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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만주국 개국 이후

노몬한 사건이 발생하는 1939년 이전의 만주-몽고 국경의 분쟁은 총 759건에 달한다.

 

이는 만주국에서는 지형적 국경으로 할하강(ハルハ江,칸킨콜)을 삼고 있던 것과 다르게,

몽고(소비에트 연방)에서는 노몬한 고지에 연이어 있는 유목민의 길(길게 늘어서 있는 유목민들의 무덤표식)을 국경으로 삼는 것이 있다.

 

 

 

 

 

 

 

1939년 5월11일 만몽(滿蒙) 국경 할힌골(Khalkhin Gol·노몬한).

몽골 인민공화국 기병대가 군마의 목초지를 찾아 개울을 건넜다.

 

영토 침범으로 간주한 만주국은 교전을 시작하는 한편 일본군을 불렀다.

급히 출동한 일본 관동군 23사단 수색대와 만주국 기병대, 몽골군 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잇따랐다.

하늘에서도 공중전이 벌어졌다.

몽골과 상호 방위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군과 일본군 전투기가 맞붙었다.

싸움은 곧 전면전으로 번졌다. 소련과 일본은 9월 중순 정전협정을 맺기까지 4개월 동안 하늘과 땅에서 싸웠다.

결과는 병력과 장비에서 우세했던 소련의 완승.

소련과 몽골군은 7만3,000여 병력에 전차 550대, 장갑차 450대, 야포 500문, 트럭 4,000대에 항공기 900대 이상을 투입해 일본과 만주국을 압도했다.

일본 측은 병력 3만8,000명, 전차 73대, 장갑차 64대, 야포 300문, 트럭 1,000대, 항공기 400대로 약세였다.

 

만주국 기병대가 주로 운용한 군마의 수만 2,708필로 1,921필을 동원한 몽골군을 앞섰을 뿐이다.

소련군은 장비의 양은 물론 질에서도 일본군보다 훨씬 뛰어났다.

 

제1차 할힌골 전투

5월 28일 니콜라이 페클렌코가 이끈 소련군 1,500여 명은 숫적으로 우세한 2,000여 명 이상의 관동군과 맞서 싸웠다.

병력 면에서 소련군은 열세였으나, 장갑차와 야포,자주포의 숫자와 성능은 소련군이 우세하였다.

소련군은 야포와 자주포, 장갑차를 적절히 활용하여 일본군의 대응 전력을 먼저 격파한 다음 보병을 포위하여 섬멸하였다. 일본군은 약 50-70%의 피해를 보아 전멸했으나 지상전과는 달리 공중전에서는 일본군이 우세했다.

이는 제 2차 할힌골 전투의 불씨가 되었다.

제1차 할힌골 전투를 승리로 이끈 페클렌코는 모스크바에서 훈장을 받았다.

페클렌코의 후임으로 부임한 사람은 주코프였다.

 

 

제2차 할힌골 전투

6월 27일, 일본 관동군 항공대는 107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톰스크 일대의 소련의 항공기지를 급습하였다.

톰스크 공군 기지의 절반이 파괴되었고 소련은 1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상실했다.

 

이와 같은 급습을 당한 소련은 보복전을 준비하였다. 소련의 외무인민위원 몰로토프는 앞으로 전개될 보복전이 단순히 톰스크 기지의 피해를 앙갚은 하는 것을 넘어 만주와 몽고의 국경을 정함에 있어서 소련의 우위를 점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한다고 역설을 하였다.

몰로토프의 주장에 대해서 스탈린은 옳다고 생각하여 게오르기 주코프를 할힌골 전투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다.

일본은 관동군 내에서도 정예라 불리는 제 7사단을 투입했다.

 

주코프장군은 모스크바에 대규모의 지원 병력을 요청했다.

모스크바는 이에 화답하여, 주코프의 요청의 2배가 넘는 병력을 주코프에게 보내주었다.

그 결과, 주코프 장군의 소련군은 3개 소총사단, 2개 전차사단, 2개 전차여단, 2개 차량화보병사단, 전투기와 폭격기 557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전차는 498대에 이르렀다.

주코프는 이 물자들을 눈에 띄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전장까지 이동시켰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전차 135대와 항공기 250대를 보유했다.

소련군은 일본군의 전차보다 성능이 뛰어난 전차를 많이 보유하였다.

일본군의 주력 전차는 89식 중전차나 97식 전차로, 대부분 소련군 전차와 기갑전을 벌이기에 부족하였다 . 소련군 전차는 T-26, BT-5등이 있었다.

전투에 임하여 일본군 기갑병력은 열세를 드러 내어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는데 급급하였다.

일본군 포병도 소련군 포병의 압도적인 화력과 기세에 눌렸다.

 

7월 2-3일에 80대의 전차와 100문이 넘는 대포로 일본군 10,000여 명이 공격해 왔으나

446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장비하고 있던 소련군에게 대패했다.

일본군은 악착같이 맞서 싸우기는 했으나 결국 수천여 명의 사상자를 낸 채 4-5일에 걸쳐 일방적으로 패주했다.

 

일본군의 공세가 소진되기를 기다린 주코프는 현대화된 기갑 전력을 이용하여 8월 20일 대규모의 포병력과 차량화 보병을 이용한 화력지원을 하고 폭격기와 전투기를 동원한 공중지원과 함께 기갑전력(3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과 보병을 포함한 50,000여 명의 대병력으로 하여금 강을 도하하게 하는 대담한 기동 작전을 감행했다.

또한 500여 대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20일 새벽 5시 45분부터 일본군 진지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대규모의 포격도 일본군 진지를 향해 가해졌다.

2만 수천여 명의 잔존 일본군은 강력히 저항하면서 소련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소련-몽골군의 500여 전차와 50,000여 병(3개 보병사단, 1개 전차여단)은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군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일본군 제 23사단은 8월 25일에 이르러 소련군의 넓은 포위망 안에 갇혀버렸다.

 

8월 26일에 일본군은 제 23사단을 구원하기 위한 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하였다.

그 다음날인 27일에는 제 23사단이 포위망을 돌파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였다.

일본군이 항복에 머뭇거리는 사이, 소련의 포격과 항공 폭격이 일본군 진영에 계속인 타격을 가하였다. 31일에 이르자, 일본군은 사실상 붕괴하였다.

제 23사단의 잔여병력은 만주국 국경으로 겨우겨우 빠져나갔다.

관동군은 투입된 병력의 절반을 손실하였다.

 

 

전투가 벌어졌던 할힌골은 드넓고 황량한 평야지대였기에, 기계화되고 근대화된 소련군이 역량을 펼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다.

 

관동군 6군 전체가 소련군 포위망에 갇혀버렸는데, 특히, 관동군 6군 제 23사단은 피해율이 70%-80%에 달할 정도였다.

2주 만에 관동군은 할힌골 전장에서 처참하게 전멸당한채 후퇴했다.

 

 

 

이 전투에서 근대화된 소련군의 기갑 전력에 “총검 백병주의”를 앞세우던 관동군 지휘관들은 총을 맞고도 끄떡없는 장갑차를 향해 총검술로 맞서라고 병사들을 다그쳤다.

우세한 화력과 기동력을 갖춘 적이라도 정신력으로 맞설 수 있다고 자신했던 일본군은 처절하게 깨졌다.

연대장 3명을 포함해 8,440명 사망, 8,766명 부상. 사상자가 3만명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다.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이 요구하는 대로 "할하 강"을 경계로 만주국과 몽골의 국경선이 확정되었고, 양국은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맺게 되었다.

 

영국의 전쟁사가 앤터니 비버는 역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노몬한 전투를 2차 세계대전의 기원으로 본다.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 기계화 부대의 위력에 눌린 일본은 소련과 전쟁하자는 북진파가 힘을 잃었다.

대신 해군이 주도하는 남진파가 주도 세력으로 떠올랐다.

 

독일은 노몬한 전투가 끝나자마자 폴란드를 침공, 유럽 전역이 2차 대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독일은 일본에게 같이 소련을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음에도,

일본은 할힌골 전투때의 트라우마로 소련과 다시 싸우고 싶지 않았고,

소련-일본 불가침 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훗날 밝혀진 자료에서는 일본군 못지않은 인명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소련 국민들은 러일 전쟁에서 패배한 악몽에서 벗어났다.

 

소련·몽골 연합군을 지휘한 주코프 장군이 2년 뒤 독일과 전쟁에서 소련군 총사령관으로 발탁된 것도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해 국민과 군의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고, 주코프 장군이 독일나치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된다.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한 원동력은 경제력으로 볼 수 있다.

소련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초고속 성장한 경제를 기반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탱크를 만들어 군대를 기계화했다.

노몬한 전투 당시 소련의 국내총생산(GDP)는 약 366억 달러. 일본(184억 달러)의 두 배였다.

 

 

 

[풀버전] 소련군 탱크와 백병전을 벌인 일본군 | EBS 비즈니스리뷰 이창민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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