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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교주되는 법

 

들어가는 글

 

10년 전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중 수업 시간에 갑자기 학생 하나가 엉뚱한 제안을 한 적이 있었다. 수업을 잠시 중단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뭥미?” 그런데 갑자기 강의실 뒤편 문이 열리면서 한 여학생이 케잌을 들고 나오면서 그야말로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해 주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왈칵 났다. 그런데..장난기 많은 학생 하나가 노래 뒤의 가사를 슬쩍 바꿨다. “사랑하는~교주님 생일 축하 합니다~”

교주라는 말에 학생들은 웃었고 나도 너털웃음을 웃고 말았다. 그런데..그 날 이후로 나는 학생들에 대한 고마운 기억과 함께 나도..“교주가 될 수 있구나를 자각하게 되었다. 

실제 강의를 할 적에는 자칭 미친 듯 열정을 다하기에 나를 잘 아는 후배 놈은 형은 강의할 때 보면 교주기가 있어!” 그렇게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지금은 가르치는 위치에 있지만 예전에 학생으로 있을 적에 어느 교수님이 잊지 못할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정치구조는 나름의 장단점을 갖고 있는데 그래도 가장 사람들에게 좋은 제도는 바로..나는 그 바로 뒤에 민주주의다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선왕정치입니다 ..그렇구나..선왕정치라..순간 세종대왕이 떠올랐다. 인터넷에 떠도는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정말 그 분 자체가 우리 민족에게 큰 선물이셨고 본받을만한 지혜로운 리더임을 느꼈다.

 

나는 이 책을 한국 교회를 위해 쓰고 있다. 한국 교회라고 말하지만 나는 조국교회 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지금 조국 교회는 그야말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그 중에서도 이단이나 사이비 문제로 고생하는 교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것은 교회들이 대처하는 건 결국 이단들과 말도 섞지 말라는 경고일 뿐 별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왜 이단이 생기고 그런 이단에 왜 잘 믿던 교인들이 넘어가는지 그런 이유에 관하여 학문적인 접근이 늘 부족하다 느껴왔다. 이단 문제는 교리 문제이지만 동시에 가정 문제요 정서 문제다. 그래서 학문적으로 말하자면 사회학적 접근이 필요하고, 종교심리학적 접근이 필요함에도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그런 접근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듯하다.

 

모든 사이비나 신흥 종교 뒤에는 반드시 교주가 있다. 그런 교주들은 추종자 신도들에게 거의 신적이며 왕적인 카리스마를 행사한다. 교주의 말 한 마디에 삶이 바뀐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모든 사이비나 신흥 종교는 끝이 안 좋다. 교주가 사망하거나 병이 들면 그 자식들이 이권다툼의 진흙탕 싸움을 하거나, 교인들이 뿔뿔이 흩어진다. 혹은 다른 유사 사이비나 신흥 종교로 넘어간다. 교주들도 처음에는 나름 신실한 교인이었으나 성경의 말씀 그대로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나 육체로 마친다.

솔직히 이단이나 사이비, 신흥종교야 그렇다 치자. 더 문제는 건전한 기독교라 부르는 복음주의 권내의 수많은 교회들 중에도 간판만 정통교회일 뿐 이단 사이비 신흥 종교 교주와 별 다를 바 없는 행태를 보이는 교역자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 교인은 전도는 하고 싶지만 전도해서 믿고 이끌어줄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한탄한 적이 있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쉽게 말하자. 신학대학에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신학대학을 군대로 비유하자면 신학대학은 영적 훈련소와 같다. 그러나 군대에서도 이 젊은이가 군대에 입대하여 군 생활을 잘 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심리검사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가 있는 병사는 관심사병으로 분류하여 특별한 관리를 요청한다고 한다. 군대도 이런데 교회는 그렇지 못하다. 교회는 지금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받아들인다. 물론 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며 연단 받다가 변화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냥 졸업을 한다. 그리고 전도사를 거쳐 강도사나 전도사 사역을 하다 목회자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대로 말하자면 사람을 살리는 실력 있는 의사로 준비시키지 못하고 빈번히 의료사고만 일으키는 돌파리가 될지도 모르면서 학교를 졸업시키고 사역을 시키며 직분을 주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많은 큰 문제 중 하나는 너무나 자격미달의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남발한다는 것이다.

나는 신학대학에서 15년 이상을 강의해 왔다. 그리고 나름 치유적 관점에서 많은 과목을 가르쳐왔다. 나는 무슨 강의를 어떤 이름으로 열든 늘 내 강의를 듣는 학생들 마음에 치유가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왔고 내게는 이게 목회라는 사명을 갖고 강의에 임하였다. 그리고 간간히 만나 듣는 학생들의 삶의 이야기는 충격이었고 아픔이었고 한숨이었다. 도대체 저런 얼굴에서 어찌 저런 큰 상처의 바위 덩어리가 들어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나는 한 가지 확신을 갖게 되었다. 내면의 문제가 치유되지 않은 학생들은 반드시 리더의 자리에 올라설 적에 겉만 리더일 뿐 사실 보스가 되고 만다는 사실을 말이다. 카리스마 강하고 섬길 줄 아는 지혜로운 보스면 그래도 감사하지만, 카리스마는 강한데 자기 밖에 모르고 하나님을 빙자해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통제성 강한 성격의 보스는 차라리 목사를 하지 말고 다른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목사만 그런가? 교회 내에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리더들 역시 문제투성이다. 문제가 없는 인간은 없을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은 죄인이고 하루에도 끊임없이 죄를 만들어 내는 죄 공장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리더는 그런 역기능을 최소화해야만 한다. 그래야 공동체가 건강해진다. 흔히 말하듯 셀 리더들, 목장이 튼튼해져간다는 말이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교회는 리더들의 정신건강이 건강한 교회이며 인간이해가 깊은 교회이다. 그런 교회는 안심하고 아픈 이야기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회가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교회일수록 리더의 눈치를 보고 늘 무언가 신앙 좋은 모습을 드러내 보여야 할 것만 같은 심적 압박감을 갖게 된다. 즉 기쁨보다는 무언가를 못해서 늘 정죄 받고 괴로운 교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교회의 앞날이 밝을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당신이 교주되는 법 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교주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교주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며 교주처럼 군림하는 리더가 아니라, 공동체를 섬길 줄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우며 치유적인 리더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어 쓴 책이다.

한번은 인터넷에 보스와 리더 라고 쳐 보았다. 그러자 수많은 글들이 나오는데 몇 가지 보스와 리더의 차이에 대해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보스는 두려움을 만들고, 리더는 희망을 창조한다.

보스는 비난을 돌리고, 리더는 잘못을 바로잡는다.

보스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리더는 질문을 한다.

보스는 일을 힘들게 만들고, 리더는 흥미롭게 만든다.

보스의 사람들은 하나씩 떠나지만 좋은 리더 밑에는 사람들이 하나씩 모여든다.

리더는 가자라고 말하지만 보스는 가라고 호령한다.

리더는 우리를 강조하지만 보스는 를 강조한다.

리더는 대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보스는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

리더는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보듬지만 보스는 반대하는 자를 쳐낸다.

리더는 타협과 대화를 즐기지만 보스는 일방성과 독선만 강조한다.

리더는 부하들의 짐을 덜어주지만 보스는 무거운 짐을 떠넘긴다. 리더는 귀가 여러 개 있다. 그러나 보스는 그런 소리를 듣는 귀가 없다.

리더는 약점을 숨기지 않는다. 보스는 약점을 숨긴다.

리더는 존경을 모은다. 그러나 보스는 복종만 요구한다.

리더는 남을 믿는다. 그러나 보스는 남을 믿지 않는다. 리더는 선의에 의존하지만 보스는 권위만 의존한다.

과연 리더에 해당하는 덕목이 몇 개나 될까? 물론 때로 사람들이 너무 강하거나 완고해서 어쩔 수 없이 강력한 보스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질서가 잡힌 후에도 강력한 보스가 되려함은 청중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 자신의 문제이다. 이 책은 교주가 되어가는 과정이 무엇인지 정신분석적 관점을 갖고 접근해 본 책이다. 어떤 면에서는 추상적일 수도 있겠지만 나름 구체적으로 문제를 묘사해보도록 할 것이다.

 

󰊱. 교주들이 갖고 있는 이상 심리 첫째 증세- 자기애적 성향이 강하다

 

DSM으로 알려진 정신장애 진단편람이라는 두꺼운 책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자기애적 상처로 인한 증상들은 아래와 같은 증세들을 갖고 있다고 한다.

 

1.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과대적이고 과시적인 요소가 있다. 늘 자기자랑, 자기성취에 대 한 자랑이 심하다. 정서적인 변동이 심하다(일종의 조울증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너무 기쁠 때는 자기감정에 심취한다. 이런 멘트를 날리면서 말이다.

"! 이렇게 기쁜 것을 다른 사람은 모를꺼야" 그러다 맥없이 꺼진다. 마치 바람 빠진 에 드벌륜 같이 말이다.

2. 굉장한 환상(Vision으로 둔갑된)을 가지고 산다. 이들은 항상 무한한 성공, 영리함, 자기 의 재능이나 외모에 대한 욕심과 야망과 환상이 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가면 종교적 형태까지 띄게 된다.

3. 자신은 특별한 존재이기에 특권층과 교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4. 타인으로부터 과도한 찬사를 요구한다. 고로 이 심리적 병은 청중 없이는 못 사는 으 로 알려져 있다. 여자의 경우 말 한마디를 해도 자연스럽게 하기보다는 예쁘고 재주 있 게 한다. 그런 말 뒤에 숨은 감정은 "내가 얼마나 예쁜 줄 알고 있어요? 나 좀 봐주세 요. 나를 칭찬해주고 찬사와 감탄으로 봐 주세요"이다.

5. 대인관계가 착취적, 조종적이다. 사람을 이용하려 든다. 그에게 타인은 자기의 필요에 의 해 봉사하는 환상에 불과하다. 타인을 고유한 존재 즉 Being으로 보지 못한다.

예를 들면 사이비종교의 교주나 독재적인 지도자들은 교인들이나 국민들을 자신과 같은 인격이요 개별된 존재로 보지 않고, 철저하게 위장된 자기의 영광과 과대주의를 위해 존 재하는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6. 공감(Empathy)능력의 결핍이다. 이것은 자기애적 성격을 지닌 사람들의 결정적 특징이 다. 이들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7. 질투와 질시가 강하다. 좋은 것을 보면 마구 짋밟고 파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정서 적으로는 자기가 파편화(破片化)되고 해체되는 느낌을 갖는다.

8. 꿈을 꾸면 무한히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곤 한다. 커다란 그 무엇인가에 압도 당하는 꿈을 꾸기도 하며 꿈속에서 자신은 매우 왜소하게 나타난다.

9. 정서가 막연하고 산만한 형태로 마냥 힘이 들고 무기력해지며 감정적으로는 자기 자신 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정체성에 대한 막연함과 공허감이 있다. 이런 무력감, 공 허에 대한 도피형태가중독으로 나타난다(알코올, 마약, 게임, -Sex, 종교 중독).  중독에는 언제나 짜릿한 쾌감이 동반된다.

10. 자신의 의견이나 목적이 좌절될 때는 분노보다 격노(Rage)반응을 나타낸다.

 

이 중에서 5가지 이상의 증세가 반복된다면 그 사람은 자기애적 상처를 넘어 자기애적 인격장애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독자들 중에는 ? 이거 내 이야기인데라고 당황할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괜챦다. 우리들 모두가 어느 정도 자기애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에 몇 가지 이런 증상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교주가 되는 사람들의 성격, 즉 교주적인 사람들의 성격에는 이상의 특성들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증세 하나하나를 살펴보면 그야말로 교주들의 민낯을 볼 수 있다.

 

1. 굉장히 자기중심적이다. 과대적이고 과시적인 요소가 있다. 늘 자기자랑, 자기성취에 대 한 자랑이 심하다. 정서적인 변동이 심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으로 태어나고 자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세상에 나를 맞추려 하지 나에게 세상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대인관계를 통해 예의를 배우고 관계를 배우며 성숙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발달 특성이다. 그런데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나 공감보다 자기 기분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들에게는 자기 기분이 하나님이다. 교주적인 사람은 늘 자신감에 넘쳐있는 듯 보인다. 그에게 좌절이나 패배감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적으로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지만 카리스마 라는 말을 그런 사람에게 적용해야 할지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카리스마는 그리스어로 은사, 재능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데 카리스마에서의 카리스는 기쁨이라는 뜻이다. 즉 자신이 무슨 일을 할 적에 기쁨이 넘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재능이요 은사라는 말이다. 기쁨이라는 말도 누군가 말했듯 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에서 기인된 말이라고 한다. 만들어낸 말이라 해도 그럴듯하다. 피겨 스케이팅 하면 김연아 선수가 떠오른다. 그녀에게 국영수 공부만 시켰다면 지금같은 세계적 스타가 될 수 있었을까? 그녀에게 음악이나 미술, 체조를 시켰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를 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자기애적인 사람들은 나르시시즘 자아도취에 빠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을 지나치게 확신하면 신념이나 자존감이 약한 사람들은 자아도취에 확고하게 빠진 사람들 주변에 몰려든다. 귀가 얇은 것이다. 세상말로 줏대가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들은 리더가 되기에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사람들 위에 자기애적 인격장애 보스가 있다는 것이다. 그럼 왜 자기애적 인격장애자들은 그렇게 과대적이며 과시적일까? 정말 자랑할 것이 많아서일까? 그렇지 않다. 이런 분야를 자세하게 연구한 사람이 바로 자기 심리학자로 알려진 하인즈 코헛(Heinz Kohut)이다. 코헛은 우리 정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기(self)의 출현과 발달에 대해 세심하게 연구한 학자이다.

코헛에 의하면 모든 아기들은 건강한 자존감을 갖도록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이런 가능성을 촉진해주는 환경을 만나야 한다고 본다. 유아에게 그런 환경을 제시해주는 사람은 당연히 엄마일 것이다. 그러나, 엄마도 우울한 엄마, 방임하는 엄마, 이상한 엄마들이 많기에 엄마라는 표현보다 자기 대상(self object)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자기 대상이란 쉽게 말해 내 마음 같은 대상이다. 아기가 응애 응애 그렇게 울면 엄마가 다가와 아기의 필요를 적절하게 채워준다. 그런 경험을 한번 두 번 반복할수록 아기의 마음 안에는 엄마가 나와 같다. 내 마음 같다라고 느끼게 된다. 코헛에 의하면 이 시기에 아기는 엄마를 마치 거울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엄마가 거울이다! 내가 웃으면 엄마도 웃고, 내가 울면 엄마도 운다. 그런데 이런 반영과 거울 경험이 갑자기 깨어지거나 부재하면 아기는 자신이 체험한 경험을 과대하게 부풀리게 된다. 이를 과대자기라 부른다. 사람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은 모성체험을 하기에 어느 정도의 과대자기가 있을 수 있지만, 불행하게도 너무 빠른 시기에 엄마라는 거울이 깨어져 반영경험이 결핍된 체 성장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과대자기도 연약한 자기가 살아남기 위한 방어기제라 볼 수 있다. 사실 이런 방어기제를 아기가 만들어낸다는 자체가 슬픈 일이다. 쉽게 말해 유아기는 긴장할 것 없이 무조건 태어남 자체를 즐기며 자신의 본능을 즐길 필요가 있는데 어떤 아기들은 너무 이른 시기에 긴장하며(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이 부재하거나 보호가 부재할 적에) 왜곡된 과대자기를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가해자는 피해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 역시 세상의 모든 가해자들이 사실은 피해자로 시작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타고난 리더쉽이 있는 사람들은 과대자기를 세상을 복되게 하는 꿈으로 바꿔 놓는다. 그들에게는 어린 시절 분명 좋은 대상이 있었을 것이다. 거울같이 자신을 반영해주고 실수할 적에 다시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하고 용기를 준 대상 말이다. 그러나, 보스들 특히 자기애적 성격을 가진 교주적 성격의 사람들은 그런 대상이 부재하였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다.

대신 그들이 모델로 삼는 자들은 하나같이 힘 있고 통제하고 조종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누군가이다. 결국은 모델링이다. 과대자기가 가득한 사람은 자라면서 대화적인 사람보다 힘있는 자, 타협보다 주먹을 앞세우는 자, 과정보다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자들을 모델로 삼게 된다. 그런 모델이 자신의 허약한 자기감(self sense)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변질될수록 이런 사람들은 자기 안의 열등감을 전혀 인정할 수 없는 인격이 된다. 그럴수록 투사(projection)가 심해진다. 남 탓 말이다.

칼 융의 이론대로 말하자면 그림자(shadow) 인격이 강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자기 주변의 사람을 인격이 아닌 수단과 도구로 바라본다.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그런 도구 말이다. 정리하면 상처로 시작된 자기(self)는 결국 왜곡된 자기상(self image)을 만든다. 거울이 두 종류가 있다. 온전한 거울과 깨어진 거울. 그들의 내면에는 깨어진 거울이 들어 있다. 이렇게 깨어진 거울로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 그야말로 일그러진 괴물의 얼굴만 보여 진다. 그렇게 교주적인 성격의 사람들은 출발부터 괴물의 모습으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2. 굉장한 환상(Vision으로 둔갑된)을 가지고 산다. 이들은 항상 무한한 성공, 영리함, 자기 의 재능이나 외모에 대한 욕심과 야망과 환상이 있다.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가면 종교적 형태까지 띄게 된다.

 

전능환상이라는 말이 있다. 유아기의 아기들에게 존재하는 독특한 환상인데 일반적으로 생후 6개월 이전에 아기들이 갖는 정상적 착각상태를 의미한다. 아기들이 출생하면 즉시 엄마를 알아보는 게 아니다. 그리고 몸은 엄마와 분리되었으나 아직 아기는 심리적 분화(differentiation)를 한 상태가 아니다. 그래서 배가 고파 울적에 엄마가 젖이나 우유를 물리면 만족스럽게 먹은 후 살짝 미소를 짓는 경우가 있는데 엄마는 이를 보고 아기 이름을 부르며 아이구 우리 아가가 젖 잘 먹으니 기분이 좋아 웃는구나라고 반응한다. 그런데 사실 아기들이 미소를 짓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즉 아기는 자신이 원하는 젖을 만족스럽게 먹은 후 이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아 내가 만족한 젖을 창조했어!” 즉 이 시기(6개월 이전)는 엄마란 객체와 아기()라는 주체를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가 나 같고 내가 엄마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작용하는 시기이다. 한가지 더 예를 들면 이렇다. 생후 2-3개월 정도의 아기가 아침에 일어나 옹아리를 하며 천정을 본다. 그리고 눈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본다. 그럼 무엇이 돌아간다고 생각하겠는가? 엄마가 이 모습을 보면 아기가 호기심 어린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생각하겠지만 아기 입장에서는 천정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천동설이요 천상천하유아(乳兒)독존이다.

이런 전능환상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아기의 뇌가 발달하면서 생후 6개월 이후가 되면 아기는 어른들이 느끼는 수준으로 서서히 현실을 지각하게 된다. “..누군가 젖을 주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구나..” “..내 눈이 돌아가는구나..” 선명하지는 않아도 서서히 아기의 전능환상은 그렇게 깨어지게 된다.

그러나 전능환상을 경험한 아이들은 환상의 맛을 보았기에 그러한 환상은 훗날 상상력의 자원이 되고 창조성의 근원이 된다. 하지만 병리적인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보면 이렇게 정상적 발달과정에서 존재해야 할 전능환상이 부재한 체 성장했다는 것이다. 전능환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돌보는 대상(care giver)이 자기대상처럼 반응해 주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전능환상을 채 누려보지도 못하게 되면 환상(fantasy)은 곧 바로 환멸(disillusionment)로 전락한다. 이러한 환멸은 거짓된 환상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것을 과대망상(delusion of grandeur)이라 부른다. 이러한 과대망상 속에는 자신에 대한 균형 잡히지 않은 이미지가 침투해 들어오기 때문에 한계를 정하는 것에 대한 선이 없다. 물론 그런 선이 너무 없으면 현실인식에 실패한 정신분열증으로 가게 되지만, 그런 선이 있음에도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망상을 현실처럼 믿게 된다면 그리고 그런 믿음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자신만의 신념이 된다면 당연히 극단적인 아집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런 관점을 갖고 교주들을 보라, 그리고 자기만이 카리스마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보스들을 보라. 사실 교주들만 그러는 것은 아니다. 분명 정통 기독교 교회 간판을 걸고 있는 개척 교회의 목사는 지하실 교회에서 매번 몇 명 되지도 않은 노인들을 모시고 집회를 했는데 항상 주제는 세계 선교였다..도대체..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있는 동네만이라도 복음화를 시켰으면 했는데 그는 동네 선교나 전도는 무관심했고 어떻게든 해외 선교, 세계 선교를 해야 한다고 교인들을 다그쳤다.

물론 불가능해 보여도 큰 꿈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언제나 과도함이 문제다. 대형교회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돈을 너무 많이 들여 교회당 짓고 부도나는 교회, 피눈물 나는 헌금 모아 만든 예배당을 경매에 내어 놓는 교회, 이단에게 건물을 넘기는 교회, 너무 크게 교회를 지어서 이게 교회인가 싶을 정도로 욕을 먹는 서울의 모교회..사실 이들이 그런 건물을 지을 적에는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런 목회자들은 스스로에게 속은 것을 모르는 것이라 본다. 무슨 말이냐 하면 프로이트에 의하면 인간은 의식만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살아가는데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문법이 다르다. 달라도 그냥 다른게 아니라 상이하게 다르다. 저들의 의식은 하나님의 영광이었으나 저들의 무의식까지 하나님의 영광이었을까? 원님 덕에 나팔 분다는 속담처럼 큰 교회 지으면 하나님의 영광 운운하지만 그 하나님은 안 보이는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는 교회 담임목사인 것이다. 그러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가 영광을 받고 누리는 것이다. 의식은 항상 아니라 말한다. 그러나, 무의식도 그렇게 말할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이전에 등장한 인물 세례(침례-세례에 해당하는 단어 baptist는 침례가 맞다)요한이 말한 고백을 진심으로 가슴 깊이 새겨야 했어야 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한복음 3 30. 그러나, 우리는 그도 흥하고 나도 흥하여야 한다는 논리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이 시대는 은밀한 자기 숭배가 판을 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것이다.

목회자들은 언제부터인가 교인들 눈치와 기분을 살피며 목회를 한다. 교인이 줄면 헌금이 줄고 헌금이 줄면 교회가 쇠해질테니 말이다. 그러니 조금 삐딱하게 보자면 하나님도 하나님이지만 교인들 기분이 하나님이다.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기 위해 할 말도 가려서 한다. 때로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이 좋다 라고 말할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못한다. 그러니까 제사장으로서의 목회자 역할은 잘 감당하는데, 예언자적인 직면이나 통찰은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자기도 모르게 우리 사회의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나는 코헛의 말대로 자기(self)가 건강해야 함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건강해지면 그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자기중심적(ego-centrism)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 중심적 타자 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 생각이 아니라 20세기 천재 신학자 본 훼퍼가 역설한 교회론이기도 했다. 그렇게 살려면 우선은 자아가 건강해야 한다. 건강한 자아만이 자기 포기가 가능하다. 건강한 자아를 경험해 본 적도 없는 교인들에게 워치만 니 식으로 자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앙적 가학일 수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아예 죽을 자아조차 없다. 하두 죽고 살아서 말이다. 좀 살려주고 죽으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착한병에 걸린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순종만 할 줄 알지 능동적으로 창조적으로 무얼 도전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순종은 잘하는데 용기가 없다.

한국교회가 저질 이단, 사이비, 신흥종교에 놀아나는 이유 역시 그간 교회가 보여온 폐쇄성, 지나치게 순종과 아멘만 강요하는 수직적 구조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리적인 교주나 보스들은 희망을 제시하는 듯 하지만 실은 자기만의 은밀한 욕심을 정당화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우리나라 굴지의 대기업 회장이었던 사람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도 냈지만 기업이 문을 닫고 말랐다. 세계가 넓은 건 분명한데 할 일을 너무 많이 벌여놓은 결과라고 한다. 일을 벌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관리하고 가꾸고 내적인 근육을 키우는 일을 하지 않은 결과였다. 나는 이것 역시 희망적 환상을 제시하는 듯 싶지만 자신만의 과대자기를 투사한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시간을 발표하기 위해 열 시간을 준비하며 희망을 말하는 사람과 한 시간을 발표하면서 영양가 없는 말 열 시간을 떠드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과대자기를 가진 교주나 보스들은 자기 꿈에 들 떠 있지만 제대로 된 리더는 그 꿈을 위해 수많은 고뇌의 시간과 실사를 거친다. 그런데 망상을 제시하면 기업은 망하는데 희한하게 종교는 흥한다. 그래서 사이비들이 더 판을 치는 것이다. 그런 망상에 목말라하는 수많은 심리적 거지같은 교인들이 그런 거짓 희망을 일삼는 잘못된 보스나 교주들에게 박수치고 옳다 떠들고 받들기 때문이다.

 

[출처] 당신이 교주되는 법 - 올해 안에 나올 변상규의 신간 일부|작성자 변상규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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