, 소련군의 수 개 야전군을 포위섬멸한 독일군은 모스크바 서쪽 120 km 근방의 모자이스크 방위선에서 일단 정지되었다.

도로와 들판을 진흙창으로 만든 라스푸티챠(비나 눈의 융해으로 인해 진흙이 생겨 겨울이 되기 전, 그리고 비포장도로에서 해빙기 여행을 하기가 어려워지는데, 이렇게 1년에 두 번 볼 수 있는 현상) 때문에 추축군의 차량과 인마는 전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을 장마가 끝난후 찾아온 추위는 땅을 얼어붙게 만들어 독일군은 전진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독일군은 이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추위와 강화된 소련군의 저항과 다시 한번 맞닥뜨려 험난한 길을 나서게 되었다.

12월 초, 독일군의 첨병부대는 모스크바의 심장부이자 소련의 정부청사인 크레믈린에서 30 km 서쪽까지 진출하여 쌍안경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추위와 약화된 전력때문에 더이상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12월 5일, 소련군은 시베리아에 주둔했던 전력완비의 사단들을 모스크바 전선에 투입하여 독일군을 공격했다.

 

1942년 1월까지 소련군은 독일군을 100km까지 후퇴시켜 모스크바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였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소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이는 소련이 처음으로 독일의 공세를 좌절시켜 수도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전투는 쌍방의 인명손실이 100만명을 넘는 참혹한 결과를 내어, 제2차 세계 대전의 최대 규모의 전투의 하나로 꼽힌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독일군이 1939년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로 패퇴한 전투로 독일군 역사상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약 10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100만명의 군인이 사망

 

 

 

3. 스탈린 그라드 전투

 

언제

1942년 8월 21일 – 1943년 2월 2일

 

참여한 병력
독일:70만(동맹군+40만 총 110만)
소련군:180만명

 

결과

소련의 승리

독일의 최정예 군단 6군의 전멸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처절한 전투였다. 이 전투는 199일간 지속되었다.

전투의 범위가 광대했고, 사상자 수가 지나치게 많을 것을 두려워 한 소련 정부의 금지 때문에 정확한 집계도 어려웠다. 전투 초기에 독일군은 소련군에게 심한 손실을 입혔다. 그러나 소련군이 독일군의 측면(주로 루마니아군)을 돌파하여 독일 제6군의 나머지를 포위하기 전에도 독일 제6군은 이미 큰 손실을 입고 있었다. 어떤 때는 독일군이 시의 90%를 장악하기도 했으나 소련군 장병들은 독일군의 점령 지구 안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독일 제4기갑군의 일부도 스탈린그라드 주변의 소련군의 반격 때 심한 손실을 입었다.

히틀러가 믿어 의심치 않던 독일 6군의 전멸로 독일의 기세가 꺾이게 된다.

 

1. 배경  

1941 6 22일 바르바로사 작전(Operation Barbarossa)을 통해 소련 영토로 깊숙이 진격해가던 독일군은 1941 12월 모스크바 외각까지 진격한다. 100년 전 나폴레옹 군대가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했듯이 히틀러의 독일군도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배한다. 모스크바 전투 이후인 1942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히틀러의 독일군은 코카서스 유전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다시 한 번 거침없는 진격을 이어갔다. 1942 6월 청색작전을 실행한 독일군은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A군은 코카서스 지대로 향하게 했고, B군은 볼가강을 끼고 있는 스탈린그라드로 향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1942 8월 독일군은 스탈린의 도시 스탈린그라드에 도달했다.

 

2.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진입 

1942 8월 스탈린그라드 외각에 도달한 독일군은 도시 진입에 앞서 독일 공군인(Luftwaffe)를 투입하여 도시를 폭격한다. 탱크 사냥꾼이자 급강하 폭격기인 슈튜카와 융커스 폭격기로 이루어진 2천여대의 독일 항공기가 투입되어 스탈린그라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공군의 지원을 받은 독일군은 남쪽에 있던 제4기갑군과 합류하여 차츰차츰 소련군을 격파해 나갔다.

 

그러나 도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도시는 스탈린의 도시였고, 스탈린과 소련의 고위 간부들은 이 도시를 무조건 지키고자 했다. 그에 따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된 소련군 병사들은 폭격기의 폭격으로 파괴된 도시의 잔해 속에서 독일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다. 스탈린그라드에 진입한 독일의 기갑군단은 파괴된 잔해 속에서 진격이 늦춰졌고, 건물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련군의 기습을 받았다. 이후 스탈린그라드의 지휘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예비대까지 투입했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점점 더 치열해졌다.

 

결국 히틀러는 코카서스로 가던 A군의 일부를 스탈린그라드에 투입하고, 소련군도 보다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하면서 이 전투는 양측 150만 이상의 병력이 투입되는 상황까지 오게 된다. 1942 10월 독일군은 소련군과의 교전에서 점점지쳐갔지만, 도시를 점차 점령해갔고, 10월 말 독일군은 도시의 90% 차지하는데 성공한다.

 

3. 소련군의 반격

 

1942 11월 독일군이 볼가강 교두보로 내몰린 소련군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고 있던 사이, 150만 이상의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를 공격하고 있던, 독일군 사이로 집결한다. 

소련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과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장군은 루마니아군이 방어하고 있던 독일군의 측면을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남북에서 독일군을 포위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 천왕성 작전 (러시아어 : Операция «Уран» 오페라찌야 우란) )

대규모의 소련군이 남쪽과 북쪽에서 루마니아군을 향해 덮쳐왔고, 1942 11월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에 있는 수십만의 독일군을 포위한다. 포위된 독일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히틀러에게 전화하여 탈출할 것을 보고했지만, 히틀러로부터 온 답변은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는 명령이었다.

 

1942 12월 소련군에게 포위당한 수십만의 독일군을 지원하기 위해, 만슈타인 장군이 이끄는 기갑부대가 출동했지만, 파울루스는 총통의 지시를 따랐다. 결국 만슈타인이 보낸 부대는 스탈린그라드로부터 철수했고, 파울루스의 군대는 탈출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게 된다.  

1943 1월 파울루스가 이끄는 독일군을 향해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된다. 파울루스는 결국 히틀러에게 항복을 허가를 요구했다. 이를 거절한 히틀러는 1 30일 파울루스를 진급시켰으나, 1943 2 2일 극심한 추위와 식량 고갈 그리고 소련군의 포위로부터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결국 자신이 지휘하던 25만 명 이상의 군대와 함께, 소련군에게 항복한다. 이로써 6개월간 지속되던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이 난다.

 

4. 의의

1943 2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2차세계대전의 전세는 연합국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고 난 뒤, 소련군은 이에 힘입어 독일군을 향해 모든 전선에서 진격하게 된다. 따라서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2차세계대전의 방향을 바꾸고 역사를 새로 쓴 전투다.

 

 

 

약 20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230만명의 군인이 사망

 

 

 

4. 쿠르스크 전투(쿠르스크 전차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3년 7월 4일~15일

 

장소

러시아 쿠르스크

 

 참여한 병력
독일:80만명, 전차3000대, 전투기2300대, 포10000문,
소련군:190만명, 전차6000대, 전투기2800대, 포26000문,

 

결과

소련의 승리

독일이 보유한 거의 대부분의 기갑전력,항공전력이 괴멸

독일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확정

 

쿠르스크 전투또는 성채 작전은 제2차 세계 대전 동부 전선에서 일어난 가장 주목할 만한 전투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하루 동안 벌어진 공중전으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도 꼽히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로 독일군은 지치기 시작한다. 독소전 초기 독일군보다도 장비가 우수했던 최정예 소련군이 스탈린의 지휘관 숙청으로 인해 각개격파된 후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승리를 확신했지만 소련의 인력은 독일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고 있엇다. 예비 병력이 계속 보충되고 우랄산맥에 있는 무기공장들에서 무기가 계속 추가됬다.

 

생산력이 한계에 봉착했던 독일은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낀다. 또한 더 강한 주포를 단 신형 T-34의 양산 계획을 알게된 독일은 더욱 더 급해지게 된다.

 

신형 T-34가 양산되면 결국 독일은 패배할 거라는 생각으로 독일은 소련의 주력 병력을 또 다시 격파하기 위한 전투를 준비하는 데 이 전투가 바로 쿠르스크 대 전투다.

 

독일은 서부전선에 있던 거의 대부분의 기갑전력,항공전력을 쿠르스크로 보낸다.

독일의 보유한 기갑전력의 93%,항공전력이 87%를 쿠르스크에 집결했다.

 

만슈타인은 바로 소련을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소련은 방어하는 입장이였으며 개전 초기와 다르게 주코프란 훌룡한 지휘관이 존재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끝 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히틀러는 더욱 더 소심해져 티거전차가 보급될 때 까지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그 기간 사이에 신형 T-34의 양산도 더욱 진행되었다.

 

 

신형 티거가 배치된 후 독일군은  선제공격을 가했지만, 소련군은 프로호로프카전투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 곧 반격을 개시하여 오룔,벨고로드,하르코프를 재탈환하였다. 이 전투는 소련군이 독일군에게 여름에 승리한 전투로는 최초였다.

 

이 전투에서 독일군 전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으며 다수의 기갑전력과 항공전력을 잃었다.

 

소련 역시 막대한 전력을 잃었지만 신형 T-34가 양산되고 신형 전투기 폭격기등이 양산되면서 4달만에 쿠르스크 전투의 피해를 복구했다.

 

그에 반해 독일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입은 피해를 전혀 복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 후 독일의 패배가 확정됬다.

 

쿠르스크 전투에 독일은 모든 기계화 전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로 독일에게 남은 것은 보병들 뿐이였고 때문에

이후로 독일군은 두번 다시 공세로 전환하지 못하고, 소련의 공세에 동부 전선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11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100만명의 군인이 사망

 

 

 

 

 

 

5. 바그라티온 작전

 

전장

2차대전 동부전선(독소전쟁)

독일vs소련

 

날짜

1944년 6월 22일 – 10월 19일

 

장소

벨로루시 전역

 

 참여한 병력
독일:90만명, 전차800대, 전투기600대, 포7000문,
소련군:250만명, 전차3000대, 전투기6000대, 포25000문,

 

결과

소련의 승리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의 기갑전력,항공전력 괴멸 후

그나마 남아있던 보병전력,포병전력마저 괴멸

 

제 2차 밸로루시 전투는 그 유명한 바그라티온 작전(소련의 독일군 괴멸 계획)의 시작을 알린 전투이며 독일군이 소련군보다 압도적인 인명피해가 나왔다.

이 작전의 이전에는 90만명에 달했던 독일 중앙집단군은 전 총 사망자 73만명, 25개 사단을 잃는 괴멸적인 타격을 받고 장성급 지휘관 47명중 31명이 전사, 실종, 포로가 되었으며 겨우 다시 모은 탱크 800대와, 중포 및 각종 차량과 소화기 5,700대를 잃는 피해를 입었다. 소련군은 이 작전에서 잡은 10만명이 넘는 독일군 포로를 모스크바 시내에서 행군시켜 자국민의 사기를 높이고 영·미군에 과시하였다.

 

독일군은 애당초 바그라티온 작전 이전에 보유하고 있던 총 병력 숫자가 소련군의 반도 안 되었으며, 처음부터 소련군의 의도를 오판하여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더욱이 소련군 공세의 와중인 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이 발생하기도 하여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약 120일간의 전투에서 양 측 합해 약 90만명의 군인이 사망

 

 

 

 

 

동부 유럽 전선, 소련군의 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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