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적에 대한 증오심을 이용해 독일 국민을 결집시키려 했으며, 민중의 분노심을 자신의 세력 확장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불만으로 폭발 직전의 사람들에게 그 불만을 터뜨릴 공격 목표를 제시하면, 그들은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 쉽게 단결하게 된다. 히틀러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에 너무 많은 적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적은 어디까지나 소수여야 했다. 그는 국민들에게 절대 여러 적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민중의 증오를 이용해 대결 구도를 만들 때는 그 적을 소수로 한정해야 한다. 너무 많은 적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의 증오를 집중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대결 구도에서 제시해야 하는 적으로 적합한 대상은,
(1) 절대 다수의 민중에게 해를 끼치는 집단이어야 하고,
(2) 민중이 모두 결집했을 때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여야 한다.
나치 시대 독일의 유태인들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유럽인들의 반유태 감정은 이미 뿌리깊은 것인 데다, 경제 상황이 안좋은 당시 독일에서는 반유태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유태인들은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나, 수적으로는 소수였고 정치적 힘은 약했다. 따라서 독일 국민들이 모두 결집하면 물리력으로 충분히 쫓아낼 수 있는 상대였다.
프랑스 혁명에서는 그 적이 민중을 착취하는 귀족들이었는데, 당시 귀족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으며, 귀족은 인구 비례로 볼 때 절대 소수에 불과했으므로 민중이 모두 결속하면 충분히 힘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귀족은 공공의 적이 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의 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이들 둘 중의 한 조건이라도 만족하지 않은 집단을 적으로 설정한다면, 민중의 호응을 받기 힘들게 된다.
히틀러의 연설 내용은 항상 같은 형식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펼쳐 청중들에게 동의를 얻고, 그 동의를 바탕으로 다음 논리를 펼쳤다. 패배한 조국의 암울한 현실, 베르사이유 조약의 부당함,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적대감, 독일에 만연한 ‘타락한’ 문화에 대한 비판 등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하고 나서 역사에 대한 회고와 당의 강령 해설, 자신의 비전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독일은 민주주의로 굶어 죽고 있습니다!”와 같은 말로, 경제 파탄을 가져온 나약한 민주주의 정권에 염증을 느끼던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좌절을 독일 국민 전체가 겪는 좌절인 양 표현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의 연설 구조가 항상 똑같았다는 것은 그의 감정이 매우 단조로웠던 것을 의미할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만큼 그의 사상이 일관성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쓴 연설 원고들에는 자신이 사로잡혔던 수많은 원한들이 비난과 복수의 맹세로 쓰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외치기까지 했다.
“오직 저항과 증오! 증오만 있을 뿐입니다!”
증오는 매우 강렬하면서 솔직한 감정이다. 증오는, 방황하는 자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의기소침하고 불안한 국민들에게 소리 높여 적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워 주는 것이 그의 연설의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긍지와 의지, 반항과 증오, 그리고 증오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합니다! 복수를!”
행복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반면 불만이 많은 패배자들을 선동하는 것은 쉽다. 이미 내재된 증오심에 약간의 부채질만 해주면 되기 때문이다.
패배의식에 빠진 사람들의 감정은 극단적으로 치우치기 쉽다.
그리고 그런 패배자들이야말로 누군가가 나서 선동했을 때 앞뒤 가리지 않고 뛰쳐 나가 몸바쳐 투쟁하게 될 사람들이다. 특히 젊은 패배자들을 선동하는 것은 대중 선동에 대단히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장년층에 비해 의욕과 행동력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는 끝없는 과장법을 통해 적들의 음모에 대해 이야기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 맞설 것을 제시했다. 분노와 증오심을 불타오르게 하는것만큼 대중을 하나로 단결하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 히틀러는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허풍은 각종 영화 마케팅에도 이용된다. 1998년도에 나온 헐리우드 영화 <고질라(Godzilla)>의 경우, 영화사에서는 예고편 동영상에 고질라의 거대한 발자국이 도시의 아스팔트 바닥에 찍히는 것을 보여주었다. 매스컴들은 그 장면을 집중 보도했으며, 그것을 본 대중들은 <고질라>가 거의 완성된 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사실 영화 제작을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볼때 영화는 기대만큼 흥행하지 못했지만, 예고편이 나왔을 당시 고질라는 그 해 가장 히트할것 같은 영화 1순위였다.
크게 성공한 사업가들은 누구나 ‘뻥쟁이’ 기질이 있다. 래리 엘리슨(Larry Ellison. 세계적인 데이터베이스 회사 ‘오라클’ 회장)은 아직 개발을 개시하지도 않은 제품을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는 식으로 거짓말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떻게 보면,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매스컴에 마구 홍보해버리는 것은 자기 회사의 직원들에게도 자극이 될 수도 있다. 회사 내의 사원들이 그러한 외부 뉴스를 접하게 되면, ‘이 프로젝트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 ‘매스컴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일에 더욱 열중하게 되게 마련이다.
히틀러는 위대한 게르만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이상을 내세우고, 그를 위해서는 제국의 위상에 걸맞는 영토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평소부터 내세웠다. 그것은 국민과의 약속일 뿐 아니라 외부 세계에 당당히 선포하는 자신의 다짐이기도 했다. 이렇게 만인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공언한 것은 쉽사리 철회할 수 없게 된다. 즉, 이것은 ‘지켜야만 하는’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것이다.
설사 자신이 공언한 것이 환상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더라도, 그것은 대중들에 의해 ‘꼭 이루어야만 하는 것’, ‘반드시 이루게 되는 것’으로 믿어지고, 지도자 자신도 그렇게 믿게 된다. 일을 성공시키려면 남들을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감쪽같이 속일 수 있어야 한다.
뛰어난 선동가는 자신의 거짓말을 모두에게 진실처럼 믿게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도 믿어 버린다. 이렇게 함으로써 언행에 모순이 없어지고, 자신의 거짓말을 모든 대중들이 한 점의 의심도 없이 믿게 된다. 이렇게 되었을 때, 그것은 진실과도 같은 효력을 갖는다. 이미 온 세상에 선포해 놓은 굵직한 거짓말은 이미 철회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려, 당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야만 하는’ 의무감을 부여하고, 그것은 결국 모두에 의해 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회사 CEO들을 많이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들이 얼마나 허풍이 심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없는 데도 있는 척하고, 보잘것없는 것도 큰 자랑거리인 양 부풀려 이야기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보다 확실히 CEO들이 더 많이 가진 태도임에 틀림없다. 심지어 정직한 이미지로 알려진 안철수 씨(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으로 유명한)도 바이러스 백신이 만들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완성되었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는 약속한 날짜까지 백신을 완성하기 위해 밤을 새웠다.
히틀러의 카리스마는 끊임없는 자기 미화와 거짓말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은 온갖 허풍과 과장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자신의 자서전까지 선전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이다.
그 예로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자신의 국가주의 역사관이 학창 시절 역사 선생님인 레오폴트 푀치 박사(Dr. L. Poetsch)에게서 많은 감명을 받은 결과라고 쓰고 있지만, 이는 사실보다 매우 과장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민족주의 역사관이 어릴 적부터 형성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 어린 시절의 교사를 자서전에 끌어들인 것 뿐이다.
히틀러의 ‘뻥쟁이 기질’은 어쩌면 독일 국민들의 수요에 부응하는 것과도 같았다. 어지러운 사회 속의 힘없는 민중은 영웅을 갈망한다. 히틀러는 그것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자신을 신비로운 이미지로 포장하고 영웅시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국민들이 원하는 영웅을 창조해야만 했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지도자야말로 가장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히틀러는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더 잘 속아넘어간다.’라고 말했다.
또한, 히틀러의 거짓말과 과장은 일종의 자기 최면과도 같았다. 그는 <나의 투쟁>을 저술하면서 자신의 위대함에 대해 스스로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자신을 세뇌시켰다. 우리 주변에도 금전적인 것을 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 그래서 여자들이 동창회에 나가면 서로 자기 자랑만 하다가 들어온다는 말이 있다. 그리고는 자기가 한 말은 모두 거짓인데, 남들이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인 것 같아서 우울증에 빠진다. 우리는 남의 거짓은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는 반면, 자기 자신의 거짓말은 쉽게 믿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만일 자기 최면을 통해 스스로에게 세뇌시킨 매우 긍정적인 거짓말을 진짜처럼 믿게 되면 어떨까?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 쓴 수많은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위대한 인물로 포장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 책을 보고 그의 허풍을 믿었기 때문에 그를 따르게 되었고, 주위 사람들의 신뢰 속에서 자신도 스스로의 위대함에 대해 한 점 의심도 없게 되어 버렸다.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거짓말을 함으로써, 미래에 하고 싶은 일을 이미 한 것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공표해 놓음으로써 그것을 진실처럼 만들어 놓는 것이다. 대중이 설득되면, 그것은 거꾸로 선동자 자신이 설득되는 효과를 낳는다.
이는 연애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카사노바 스타일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에게 거짓말을 잘 한다. 반면, 정직한 남자들은 여자가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인기가 없다. 이는 대중 선동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너무 정직한 사람은 대중을 선동할 수 없다. 대중이 듣고 싶은 것은 냉혹한 현실이 아니라, 화려한 환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뛰어난 대중 선동가는 거짓말을 한다. 그것도 큰 거짓말을 한다.
히틀러는 백수시절부터 못말리는 공상가였다. 그는 마치 소년과 같은 상상력으로 독일의 미래를 꿈꿨다. 그는 갈고리 모양의 나치스 깃발이 독일 전체의 모든 지붕 위에 펄럭이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길을 가면서, 혹은 커피를 마시면서, 폴란드나 우크라이나 등 이웃 나라의 비옥한 영토를 빼앗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그러한 상상의 일부였을까? 알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전 독일인에게 알린 <나의 투쟁>은 그러한 백수시절의 수많은 생각을 글로 옮긴 것이며, 그의 힘있는 연설 또한 그러한 상상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백수 시절 허름한 방에서 꿈꾸던 공상이 그로 하여금 총통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하는데 적잖은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인것 같다.
이것은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과도 같다. 그리고 이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한 것은 히틀러만이 아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어떤 말을 할 것이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를 항상 상상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말 그대로 ‘상상 훈련’이다. 이런 훈련은 그가 나중에 진짜로 대통령이 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은 실제로 스포츠 선수들에게도 사용되는 훈련 방식이다. 농구 선수들을 훈련시키는 예를 들어보자.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선수들은 편안한 자세로 앉아 눈을 감고 자신이 경기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그 상상은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 되도록 자세하게 모든 감각을 동원하게 된다. 경기장 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 손에 든 공의 중량감, 공이 바닥에 튀기는 촉감 등… 되도록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
자세를 낮추고 공을 한 손으로 드리블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드리블을 하면서 상대편 선수를 따돌리고 골 앞까지 파고 들어 슈팅하는 과정까지를 생생하게 오감을 동원하여 상상해 나간다. 이같은 방식으로 슈팅 연습을 되풀이한 그룹은 실제로 연습시킨 그룹을 능가하는 슛 성공률을 보였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전은 누추한 방에서 빈둥거리며 정치 서적이나 읽으며 소일하던 시절에 서서히 세워져 갔다. 그는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읽으며 자신의 상상을 키워 갔다. 당시의 그는 누가 보더라도 한심한 건달 백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만이 자기 시간의 주인이라고 주장했다. 젊은 히틀러는 점심때쯤 느지막하게 일어나 거리를 산책하며 박물관 등을 들락거리다가 저녁에는 오페라를 보러 갔다. 그는 오페라에 완전히 열광하여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만 30번 넘게 보았다. 그러한 자신만의 시간은 의도적이었건 그렇지 않았건 간에 자신을 이미지 트레이닝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공상은 거의 병적이었다. 그는 깊은 밤까지 온갖 계획을 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는 나라를 새로 건설할 생각을 했으며, 독일의 주택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구상했으며, 각종 극장 건물이나 성, 그리고 전시회장 등의 아이디어를 스케치했다. 그는 담배나 술이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여 알코올 없는 국민 음료에 대한 구상을 했으며, 담배를 대신할 수 있는 대용물이 없을지 생각하기도 했다. 작곡 능력도 없으면서 바그너가 작곡하다 그만 둔 오페라 <대장장이 빌란트>를 완성하고자 애쓰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젊을때부터 못말리는 공상가였다. 백수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 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수많은 분야에 대한 구상을 해나갔다. 어느날 친구가 히틀러에게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빈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어.”
골방에 틀어박힌 백수가 이런 대답을 했을 때 그 친구가 얼마나 황당했을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가? 몽상가 히틀러는 나이가 들어서도 바뀐 것이 없었다. 다만, 젊은 시절의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손에 얻었다는 것만이 다를 뿐이었다.
현실 속에만 적응하고 사는 사람은, 대중을 선동할 수 있는 환상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 지도자가 되고 싶으면 상상력을 키워라.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에 대해 끝없이 공상하라. 갖가지 계획에 열을 올려라. 그것을 이미지 트레이닝으로 머리 속에 구체화하라.
히틀러의 비전은 물론 당시 시대의 요구에 영합한 것이기도 하지만, 끊임없는 공상과 상상력이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인생에서 실패한 공상가로만 여겨졌던 그는 불과 몇 년 만에 권력을 잡았던 반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기존 세력들은 급속히 몰락해 갔다. 히틀러는 1937년 연설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이렇게 외쳤다.
"누가 옳았습니까. 공상가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입니까? 결국, 내가 옳았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 성공적인 기업가들은 누구나 일을 시작하며 원대한 공상을 꿈꾼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창업자 손정의의 예를 들어 보자. 그는 처음 임시 직원 2명을 데리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는 창업 당일 제대로 갖춰지지도 않은 사무실에 사과 박스를 놓고 그 위에 서서, 열정적으로 ‘매상고 1조 엔’의 비전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손정의가 자신의 비전에 대해 매일같이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해 대자, 결국 그들 직원 둘은 모두 회사를 그만두었다. 직원들은 그를 심각한 과대망상증 환자 또는 사기꾼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이처럼 지도자의 공상은 때때로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원대한 공상이 조금씩 실천에 옮겨진다고 느껴지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이 추종자는 늘어가게 된다. 그 이유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먼저 커다란 비전을 제시한 사람이 이루는 것과 아무 예고 없었던 사람이 이루는 것과는 사람들에게 안겨주는 기대와 관심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저것을 해 내겠어!’라고 선포한 사람이 그것을 이루게 되면, 사람들은 감탄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 해낸 일은 우연으로 치부되어 무관심 속에 잊혀질 수도 있다.
지도자에게 말보다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묵묵히 실천만 하는 사람이 다수의 추종자를 얻어 지도자의 자리까지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먼저 무엇을 하겠다는 것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실행에 옮겨라. 이렇게 하면 미리 선포했던 대로 일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추종자의 수가 늘어나게 된다.
9개월 간의 형무소 생활 동안 히틀러는 <나의 투쟁>을 집필하여 자신의 주장과 사상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했다. 여기에서 그는 게르만 민족의 대 제국을 건설하겠다는 거창한 구상을 제시했다. 히틀러는 본래 이 책에 <거짓말, 어리석음, 비겁에 대항한 4년 반에 걸친 투쟁>이라는 장황한 제목을 붙였다. 그것을 당의 선전 부장이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나의 투쟁>으로 바꾼 것이었다.
나치스의 출판국장은 책이 별로 많이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여 책값을 보통 책값의 두 배 가량인 12마르크로 책정했다. 그러나 이 책은 히틀러와 측근들의 예상을 뒤엎고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 독일 전체에 돌풍을 일으켰다.
히틀러가 제시한 비전이 독일 국민들에게 먹혀들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제시한 비전이 이미 독일 국민들의 마음 속에 소망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기존의 조국 현실에 대한 분노를 국민들에게 불어 넣어 주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이나 유태인들, 그리고 독일에게 굴욕을 안겨준 이웃 국가들에 대한 적개심 등 기존에 국민들이 갖고 있던 불만을 자극했다.
즉 히틀러가 국민들에게 제시한 비전은 그가 처음부터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이미 독일 국민들이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며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가 불과 10년 남짓한 시간에 독일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던 이유가 크다.
지도자가 완전히 새로운 비전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대중이 간절히 원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여 그것을 비전으로 내세운다. 수요를 무시한 공급은 무시당하게 마련이다. 이미 민중의 욕구 속에 내재되어 있는 비전이라야만 그들 절대 다수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
히틀러는 자기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 모든 문제를 뿌리까지 추적해낼 수 있는, 그런 능력 말이다.” 그의 단순명쾌한 논리력은 사람들에게 알기 쉬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사회 문제이건 경제 문제이건 간에, 가장 중요한 핵심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 결과, 그는 매우 빠르게 가시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대중들이 지도자의 비전을 믿게 되는 것은 가시적인 성과가 지속적으로 보여질 때이다.
히틀러는 경제나 치안 등 민생을 대단히 강조했으며, 국민들에게 자신의 계획대로 계속 발전하고 있는 조국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폭스바겐 비틀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독일 최초의 국민차이고,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 아우토반 역시 히틀러 치하에서 건설된 것이다. 치안과 경제는 사실상 모두가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빌미로 히틀러는 자신의 독재 권력을 더욱 굳혀나갈 수 있었다. 어쨌건 그는 독일인들에게 자신의 비전이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을 입증했다.
지도자의 신념은 지도자 자신이 역경을 겪으면서도 굽히지 않을 경우 대중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평생을 감옥에서 살면서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나, 온갖 탄압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지켰던 간디의 경우를 보면 그 점을 실감할 수 있다.
만델라나 간디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그리고 히틀러는 그들처럼 선한 정치가도 아니었지만), 히틀러 역시 정치적으로 그러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가 정치 초기에 가장 큰 시련을 겪은 것은 1923년 11월 ‘맥주집 반란 사건’으로 불리우는 쿠데타를 기도했을 때였다. 당시 무능한 독일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은 독일 전체에 팽배하여, 바이에른 지방 정부가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중앙 정부를 손에 넣고 좀더 강력한 정부로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 득세하고 있었다. 그 때 독일노동자당(나치당)은 세력이 꽤 커져 있기는 했지만, 아직은 정치에 관심있는 남자들의 과격한 맥주 모임 정도로만 여겨지고 있었다.
그때 히틀러는 돌격대를 이용해 바이에른 정부의 요인들을 납치하고 정부 시설을 점거하는 것을 시도했다. 그의 목표는 바이에른 지방 정부가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중앙 정부를 차지하도록 하고, 나치스가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봉기는 진압되고 히틀러는 1923년 11월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는 의연한 태도로 자신의 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오히려 재판정에서 자신의 뜻을 더 분명히 발표하였다. 그러자 그는 ‘독일 재건을 위한 강력한 정부’를 주창한 사람으로 대중들에게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인기에 힘입어 그는 국가 쿠데타라는 중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겨우 5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나마 그것도 감형되어 9개월 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민중은 종종 강자의 편이 아니라 약자의 편에 선다. 특히 약자가 자신의 주장에 논리와 근거를 충분히 갖추고 있고,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다면 그는 정의(正義)로 비춰진다.
어려움에 처한 상황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어떤 난관이 닥쳐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마라. 오히려 그 시련을 더 많은 사회적 영향력과 추종자를 얻기 위한 계기로 생각하라.
히틀러가 언변에 뛰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주장에 그 근거와 논리가 뚜렷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1936년 베를린 대학의 초청으로 독일에 강연차 왔다가 히틀러와 단독 대담을 하게 되었다. 토인비는 히틀러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2시간 15분 동안 히틀러는 논리정연하고 명쾌하게 논리를 전개시켰다. 학술 강연자 중에서도 그처럼 오랜 시간 동안 한번도 이론의 갈피를 잃지 않고 말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히틀러가 이처럼 논리적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미 옥중에서 <나의 투쟁 (Mein Kampf)>을 집필하여 자신의 비전과 사상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독일이 언젠가 유럽과 세계의 지배자가 될 것이라는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였다. 또한 세계를 지배할 독일에게는 그에 걸맞는 드넓은 영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패배 의식에 길들어 있던 독일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기 충분한 것이었다.
지나치게 중립적이거나 특색 없는 주장만을 가진 사람은, 그가 아무리 언변에 뛰어나고 총명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단순하고 극단적인 주장으로 무장한 단순한 라이벌에게 밀리기 쉽다. 이는 2004년 미국 대선에서 케리 후보와 부시 후보의 대결 결과를 보면 쉽게 입증된다. 부시는 케리 후보에 비해 언변도 어눌했으며, 극단적이고 한쪽에 치우쳐진 논리만을 펼쳤다. 사실, 그들의 지적 수준의 차이는 부시 지지자들이 보아도 명백했다.
그럼에도 국민들은 부시를 선택했다. 부시의 노선은 그가 국민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반면, 케리 후보에게서는 국민들이 어떤 분명한 메시지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노선은 분명해야 한다.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그 방향성을 어떤 추종자라도 쉽게 알 수 있어야 한다. 정책적으로 어중간한 중립 노선을 지향하는 지도자는, 단순하고 분명한 방향성을 가진 도전자에게 지지율을 빼앗기기 쉽다. 사람들을 통합하여 리드하려면, 단순하고 분명한 노선을 제시하라.
자신의 비전이 뚜렷하다는 것은 좋은 업적을 이루건 악한 업적을 이루건 간에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한가지 권하자면, 비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글로 남기는 것이 좋다. 일기를 쓴 후 몇 년이 지난 후 읽어보면, '그때 내가 저런 생각을 했었나' 할 정도로 사람의 생각은 바뀌어가기 때문이다. 수년 전에 세웠던 목표를 꾸준히 실천해가려면, 어떤 형태로든 문서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글로 남겼듯이, 당신도 당신만의 투쟁을 글로 남겨 보는 것은 어떨까?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히틀러일 것이다. 특히 서구권에서 히틀러와 나치스에 대한 금기는 대단한 것이어서, 만화 '무한의 주인' 영문판을 보면 주인공 옷에 그려져 있는 卍자 문양에 대하여 '이것은 나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는 설명이 속표지에 장황하게 쓰여져 있을 정도이다.
그나마 무한의 주인은 성인용이라 설명이라도 달았지만, '포켓몬스터'의 모 캐릭터에서는 본래 있던 卍자 심볼이 영문판에서는 그대로 삭제되었다고 한다. 히틀러와 나치스 비슷한 것은 어린이들 근처에 가서도 안되는 것이니까.
히틀러가 실제로 그 악명에 걸맞는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여러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히틀러는 단지 분노와 증오에만 휩싸여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의외로 따뜻한 감수성과 긍정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것은 히틀러와 오랜 기간 함께 일했던 측근이나 비서들에 의해 공통적으로 증언되고 있는 내용이다. 다음은 히틀러에게 있었던 하나의 일화이다.
히틀러가 자신의 차를 몰고 어느 마을에 잠시 들렀을 때, 그는 차에 탄 채 마을의 한 어린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히틀러는 직접 운전을 하고 있었는데, 그 소녀는 그가 히틀러인 줄 몰랐다. 대화를 하면서 우연히 그 날이 소녀의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히틀러는 소녀를 차에 타도록 했다. 그는 소녀를 다른 마을로 데리고 가, 그녀에게 케이크와 사탕을 사주고 장난감을 잔뜩 안겨서 돌려보냈다.
어쩌면 이는 선전을 위해 지나치게 미화시킨 에피소드일지도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이러한 친절한 행동을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수없이 베풀었으며, 그러한 친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히틀러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다는 것이다. 비서에게는 몸소 생일 선물을 챙겨 주었으며, 측근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에는 부하들 모두에게 음식이 나온 후에야 수저를 들 정도로 사려 깊었다.
히틀러에 대해 깊이 알면 알수록 사람들은 그의 모순적인 면에 부딪쳐 혼란스러워 한다. 그는 먹기 위해 동물을 도살하는 것을 끔찍하게 생각했으며, 평소에도 동물 보호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히틀러가 실권을 잡은 후 가장 먼저 통과시킨 법안 세 개는 모두 동물 보호에 대한 것이었다.
1936년 그는 “게와 가재 등의 갑각류를 요리할 때는 끓는 물에 넣어 빠르게 죽여야 하며 반드시 한 마리씩 죽여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많은 논의 끝에 그것이 갑각류를 죽이는 가장 인도적인 방법이라고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시든 꽃을 버리는 것을 무척 가슴 아파했기 때문에 꽃으로 실내를 장식하는 것을 금지하기까지 했다.
히틀러는 잔혹하면서도 인간적인 일면이 있었고, 파괴적이면서도 건설적이었다. 모순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히틀러는 분명 밝은 일면을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다. 초반에 그를 성공하게 만든 것은 그러한 밝은 측면이었지, 그의 파괴적인 측면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반면, 그의 어두운 측면은 그를 후반에 몰락하게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리더의 성공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에게 충실한가에 달려 있는데, 부하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우러나와 자신에게 충성하게 하는 것은 완전히 냉혈한과 같은 지도자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일찍부터 외톨이였다. 그의 공상하는 습관은 이런 외톨이 기질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성격으로 인해 외로움을 종종 느꼈다.
그는 사람들과 항상 일정한 선을 긋고 거리를 두었지만, 주변에 사람들을 두는 것을 필요로 했다. 경호원, 하인, 운전수, 비서 등이 그의 말동무였다. 그는 사진사였던 하인리히 호프만 같은 예술가들과도 교분을 쌓았다. 히틀러를 가까이서 접했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무척 다정하게 대했다고 증언한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이 다정다감한 지도자 밑에서 잔혹한 인종 청소가 단행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의 연설은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는 심리 치료의 역할도 했다. 이는 마치 마릴린 먼로 같은 배우가 평소 생활에서는 외로움과 공허함으로 고통받았지만, 카메라 앞에만 서면 수많은 관객들에게 자신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덜었던 것과도 비교할 수 있다. 히틀러는 청중 앞에 서서 그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잊었다.
그러한 외로움 때문이었는지, 히틀러는 부하들의 능력보다 충성심을 더 우선시했다. 그는 처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충성한다고 여겨지면 놀랄 만큼의 관용을 베풀었다. 예를 들어, 히틀러의 경호 대장 브루노 게세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술에 취한 상태에서 심각한 총기 사고를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히틀러와 오랜 동료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호대에서 해임되지 않았다.
공군을 이끌던 헤르만 괴링 역시 마찬가지로 군대를 통솔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럼에도 히틀러는 그의 전문성보다 충성심을 높이 샀다. 이처럼 부적격자를 등용한 결과, 그는 지도자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외로움에 시달리는 리더가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할 경우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충분히 보여준다.
탁월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체로 외로운 과정이다. 따라서 위대한 인물은 철저한 오랜 준비 끝에 사람들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시키려는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한 욕구를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라.
단, 외로움이 당신을 파멸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지도자의 외로움은 종종 공과 사를 구분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외로움은 대중 집회에서의 연설을 더욱 활기 있게 만들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리더십 면에서는 자신을 파멸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훌륭한 리더십은 확고한 원칙이 바탕되어야 한다. 아끼는 부하가 군법을 어기자 눈물을 흘리며 참수했다는, 제갈공명의 '읍참마속'을 기억하라.
히틀러의 연설 스타일은 광적일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며 감정적이었다. 논리적이고 차분한 독일인의 국민성을 감안해볼때 히틀러의 스타일은 매우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의 넘치는 에너지는 오랜 동안 쌓여 응축된 분노에서 나왔다. 자신의 답답했던 젊은 시절의 감정이 폭발하면, 그에게서는 에너지 넘치는 청산유수의 언변이 흘러 나왔다. 토크쇼의 달인 래리 킹(Larry King)은 어떤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가에 대해 다음 네 가지 유형을 들었다.
1.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진 사람
2. 자신의 일을 분명하고 흥미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
3.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
4. 화가 나 있는 사람
네번째는 조금 의외이지만, 래리킹의 설명에 의하면 화난 사람의 입에서는 훨씬 강렬하고 설득력 있는 열변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히틀러 역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있는 젊은이였다. 본래 나치스의 전신인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 DAP)’은 말이 정당이지, 실제로는 십여명에 불과한 남자들끼리 저녁에 모여 맥주를 마시며 정부 욕이나 하던 모임에 불과했다.
우연히 그 모임에 참석한 31세의 히틀러는 연설자의 지루한 연설에 분개한 나머지 연단에 올라가 그를 쫓아내고 '한마디 하겠다'라고 나서서 일장 열변을 토했는데, 그것이 사람들에게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일을 계기로 히틀러는 독일 노동자당 간부인 드렉슬러에게서 ‘귀하의 입당을 허가함. 9월 16일 열리는 독일 노동자당 위원회에 참석하기 바람’이라는 엽서를 받았다. 그 모임을 쓰레기라고 생각하고 있던 히틀러는 황당한 나머지 드렉슬러를 비웃었지만, 고심 끝에 결국 1919년 9월 16일 독일 노동자당 위원회에 출석하여 입당 수속을 했다. 그것이 바로 히틀러와 독일 노동자당의 첫 인연이었다.
화난 사람이 말을 잘 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에서 축적된 수많은 생각들이 있기 때문이며, 그 생각들을 표출할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 동안 사회에 대한 불만, 굶주림, 좌절 등을 경험했다. 1차 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얌체 같은 병역 기피자들을 보고 분노했으며, 도시에서 수많은 위선과 이기주의를 목격했다. 물론 히틀러도 다른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유태인에 대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가 언변에 유창했던 이유는, 자신의 분노를 언어로 조리 있게 표현해 내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노라는 것은 매우 직선적이며 정직한 감정이다. 증오와 분노는 전염성이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증오를 부추기는 것은 사랑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요약하면
(1) 분노한 상태에서는 언변이 유창해진다.
분노한 사람은 말도 잘한다. 누구나 분노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부조리를 자신의 힘으로 고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분노를 유창한 언변의 자양분으로 활용하라.
(2) 분노는 가장 부추기기 쉬운 감정이다
대중에게서 가장 부추기기 쉬운 감정은 바로 분노이다. 분노로 대중을 움직인 선동가는 있어도, 사랑으로 대중을 움직인 선동가는 없다. 마하트마 간디 같은 경우도, 비록 비폭력이었기는 했으나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인도인들을 착취했던 영국에 대한 분노였다.
대중을 손쉽게 움직이려면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분노를 일깨워 줘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증오심에 살짝 점화를 해주는 것 뿐이다. 그 이후는 당신이 애쓰지 않아도 대중이 스스로 움직이게 된다.
똑똑한 사람의 이성보다 무식한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하라
행복한 사람은 유혹하기 힘들다. 반면, 불행하거나 상처입은 사람은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 당시 독일 국민들이 그랬다. 히틀러가 독일인들에게 공감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사회의 낙오자로서 살았던 젊은 시절에 대해 갖고 있던 불만이 뛰어난 연설을 통해 군중들과 공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자신의 좌절을 독일 국민들의 좌절로 감정 이입하는 데 성공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의 불만이 무엇인지 정확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대중이 일용할 빵에 굶주려 있듯이 정치적인 이상에도 굶주려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정신적 굶주림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운동은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만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국민들이 느끼는 좌절을 자신의 이상으로 채워 줌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뇌에는 수많은 공간이 있는데, 당신이 구호로 그 곳을 채우면, 그 반대의 것은 나중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뇌 속의 공간은 이미 당신의 구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추종했던 평범한 독일 국민 중 하나였던 쿠어트 뤼데케라는 상인은, 히틀러의 연설을 보고 느꼈던 열정적인 흥분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일순간 나의 비판 능력은 모조리 멈추었다. 그 감정을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가 독일의 수치에 대해 말했을 때, 나는 어떤 적을 향해서도 달려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가 독일 남자들의 용기에 호소했을 때, 그것은 마치 무기를 들라는 외침같이 들렸다. 그의 설교는 마치 신의 계시 같았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을 잊은채 연설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의 최면술은 이미 수천 명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마치 한 사람처럼 만들고 있었다. 나는 실망감과 좌절에 지쳐 있는 32살의 남자였고, 마땅히 무엇을 해야할지 찾지 못한 채 삶의 의미에 굶주려 있었다. 나는 영웅적인 것에 열광했지만, 영웅을 갖지 못한 애국자였다. 그 때 이 남자의 의지와 진솔한 설득력이 정열을 통해 나에게 넘쳐 들어오는 듯했다. 이것은 마치 종교적 체험과도 같았다.
히틀러의 그러한 격렬한 감정은 자신이 겪었던 실패한 젊은 시절에 쌓였던 증오에서 나왔다. 그는 1907년에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위해 지원했지만 낙방했다. 그는 1908년에 미대 입시에 다시 지원했지만, 그가 제출한 작품은 기준에 미달하여 아예 응시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는 이 두 번째 실패 이후 심한 모욕감을 느끼고 모든 사람들의 눈 앞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렸다. 그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도 매우 컸지만, 주위 사람들에게 체면을 세우지 못했다고 여긴 것 같다.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친구 쿠비체크와의 우정도 그 때 끝나버렸다.
이러한 경험 탓에, 그는 평생 학교와 고등 교육을 증오했으며, 나약한 지식인들을 경멸했다. 그것은 <나의 투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학문적 교양이 별로 없더라도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결단력과 의지력에 찬 인간이, 지혜가 뛰어나며 허약한 인간들보다 사회에 더 가치가 있다. 유식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민족이 만약 육체적으로 허약하고 나약한 평화주의자라면, 하늘을 정복하기는커녕 이 지상에서의 생존도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운명을 결정하는 험난한 투쟁에서는 무식한 자가 패배하는 일이 거의 없다. 오히려 지식이 있기 때문에 가장 나약한 행동을 하게 되는 자가 패하게 된다. 썩은 육체는, 아무리 훌륭한 정신을 불어넣어도 전혀 아름다워지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성격적으로 유약해 쉽게 흔들리고 비겁한 인간에게는 최고의 정신적 교양이 있어도 전혀 훌륭해질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고학력자들과 지식인 층을 폄하했을 뿐 아니라, 선전에서도 지적인 면은 최소화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학문적인 측면이 적어지고 주로 감정에 호소하는 측면이 많아질수록 선전의 효과는 커진다. 소수의 지식인이나 학자들을 만족시키는 선전은 좋은 선전이 아니며, 그런 선전은 대중에게 별 영향을 주지도 못한다. 그의 연설이 대중에게 감명을 주었던 것은 무엇보다 연설에 감정과 에너지가 넘쳤고, 그것이 청중의 마음을 들뜨게까지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곡가 바그너는 히틀러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음악가로 유명하다. 바그너는 뛰어난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음악 이론이나 종합 예술에 대한 글도 집필했는데, 히틀러의 군중 집회는 바그너의 예술 이론에 부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바그너에 따르면 예술이란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1.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는 국민 전체의 것이어야만 한다.
2. 예술은 어떤 특수한 시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바그너는 그 예로 신화(神話)를 들었다).
3. 예술이란 인간적인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예술은 인간 전체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술, 시, 음악 등의 개개의 미술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적인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이들 예술은 모두 한데 뭉쳐서 종합 예술로 만들어져야 한다.
히틀러의 군중 집회는 정치에 관심 있는 일부 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바그너의 첫 번째 예술론에 부합하는 것이다.
또한 히틀러는 당시 독일이 겪고 있었던 암울한 상황을 선동에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 해결책으로는 어떤 특수한 정책을 내세운다기보다 모든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론적인 방향만을 제시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정책으로는 국민을 분열시킬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이 어떤 특수한 시대에 사로잡혀서는 안 되며 인간 본성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그너의 2번째 원칙과도 부합한다.
또한, 히틀러는 대중 선동과 집회의 양식에 다양한 예술적 효과를 사용했다. 붉은색, 흰색, 검은색으로 디자인된 강렬한 나치 문양, 거대한 깃발을 이용한 조형적/시각적 효과, 화려한 조명, 장엄한 군대의 행진, ‘하일!’하고 일사불란하게 외치는 반복적인 함성, 종교적인 비장함마저 엿보이는 나치식 경례법 등은 모두 종합 예술을 이해할 줄 아는 자만이 구상할 수 있는 정교한 의식의 요소였다. 이는 개개의 예술이 고립된 채로는 사람에게 충분한 감동을 줄 수 없다는 바그너의 3번째 원칙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히틀러의 대중선동술의 기저에는 바로 이러한 이론적 바탕과 치밀한 기획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이처럼 면밀히 계산된, 인간의 심리를 조종할 수 있는 모든 기술을 총동원하여, 히틀러는 전국민을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로 만들어갔다.
다음은 누군가가 쓴 시의 일부이다.
그녀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황금빛 파도처럼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밝은 봄하늘이 그 위로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은 순수하고 빛나는 행복이었다.
이 글을 누가 썼을 거라고 생각하는가?
바로 젊은 시절의 히틀러이다.
지금 우리가 히틀러에 대해 알고 있는 사악한 이미지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그의 티없는 감수성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한 감성은 다른 증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1907년, 18세의 히틀러는 어머니가 죽은 것을 나중에야 알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상태에서 어머니를 돌보았던 주치의를 만났다. 그 의사는 “그처럼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는 젊은이는 이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나중에 나타나는 그의 광기와 잔혹함에 비추어볼 때, 젊은 시절의 이러한 면모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리 단순한 존재가 아니어서, 히틀러라는 인간에게 해맑은 예술가의 감수성과 사이코패스의 잔혹함이 하나의 패키지로 묶여 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태생적으로 그는 현실보다 이상을 중시하는 쪽이었으며 그것은 여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젊은 시절 애정을 느꼈던 어떤 소녀에 대해 그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기는커녕 자신을 알리기조차 꺼렸는데, 그 이유는 수줍음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환상이 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는 산책길에서 가끔 보았던 그 소녀에게 수없이 많은 사랑의 시를 썼다. 그는 그 소녀를 ‘벨벳 옷을 입은 채 백마를 타고 꽃이 핀 들판을 달리는 공주’라고 묘사했다. 맨 앞에서 본 글은 히틀러가 그 소녀를 향해 쓴 시의 일부이다.
그는 직업에서 역시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했다. 그는 ‘밥벌이’를 위한 직업을 경멸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욕구가 미대 입시에 두 번이나 실패함으로써 좌절된 후로, 그는 점점 자신이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요아힘 페스트는 '히틀러 평전'에서 이렇게 썼다.
히틀러는 깊은 밤까지 린츠 시의 도시계획 변경에 대한 서투른 계획에 열을 올렸고, 극장건물, 호화주택, 박물관이나 혹은 도나우 강에 세울 다리의 설계도들을 그리곤 하였다. 그는 35년 뒤에 독단적인 만족감에 휩싸여, 애송이 시절의 설계도대로 그것들을 세울 것을 지시하였다.
젊은 시절의 히틀러가 예술에 관심을 쏟은 것은 타고난 감수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현실 속의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상상의 세계를 선택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 사회는 너무도 좁고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에게는 현실을 도피할 만한 수단이 필요했다.
입시에 두번이나 실패한 후 현실 속에 찌든 채 찌질하게 혼자만의 공상에 빠져 있었던 젊은이, 맑은 예술적 감수성과 현실에 대한 분노를 함께 갖고 있던 야심가, 그것이 바로 젊은 시절의 아돌프 히틀러이다. 그리고 후에 그는 자신의 예술적 감성과 사회에 대한 분노, 그리고 이상적 사회에 대한 광기어린 비전을 결합하여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중선동술을 개발하고, 그 기술을 이용해 독일 국민들을 사로잡아 총통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풍부한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평소 예술에 많은 흥미를 갖고 감수성을 발달시키려는 훈련을 해야 한다. 히틀러는 특히 웅장하고, 장엄하고, 위대한 것들에 대한 감수성이 발달되어 있었다. 그가 바그너를 좋아했던 것이나, 오페라를 좋아했던 것, 그리고 건축에 흥미를 가졌던 것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그는 화가 지망생 시절 건축물에 흥미가 많아 그의 그림에서는 건축물이 주된 소재로 등장하고, 인물화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음은 <나의 투쟁>의 일부분이다.
나는 점점 나이를 먹음에 따라 건축에 흥미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당시 나는 이러한 흥미를 화가로서의 재능의 하나로 생각하고, 예술가로서의 틀이 이렇게 넓어져가는 것을 내심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독일 제국의 도시를 자신이 디자인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고 있었다. 젊은 백수 시절, 그는 바로크 양식의 옛 건축물 앞에 서서 몇 시간이나 매료되어 서 있곤 했다. 당시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실업자 청년에 불과했지만, 머리 속에서는 조국의 미래에 대한 수많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미술 도구를 들고 다니며 그림에 몰두했으며, 어쩌다가 멋진 건축물이 머리 속에 떠오르면 밥을 먹다가도 건물이나 기둥, 아치형 문 등을 신들린 듯 스케치하곤 했다. 그리고 자신이 구상한 위대한 건축을 상상하며 홀로 감동에 젖곤 했다. 그는 반항 정신과 예술적 감수성을 동시에 지닌 청년이었다. 이러한 특징은 감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대중 선동 기술에 비옥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는 – 다른 많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 자신을 예술의 옹호자로 생각했다. 그는 음악이 자신의 청춘을 해방시켰다고 믿었다. 히틀러가 독일의 작곡가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1883)의 음악을 좋아했던 것은 유명하다. 그는 음악, 미술, 공연 예술 등에 대해 모두 관심을 가졌지만,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바로 음악이 있었다.
그가 좋아했던 미술 작품은 바그너의 음악에 어울리는 분위기의 것들이었다. 그는 루벤스의 화려함을 좋아했고, 루벤스의 화풍을 모방한 한스 마카르트라는 화가의 그림도 좋아했다. 또한 그가 좋아했던 오페라 역시 바그너의 작품이었다.
히틀러의 절친한 (그리고 유일한) 친구였던 쿠비체크는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Rienzi)>를 함께 관람하고 난 다음에 히틀러가 얼마나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진술하고 있다. 히틀러는 그 작품의 장엄하고 극적인 음악성에 당장 압도되어, 그 후로 매일 밤 오페라 하우스를 드나들었다. 그는 바그너의 음악에 빠져든 이후로 그 음악의 정열과 넘치는 에너지를 자기 암시와 최면에 사용했다.
이러한 그의 취향은 나중에 대중 집회의 연출에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장중한 오페라와 종교 의식이 혼합된 듯한 독특한 분위기는 정치 집회를 종합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출은 조명에서부터 소도구 사용, 군중의 배치 등 모든 요소가 치밀하게 계산되고 의도된 것이었다.
이렇게 선동된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의 충실한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히틀러의 연설에는 충성의 맹세를 하고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연설이 끝날 때면 그러한 추종자들이 미친 듯이 구호를 외치거나 군가를 불러 댔으며, 그 노래는 밤새도록 계속되곤 했다.
히틀러는 연단에 올라 자신의 에너지를 모조리 쏟아 부어 사람들을 선동하고는, 연설이 끝나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완전히 탈진한 사람처럼 연단을 내려왔다. 그는 연설을 할 때마다 푸른 색으로 물들인 양복을 즐겨 입었는데 연설이 끝나면 속옷이 온통 푸른 색으로 변해 버리곤 하였다.
히틀러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은 히틀러가 자신의 힘이 아닌, 무언가 초월적인 힘에 이끌려 연설을 하는 예언자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진술한다. 사람들은 그에게서 초자연적인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조국의 실패에 대해 비판할 때 그의 눈은 분노로 빛났고, 목소리는 격앙되어 갈라졌다.
마치 신들린 무당이 보통 사람이 생각하지도 못한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것처럼, 히틀러 역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조국의 실패를 비판하고, 독일인의 우수성을 찬양하며 군중을 고무시켰다.
이처럼 격렬한 감정을 이끌어 낼 수 있으려면, 감성이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연설만 할 줄 아는 일부 정치인들을 생각해 보라. 감정이 메말라 보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그가 아무리 설득력있는 논리로 무장하고 있어도 대중은 전혀 동조되지 않는다.
에너지가 느껴지는, 격렬한 감정을 실은 열정적인 연설만이 대중을 선동할 수 있다. 대중의 감정은 연설자의 감정을 한 발자국 뒤에서 따라가게 마련이므로, 대중의 열정적인 반응을 끌어내려면 연설자가 열정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차가운 공기와 뜨거운 공기 사이에서 강력한 폭풍이 일어나듯, 감정적 에너지란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애정이 섞인 가운데서 폭발적으로 일어난다. 히틀러는 독일 민족에 대한 애정과 그들의 적(유태인 등)에 대한 분노를 에너지의 원천으로 삼았다.
나치스의 선전 원칙 중 첫번째는 ‘청중을 냉정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연사는 열정적인 에너지로 청중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궈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설자 자신의 감정이 풍부해야 하며, 평소에 예술적 감수성을 예민하게 발달시켜 놓아야 한다.
물론, 히틀러의 연설이 처음부터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그 당시 독일인들은 패전와 경제 침체 등으로 인해 깊은 패배의식에 물들어 있었다. 패배자들은 대부분 차갑고 냉소적이다. 따라서 히틀러의 진지함이 서툴게 표현되었다면 냉소를 사게 될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도 처음에는 비웃음을 샀으며, 군중이 호응하지 않고 썰렁한 분위기만 남긴 채 실패한 연설도 있었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설득력을 갖게 되었는가? 언제부터 사람들이 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물론 히틀러에게는 진지한 연설이었다 하더라도, 처음에는 그러한 과장된 연기와 감정 폭발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초반에는 사람들이 어떤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재미있는 연극을 본다는 기분으로 구경삼아 모여들었다. 그러던 것이 1922년 경에는 1만여 명에 달하는 청중을 동원하게 발전한 것이다. Hitler's Wonderland (히틀러의 요지경 세계)를 쓴 마이클 프라이(Michael Fry)는 자신이 처음 히틀러의 연설을 들었을 때의 감상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히틀러가 연설하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완전히 코미디언이군! 코미디언이야!’ 그러나 20분 가량 지나자, 나는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들떠 있었다. 열정적인 설득력과 불타는 애국심,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성이 히틀러를 기존의 다른 선동자들로부터 차별화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에너지에 넘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떨 때는 그것이 그의 마음 속에서 고통스럽게 쥐어 짜 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냉소적인 사람들은 진지하고 열정적인 사람을 처음에는 비웃을지 몰라도, 그 사람의 열정이 끈기와 일관성을 갖고 지속되면 호기심을 갖게 되고 동조하게 된다. 태어날때부터 냉소적인 사람은 없다. 냉소란 후천적인 것이며, 애초부터 냉소적인 태도가 생기는 이유는 실패로 받은 상처 때문이다. 따라서 냉소주의자를 선동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고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히틀러가 냉소와 무기력으로 지쳐 있던 독일 국민들의 열정을 깨울 수 있었던 것은 1차 대전 패배의 결과로 생긴 굴욕적인 일들을 비판함으로써 그들이 내심 불만스러워 했던 것을 자신이 앞장서서 비판해 주었고, 독일 국민들의 우수성을 강조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논리는 항상 비슷했다.
“독일은 국제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 하지만 독일 국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 우리는 민족 공동체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도약해서 세계에 우리의 힘을 알려야만 한다.”
이러한 논리는 격렬한 감정 속에 섞여 들어가 강력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고, 이러한 방법으로 히틀러는 무기력에 찌들어 있던 독일 국민들을 놀라울정도로 쉽게 선동할수 있었다.
당신 자신이 야심찬 정치가라고 가정해보자.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좋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당신은 유권자의 감성에 호소해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좀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역사적으로 볼때 유권자의 이성에만 호소하는 정치가는 모두 실패해 왔다.
당신과 직접적으로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은, 전체 인구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런 소수의 사람들은 당신을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지지한다. 즉 그들은 당신이 성공하고 권력을 잡을 경우 자신들에게 돌아올 직접적인 이익 때문에 당신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 다수의 민중들은 당신이 권력을 잡게 함으로써 어떤 직접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신이 권력을 잡지 못한다고 해서 직접적인 손실을 입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차가운 머리보다는 뜨거운 가슴에 호소해야만 한다.
당신의 마음이 열정적이면, 주변 사람들도 그 마음에 이끌리게 된다. 당신이 목소리를 높이고 주먹으로 책상을 두들기면, 주변 사람들도 그 분노에 영향을 받는다. 당신이 흐느껴 울면, 주변 사람들도 그 슬픔에 동조된다. 이처럼 당신이 어떠한 격렬한 감정을 보이면, 그것에 어떤 식으로건 주변 사람들은 영향받게된다.
히틀러의 성공 비결은 바로 그 풍부한 감정, 즉 격렬한 감정을 실은 연설 스타일에 있었다.
히틀러의 연설은 전형적인 독일 정치가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감정이 격앙되면 손을 공중에 흔들어대다가 주먹을 연단에 내리쳤다. 목소리 높여 소리지르다가 갑자기 그것은 속삭임으로 변했다. 히틀러가 기존 정치가들보다 대중들에게 더욱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풍부한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열정을 사람들에게 표현하여 그들로부터도 뜨거운 열정을 이끌어내는 기술이 있었다. 독일 정치가들의 무미건조한 연설만을 접해 온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의 감정 풍부한 연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젊은 시절 항상 패배자의 모습으로 웅크려 살았던 히틀러는,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욕망을 이처럼 청중들 앞에서 폭발하는 에너지로 분출시켰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군중이 열광하여 소리치는 것을 경험하면 정말 고무된 느낌이 든다.”
무감정하고 논리정연한 태도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다.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감정의 폭풍이다.
눈빛은 카리스마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흐리멍텅한 눈의 카리스마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눈빛은 연사와 청중의 시선이 만나는 좁은 집회에서 유용하다.
눈빛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부탁을 한다거나, 설득을 한다거나 할 경우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당신의 눈빛이다.
예를 들어, 교통이 혼잡할 때 자동차가 옆 차선에서 끼어 들어오려 하면 사람들은 좀처럼 양보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창문을 열고 시선을 맞추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고약한 운전자도 양보를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른 자동차가 내 앞에 끼어 들어오는 것은 나에게 손해가 된다.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쳐다보면, 그것은 감정적인 것이 된다. 즉, 상대방을 바라본다는 행위는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키고 감성에 호소하는 효과가 있다.
눈빛의 교환은 바로 ‘감정’과 ‘느낌’의 교환이다. 지도자의 카리스마 역시 ‘감정’이자 ‘느낌’이며, 이것은 눈빛으로써 가장 효과 있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다.
대규모 집회가 아니라 좁은 공간, 즉 일상적 집무를 보는 환경에서 카리스마를 만드는 비결은 바로 눈빛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 있다. 히틀러는 상대방을 눈빛으로 압도하는 데 소질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를 원하는 상대방을 눈을 거의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신적으로 제압해야 할 상대를 찾으면 거의 눈을 깜박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의 회색 빛 도는 녹색 눈동자가 상대방을 뚜렷하게 응시하면 상대방은 그 시선에 압도되어 어쩔 줄을 몰랐다. 한 미국 대사의 딸은 그 눈을 본 순간이 너무 놀라웠으며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신비로운 눈빛은 부하에게 명령을 내릴 때, 혹은 자신을 찾아온 외교 사절을 심리적으로 압도할 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고 한다. 외모가 출중하지 않은 사람들도, 눈빛이 총명하면 훨씬 매력 있게 보인다. 사람은 단지 몇 분간 서로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이르게 된다는 심리학 실험이 있다. 또한 처음 만난 이성은 첫 3초간의 눈빛 교환으로 사귈지 안 사귈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그리고, 여성들은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남성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지 못한다.
어떤 호텔에서 히틀러의 일상적인 모습을 목격한 한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가 오후에 호텔에서 차 마시는 것을 목격했다. 나는 연단 위에서의 그가 열정으로 군중을 사로잡는 것이 단지 가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가 잡담하고 친구들과 농담을 할 때에도, 나는 그의 눈에서 강렬한 불꽃이 피어 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히틀러는 무명 시절 하숙집 방에 처박혀서 거울을 바라보며 끊임없이 눈빛을 관리하는 연습을 했다. 그 연습의 결과는 그가 부하들을 심리적으로 제압하고 권력을 잡았을 때, 무척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었다.
히틀러가 사용했던 신비화 전략은 오늘날도 유명인들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서태지는 언론이 자신의 아무 사진이나 사용하는 것을 싫어하여 소송도 불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수천장의 사진 중에서 가장 잘나온 사진 2-3장만을 직접 선별해 언론에 사용을 허가한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순간포착된 웃기는 모습 같은 것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염려가 없어짐과 동시에, 자신이 추구하는 이미지만을 대중들에게 선별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신비화 전략이 효과적인 또 한가지 이유는, 주어진 정보가 부족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상은 이미 주어진 정보에 의거해서 앞뒤가 맞도록 생성되게 된다. 예를 들어, 히틀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 미디어를 통해 다음 세 가지의 사진을 접하게 되었다고 하자.
① 히틀러가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모습
② 히틀러를 향해 열광하는 군중들
③ 히틀러가 꽃밭에서 어린 아이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사진
히틀러에 대한 예비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 이 세 장의 사진만을 접한다면, 그가 생각하는 히틀러는 열정과 리더십이 있는 데다 인자하기까지 한 훌륭한 지도자 상으로 그려질 것이다.
이 세 장의 사진만으로 히틀러가 나치 돌격 대원을 이용해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했다거나, 아우슈비츠에서 무자비한 유태인 학살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연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신비화 전략이다. 신비화 전략의 핵심은 이처럼 모든 것을 대중의 상상에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엄선된 자료를 미디어를 통해 공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중이 갖는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자료가 철저히 엄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사생활이 유출된다거나 잘못 찍힌 사진이 공개되는 일이 있으면 의도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해가 된다. 대중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대상은 더욱 이상적인 형태에 가깝게 되어 간다.
신비화 전략은 유명인이나 연예인만 쓰라는 법은 없다. 당신도 매력을 높이기 위해 이 전략을 쓸 수 있다.
신비화 전략의 기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말라는 것이다. 심지어 당신의 특기나 능력도 있는 그대로 모조리 보여 버리면, 그 순간부터 더 이상의 어떤 궁금증도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신비화 전략을 잘 구사하려면, 대중들이 모든 것을 유추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당신이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상상력에 보탬이 되는 잘 준비된 자료를 미디어를 통해 유출하는 것 뿐이다.
당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으면, 단지 당신이 가진 능력의 일부만을 잘 연출하여 슬쩍 암시하듯 보여주는 것으로 끝내라. 이렇게 하여 당신이 노출시키지 않은 다른 능력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만들어라.
히틀러는 장관들이 참석하는 비공식적인 파티에는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정치 초기에는 외국 기자들 앞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일도 많았지만, 권력을 잡으면서 점차 그런 일도 줄어들어갔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외교관이나 정치가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점차 카리스마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히틀러는 수상이 된 후 자기 사생활에 대한 모든 출판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국민들이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알게 된다는 것은 카리스마의 몰락을 의미했다.
언젠가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가 수영복 차림으로 찍힌 사진이 공개되자, 히틀러는 그를 마음껏 비웃었다. 그는 자기 같으면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의 수영복 입은 모습을 합성 사진으로 만들어 배포하면 어떻게 할까를 걱정했다.
그는 의사 앞에서 옷 벗는 것도 곤란해 했고, 복통으로 엑스선 촬영을 해야 하는 경우에도 촬영을 거절했다. 그는 더운 날씨에도 절대 맨살을 내놓지 않고 온 몸을 옷으로 철저히 감쌌다.
그는 자신의 과거나 사적인 영역이 대중에게 유출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과거 하숙집 시절의 한 친구를 죽이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게다가, 임시로 자신의 집안일을 도와주던 여동생 파울라에게 다른 이름을 쓰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그는 모든 사적인 것을 철저히 베일에 가리기를 원했다.
이러한 그의 두려움은 어쩌면, 저서 <나의 투쟁>을 통해 자신을 한껏 신비롭게 미화하고 이미지를 쌓아 올린 그가, 자신의 거짓말이 드러날 경우 신비감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살아 생전 그의 카리스마가 무너져 본 일은 없었다.
히틀러는 대규모 집회이건, 측근들과의 회의에서건 간에 특유의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 잡았다. 그가 열광적인 추종자들을 거느릴 수 있었던 데는 철저한 신비주의 원칙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히틀러는 젊었을 때부터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남들이 관심 갖는 것을 싫어했으며 누구와도 깊게 교류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인간 관계에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학창 시절에도 그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으며, 유일한 친구라고는 성격 좋은 아우구스트 쿠비체크 뿐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히틀러에게 설득되어 빈까지 따라가기도 했지만, 그나마 그와의 우정도 히틀러가 두 번째 입시 실패와 동시에 잠적함으로써 끝나고 말았다.
히틀러는 학창 시절 하숙집에서 살았지만, 이웃 중 누구도 그를 잘 기억해내지 못했다. 당시 학생들끼리는 서로 ‘너’라고 불렀지만, 히틀러는 ‘당신’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그것이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만큼 그는 동료들로부터 동떨어진 존재였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은 후에도 자신의 사생활이 드러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유지했다. 그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알프스에 위치한 별장에서 여가를 지내며 여러 가지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대중에게 심어진 그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섣불리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대중은 그의 모습이 가장 잘 연출된 사진을 보거나, 석양을 뒤로 하고 연단에 올라서 열변을 토하는 그의 실루엣만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이러한 신비화 전략은 사람들에게 많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심어 주었다. 독일인들은 총통의 별장이 있는 산으로 몰려가 그를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어떨 때는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총통의 별장 근처에서 그의 모습을 보기 위해 죽치고 기다리기도 했다.
급기야 히틀러의 별장 근처는 교통 규제 지역으로 정해졌고, 히틀러가 저녁 산책을 할 때는 군중들로부터 그를 경호해야 할 필요성까지 생겼다. 이는 마치 오늘날 열성 팬들이 연예인의 집 앞에 모여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일찍이 정치가가 국민에게 이 정도의 높은 인기를 누렸던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히틀러가 대중 집회에 쓰인 연출 노하우는 그 뒤로도 발전하여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더욱 빛내주게 되었다.
베를린 올림픽은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정부의 강력한 지원에 의해 웅장함을 과시한 대제전으로 기록된다. 또한,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 깃발이 대회장 안팎에서 휘날리는 등 정치적 목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올림픽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들은 올림픽을 개최국의 ‘국위선양’과 연관시키는데, 이러한 개념을 집어넣은 것은 베를린 올림픽이 최초라고 보면 된다.
또한 베를린 올림픽에는 우승자에게 금메달 외에 월계관을 씌워주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의식 같은 분위기를 냈으며, 아테네에서 태양 광선으로 채취된 성화를 개최지까지 봉송하는 릴레이를 실시한 최초의 올림픽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이처럼, 베를린 올림픽은 ‘신성한 의식’을 연출하는 그들의 능력이 충분히 발휘된 전 세계인의 제전이었다. 게다가 이 대회는 최초로 중계방송된 올림픽으로 기록된다. 이는 스포츠 역사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대회를 기점으로 스포츠와 미디어의 만남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는 스포츠와 미디어에 대한 개념, 그리고 올림픽과 국위선양에 대한 개념, 그리고 월계관이나 성화 봉송 등의 다양한 의식(ritual)적 요소들이 나치스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는 점은 매우 충격적이다.
연설의 연출적인 요소로는 그 연설의 기획 의도와, 연설이 행해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연설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요소들을 동원할 것인가 등이 고려되어야 한다. 히틀러의 연설이 얼마나 잘 준비된 연출 하에서 이루어졌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의 유명한 5월 연설이 어땠는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1933년, 히틀러는 기존에 메이데이(May Day)로 불려 왔던 5월 1일(노동절)을 ‘국민노동의 날’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운 공휴일로 정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하였다. 행사의 목표는 나치스에 대해 별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이 행사는 독일의 모든 노동자를 도취시킬 수 있는 국민적 쇼가 되어야 했다. 여기서 히틀러가 한 연설을 ‘5월 연설’이라 한다. 그의 연설은 이 행사의 하이라이트였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 보고자 하는 것은 연설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어떤 연출 효과가 이용되었나 하는 것이다.
우선 대형 집회를 위해서는 수많은 군중들이 동원되었다. 그들 군중들은 베를린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이른 아침부터 행진에 참여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해고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각 회사의 근로자들은 회사 이름이 들어 있는 표지판을 들고 있었으며, 각자 배당 받은 집결지로 도착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이 행사장으로 이동해 가는 경로는 모두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그렇게 집결한 군중들과 연단 사이에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나치 당원들이 줄지어 섰다. 또한 연단은 거대한 깃발로 장식되어 위용을 자랑했다. 이러한 연출은 그 연설의 규모와도 관계가 있다. 과거 히틀러가 즐겨 연설하던 양조장이나 맥주집 등의 좁은 장소에서는 연사가 청중을 바라보며 연설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초대형 집회에서는 연사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멀리 떨어진 군중들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행사장의 분위기와 확성기를 통해 전달되는 음성 뿐이다.
규모가 큰 집회는 음성 전달이 확실하지 못한 단점도 있지만, 분위기에 대한 몰입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것은 메시지의 전달보다는 더욱 감성에 호소하는 비중이 더 커져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히틀러는 5월 집회를 일종의 장엄한 종교 의식과 같은 분위기로 연출했다. 다음과 같이 집회의 프로그램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보면 분위기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어둠이 깔릴 즈음, 수많은 깃발이 연단으로 집결한다.
제복 경찰과 나치 친위대원들이 연단의 앞좌석에 앉는다.
저녁 8시 서치라이트가 점등된다.
군악대가 행진곡을 연주한다.
연단에 히틀러가 등장한다.
선전 장관 괴벨스가 인사를 하고, 모두 묵념한다.
히틀러가 연설한다. 연설은 라디오로 동시 중계된다.
연설이 끝나고 독일 국가 합창
기념 식수식
군악대 연주, 군대 행진
불꽃놀이. 공중에 불꽃으로 거대한 나치 심볼 나타남
폐막 행진
이것은 오늘날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진부한 정치집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당시에 이러한 대규모 집회는 상당히 혁신적인 형태였다. 비유하자면 휴대폰 벨소리로 많이 쓰이는 모짜르트의 음악이 지금 우리에게는 진부하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대단한 명곡이었던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다시말하면 지금 그토록 많이 쓰이는 정치집회의 틀은 바로 히틀러와 나치스가 개발한 것으로, 나치스의 집회 방식이 오늘날 너무도 많이 모방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진부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튼 그당시 이러한 행사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개개인에게 거대한 공동체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함과 동시에 군대식 의식으로 질서를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나치스의 5월 집회에는 군대 의식과 종교 의식을 합친 것과 같은 장엄한 연출이 등장했다. 여기서 깃발과 건물장식, 음악, 제복 등은 물론, 집결 장소와 대중의 배열 등은 모두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것이었다. 이런 계획적인 연출은 히틀러의 연설을 더욱 효과적으로 만드는 사전 준비 작업이 된다.
한국인들이 경험하는 최악의 집회로는 학창 시절의 아침 조회를 들 수 있다. 특히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지루하게 계속될 때는 학생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도 좀이 쑤실 지경이다. 지루한 집회는 아무도 원하지 않으며, 누구를 위한 집회도 아니다.
히틀러의 집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집회는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으므로 다양한 오락거리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히틀러의 과장된 몸짓이나 흥분하는 모습 등 연극적인 요소에 흥미를 느껴 재미 삼아 연설을 보러 갔다.
히틀러의 연설회는 입장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정치 연설을 입장료를 받고 사람을 끌어들인다니, 일반적인 정치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벌어들인 입장료 수익은 초기 독일 노동자당(나중에 나치로 개명)을 지탱시킨 자금원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히틀러의 집회는 날이 갈수록 커졌으며, 나중에는 나치 친위대의 모습이나 군대 행진, 수많은 깃발, 각종 조명 효과 등으로 종합 엔터테인먼트의 모습이 되어 갔다.
집회나 모임이 성공적이려면, 그것은 반드시 즐거워야 한다. 사람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연구하라. 서커스, 마술, 뮤지컬, 만담, 콘서트 등 다양한 공연 예술을 연구하라. 집회에 각종 흥미거리 요소를 도입하여 청중들을 최대한 즐겁게 하라.
물론 그러한 모든 요소들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치밀하게 계획된 대로 행해졌다. 그것은 오페라 공연의 모든 요소가 무대 장치에서부터 배우들의 연기까지 미리미리 치밀하게 준비되어야 하는 것과도 같았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중을 선동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히틀러 개인의 즉흥적인 애드립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전에 계획된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히틀러가 왜 이런 준비에 철저했는가는 그의 크고 작은 실패의 경험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에는 열 명 남짓한 인원의 적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그렇게 경험을 쌓아가는 가운데, 그는 어떤 주제를 어떤 식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청중의 반응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일요일 아침에 열린 어떤 집회에서 실수를 했다. 그때 청중들의 반응은 ‘얼음처럼 차가웠다’라고 그는 회고했다. 그 이후로 그는 아침이 청중들을 설득시키는 데 좋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히틀러는 물론 선동가로서 천재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전 준비에 언제나 철저했다. 그의 연출은 단 하나의 세부 사항도 소홀히 취급된 적이 없다. 그는 당 전략과 같은 큰 노선을 정할 때 뿐만 아니라, 가장 하찮아보이는 세부적인 것을 정할 때까지 치밀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주요 집회 장소들의 음향 상태를 몸소 조사했으며 그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나 어조를 조절하곤 했다. 연설 장소로 사용될 각각의 양조장이나 지하 술집들의 음향 특성을 분석했으며, 집회장소의 분위기나 크기, 통풍 상태 등을 세밀하게 검사했다. 그는 성공적인 연출에는 철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발표나 프레젠테이션은, 연극처럼 사전에 모두 준비하라. 사람들은 연극이나 오페라는 미리 정해진 각본대로 철저히 연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연설이나 집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연설이나 집회가 성공적이려면 그 역시 연극이나 오페라처럼 철저히 준비되어야 한다. 사전에 집회 장소를 철저히 조사하고 모든 것을 사전에 계획하라.
기억하라. 철저한 준비만이 멋진 공연을 만든다는 사실을.
히틀러는 연출을 위해 깃발의 물결, 대규모의 군대 행렬, 그리고 극적인 조명 등을 사용했다. 특히 조명 효과는 마치 영화적 효과를 연상시킬 정도로 잘 사용했는데, 여기에는 서치라이트를 비추거나 횃불 등을 이용하는 방법이 쓰였다.
이는 오페라를 좋아했던 히틀러의 취향이 가미된 것으로, 이러한 무대 효과는 기존의 어떤 정치 집회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대형 오페라의 구경거리 요소를 정치 집회에 도입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연설이 시작되기 전에 점차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여타 영화에서 사용되는 전개 기법과도 유사성을 가진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에서는 클라이맥스의 전쟁 장면이 나오기 전에 그 준비 과정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빌드 업(build up)과정이 들어간다. 이는 영화 <반지의 제왕> 감독 피터 잭슨도 매우 중요시 했던 테크닉이다.
히틀러는 자신이 연단에 등장할 때에 분위기를 점차 고조시키는 빌드 업(build up) 기법을 사용했다. 높이 매단 깃발들과 장중한 행진곡, 구호, 노래들, 마치 종교 의식처럼 되풀이되는 ‘하일’ 하는 외침 등은 위대한 총통의 연설에 대한 기대감을 고취시키는 신비로운 분위기 고조 과정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고조를 위해 돈 주고 고용한 박수 부대가 동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일단 분위기를 띄워 주면 군중들은 알아서 그것에 편승하게 되어 있다.
또한, 히틀러는 서커스의 요소도 도입했다. 요란한 선전 트럭들과 벽보의 광고 문구들은 분명 서커스에서 배워 온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국민들을 다스리는 것은 빵과 서커스로 충분하다.”
결과적으로 그의 연설 무대는 마치 오페라와 연극과 종교 의식과 서커스의 각종 요소를 교묘히 종합해 놓은 것과 같은 특이한 것이 되었다.
히틀러가 연설하는 기록 화면을 보면, 그가 평소에도 대단히 거칠고 감정적이며 에너지 넘치는 인간일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히틀러가 연설을 할 때의 모습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다. 측근들이 전하는 그의 평소 모습은 부드러운 말씨에 온화하고 친절한 태도를 가진 사람으로 전해진다. 그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필요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연출할 줄 알았다.
히틀러의 한 개인 비서는 히틀러가 측근들과 점심을 거하게 먹고 난 후, 마침 그 때 영국 외교관이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일어났던 일을 진술했다. 당시는 히틀러가 영국과 관계를 험악하게 만들고 있었던 때였다.
히틀러는 당황하여 벌떡 일어났다. “이런, 그를 들여보내지 마. 난 아직 웃고 있거든.” 그는 측근들 앞에서 얼른 화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돌연 얼굴빛을 어둡게 하더니 눈을 부릅뜨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그리고 옆문으로 들어가더니 그 불쌍한 영국인에게 엄청난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10분 뒤 히틀러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채 돌아왔다. 그는 문을 닫더니 킬킬 웃으며 속삭였다. “이봐. 나 차 한잔 줘. 그 영국인 친구, 아마 내가 무척 화난 줄 알았을 거야.”
히틀러는 매우 훌륭한 배우였다. 그는 화가 나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분노한 모습을 연출하는가 하면, 군중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평소와는 다른 몸짓과 태도를 구사하기도 했다.
모름지기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연기에 뛰어나야 한다. 히틀러는 무명 시절부터 평소에 혼자 거울을 보며 연기 연습에 열중했으며, 그 결과 다른 누구보다도 연기에 뛰어났다. 히틀러는 종종 감정의 분출을 자제하지 못하고 발작적 행동을 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행동도 사실은 다 스스로 연출한 것이었다.
한 나치 장교는 히틀러가 분노로 미친 듯이 흥분했을 때 침이 입술로부터 턱까지 흘러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장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단 한 순간도 논리 정연함을 잃지 않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을 보고 그러한 발작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훌륭한 연기자가 되어야 한다. 기분이 좋을 때도 화난 척 해야 할 때가 있고, 기분이 침체되었을 때도 밝은 척해야 할 때가 있다.
평생 밑바닥에서 일하는 것이 싫은가? 리더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훌륭한 연기자가 되어라.
모두가 같은 대상에 열광하는 상황을 연출하라. 그러면 군중은 그 분위기에 편승하게 된다. 락 콘서트에 가 보면 모두가 일제히 무대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껑충껑충 뛰며 열광하는데, 그 중에는 스스로 흥에 겨워서 그러는 사람들도 있지만, 주위에서 모두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에 편승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혼자만 가만히 팔짱 끼고 서 있으면 이상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소극적인 사람들도 자기 주변의 사람들처럼 손을 흔들고 소리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행동하는 가운데 처음에는 서먹했던 사람도 시간이 갈수록 콘서트의 열기에 점점 도취되게 된다.
사이비 교주들은 물론, 심지어 유명한 종교 지도자들도 그런 심리를 이용한다. 모든 신도가 자신에게 열광하는 상황을 연출하여, 반신반의하던 신도들도 주위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정치 집회에서 종종 돈 주고 박수 부대를 고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박수 부대가 열광하며 분위기를 띄우면, 그 주변의 사람들도 분위기에 휩쓸려 똑같이 행동하게 된다. 그렇게 분위기에 휩쓸려 박수를 치는 가운데 그들은 진짜로 연사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어떤 특징적인 주문(chant)을 개발하여 그것을 군중들에게 반복하게 하거나, 어떤 특징적인 제스처를 개발하여 그 행동을 군중들에게 반복하게 하는 것이다. 주문이란 원시 종교 집회에서 ‘옴… 옴… 옴…’ 등의 되풀이되는 함성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락 콘서트에서는 사람들이 공연하는 밴드의 이름을 외치며 열광하는 것이 마치 주문과도 같은 효과를 준다. 나치스의 집회에서는 ‘하일’과 같은 함성이 되풀이되고, 군대가 행진할 때 일제히 나는 군화 소리가 규칙적으로 되풀이되는 것으로 분위기를 조성했다.
군중이 일제히 행하는 제스처를 살펴보면, 종교 집회에서는 큰 절을 하거나 손을 모으는 등의 행위를 모든 신도들이 되풀이함으로써 거룩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락 콘서트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야광봉을 일제히 흔들어 대어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한다. 나치스는 팔을 일제히 올리는 경례법을 통해 히틀러를 향한 절도 있는 충성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국빈을 환영하는 북한 주민들은 길가에 일렬로 서서 꽃이나 깃발을 열렬히 흔들어서 환영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처럼 모두가 하나의 대상에 열광하게 만드는 집회에서는 일제히 특정 제스처를 취하거나 특정한 소리를 반복하는 행위로 더욱 분위기를 띄울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의 뮤직 비디오 'Dangerous'의 첫부분을 보면, 공연장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열광적으로 환호하는 대규모 군중들과, 극도로 흥분한 나머지 실신하는 소녀들을 계속해서 보여준다. 마이클 잭슨이 노래를 하거나 춤추는 것은 아직 보여지지도 않았는데도, 엄청나게 몰린 군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보다 보면 ‘이야, 저건 뭔가 대단한 거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 에너지 넘치는 현장을 보다 보면 어느새 뮤직 비디오를 보는 사람의 심장도 뛰게 마련이다.
대중 집회는 개개인으로 하여금 그가 혼자가 아니며, 그와 사상을 함께 하는 거대한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대중 집회는 군중을 들뜨게 하고 용감하게 만든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개인이 처음으로 대중 집회에 발을 들여놓아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게 되면, 그는 우리가 대중 암시라고 부르는 마술적 영향에 압도당하게 된다.
히틀러는 집회를 여는 것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끊임없이 많이 열고 싶어했다. 초반에는 소규모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집회 참석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그는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48회의 정당행사에서 31번이나 연사로 출연하였다. 그의 어느 경쟁자도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자주 대중과 접촉하면서 그의 연설 기술은 점점 세련되어져 갔고, 대중과의 만남은 점점 열광적인 성격을 띄어 갔다.
당시의 행사 관련 자료를 살펴보면, 히틀러의 연설은 마치 오늘날의 락 공연처럼 청중들을 에너지에 넘치게 하는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벽보에서는 히틀러를 ‘빛나는 연설가’로 소개하고 있다. 그 벽보는 마치 공연 광고와도 같이 참석자들에게 ‘특별히 자극적인 저녁’을 예고했다. 그러한 집회에서 히틀러가 연단에 올라서면, 그는 우레와 같은 환영을 받았다.
히틀러는 집회의 횟수에 무척 집착했다. 1922년부터 그는 하룻밤에 열 개가 넘는 행사를 한꺼번에 열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행사에서 주요 연사는 히틀러 자신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히틀러는 단기간 안에 집중적인 선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히틀러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중요한 일은 점차 커지는 군중집회를 조직하는 것이다. 실내와 거리 곳곳에서 항의를 계속하는 것이다. 저항과 항의, 쓰러진 분노의 타오르는 파도가 우리 민족의 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또한, 히틀러의 대규모 집회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군대의 행진이었다. 히틀러의 한 측근은 행진이 사람들의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개별적인 생각을 죽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획일적이고 질서 정연하게 되풀이되는 움직임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뿐 아니라, 군중의 마음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중요한 심리적 도구가 된다.
서로 시선을 교류할 수 있을 정도의 소규모 모임에서는 짧고 강력한 메시지 전달이 효과적이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대규모로 모이는 집회에서는 의사 전달보다 분위기 조성에 상대적으로 더 중점을 두는 것이 좋다. 즉, 많은 사람들을 조종하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의사전달보다 감성적인 분위기 연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연사와 청중의 관계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면, 일상적인 모임에서도 서너명 가량이 모이게 되면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데 중점을 두게 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 – 대형 파티나 결혼식 등 – 에서는 개개인 사이의 의사 전달보다는 그 모임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비중이 더 쏠리게 된다.
모임의 크기가 커지면 사람들 하나하나간의 의사 전달보다는 모든 사람들이 어울리는 전체 모임의 분위기에 모두 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조성하는가가 그 모임의 성패를 좌우한다.
이를테면 어떤 회사에서 새해를 맞아 수백 명에 달하는 전 사원이 모두 모이는 신년 모임을 갖는다면, 그 모임에서 사장이 사원들에게 어떤 연설을 했는가 같은 것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새해 분위기 속에서 전 사원이 한 데 모였다는 사실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집회의 목적은 전 사원에게 새해에 공동체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함으로써 소속감을 재확인하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할 수 있게 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 전달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히틀러의 연출 방식은 집회 장소나 군중의 수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그의 연설은 때로는 짧고 강력했으며, 때로는 길고 반복적이었다. 전자는 소규모 회의에서, 후자는 대규모 집회에서 빛을 발했다.
비교적 좁은 공간에서는 언어 전달이 분명하며 청중과의 시선 교류도 가능하다. 청중은 연사의 모습을 확실히 볼 수 있고, 연사는 청중을 훑어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대규모 군중이 몰리는 야외 집회에서는 그러한 접촉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러한 곳에서의 연설은 마치 장엄한 의식과 같은 연출로 행해진다. 이런 경우 메시지 전달보다는 분위기로 심리를 압도해야 하는 것이다.
대규모 집회에서 사람들은 히틀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떤 집회 참가자는, “히틀러 씨가 분노에 사로잡혀 외치는 바람에 무슨 말을 하는지 뒤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라고 전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의식의 엄숙함과 함께 히틀러의 열정적인 제스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전체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무아지경에 빠질 수 있었다. 히틀러가 주도한 집회의 분위기을 짐작하려면, 오늘날의 락 공연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들이 느끼는 것은 히틀러가 매우 열정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가 말하는 메시지보다는 그의 에너지와 대규모 집회의 들뜬 분위기에 취할 뿐이었다.
연설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뒷받쳐주는 연출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대중 앞에 나설 때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로 극적인 분위기 연출이 중요하다.
연단에 올라서는 타이밍,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 연사, 그리고 보디 가드의 존재 등은 그런 연출에 효과적인 재료가 된다. 대중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당신을 한껏 기다리게 한 후 무대에 나타나라. 사회자로 하여금 당신을 요란하게 소개하도록 하라.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요란한 벽보와 선전 차량 등으로 당신을 선전하라. 히틀러는 이와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연설을 청중들에게 가장 극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좋은 목소리를 타고나지는 않았다. 그의 기분이 고조되었을 때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으며, 목소리는 종종 끊어지면서 귀에 거슬렸다. 또한 그가 흥분한 상태에서 연설할 때는 군중들은 그의 말을 정확히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이 낳은 최고의 웅변가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 심지어는 그의 적들까지도 – 인정한다. 그는 목소리 때문에 뛰어난 연설가가 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의 연설은 종종 길어졌으며, 그럴 때면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반복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설은 힘과 매력이 넘쳤다. 그는 청중들이 무슨 말을 듣고 싶어하는지 알았다. 사회에 대한 불만, 독일의 현실에 대한 암담함, 유태인에 대한 불만 등, 히틀러는 사람들이 속으로는 생각하고 있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것을 입 밖에 내어 말했다.
그는 청중이 듣고 싶은 말만을 들려주면서 그들의 감정을 고조시켰다. 때로는 청중들을 비난하기도 했지만 그는 즉각 그 공격의 화살을 다른 적들 –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유태인들 – 에게로 돌렸다. 그의 설득력은 주제를 이끌어나가며 군중의 심리를 고조시키는 능력에 전적으로 달려있었다.
또한, 히틀러는 극적인 분위기 연출에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연설하기 전에 보조 연설가를 내세워 짧은 연설을 하게 했다. 락 밴드 공연을 보면 원래 사람들이 보기 원하는 본 밴드가 나오기 전에 오프닝 밴드가 나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데, 이와도 비슷하다. 사람들은 오프닝 밴드를 보면서 본 밴드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오프닝 밴드가 짧은 연주를 마치고 나면 관중들의 마음은 일종의 ‘워밍업’이 되어 본 밴드가 등장할 때 더욱 열광하게 된다.
또한, 집회에서는 히틀러가 지나가는 통로 양쪽에 나치스 돌격대원들이 줄서서 그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켰다. 이것은 팝스타 마이클 잭슨이 유니폼 차림의 수많은 보디 가드들을 데리고 나타나는 것과도 비슷하다. 보디 가드들이 줄지어 서 있으면 그 호위를 받는 사람은 뭔가 ‘있어 보이는’ 느낌을 받게 된다.
히틀러를 호위하는 사설 경호 부대는 나치 친위대(SS)로 불렸다. 친위대에 들어가려면 외모와 키에 대한 일정 조건이 만족되어야 했는데, 이는 분명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것이었다. 히틀러가 등장할 때는 항상 북소리와 장엄한 군대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이러한 모든 세팅은 고도로 계산된 연출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남을 설득하려면 우선, 가장 좋은 시간과 분위기를 선택하라. 저녁 시간은 아침 시간보다 대중을 설득하는 데 유리하다. 특히 석양이 깔려 있는 아름다운 분위기에서는 대중을 설득하기 더 좋다.
이것은 개개인을 설득하거나 유혹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이성을 유혹하려면 시간은 반드시 늦은 저녁 시간으로 해야 하며, 장소는 되도록 아름다운 배경과 조명이 깔려 있는 곳을 선택해야 한다. 만일 야외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 시간과 장소를 아름다운 석양을 볼 수 있는 시간과 장소로 정하는 것은 무척 효과적이다.
히틀러는 야외 연설을 온 하늘이 붉게 물드는 석양을 배경으로 했는데, 석양이 깔릴 때는 하늘 전체의 빛이 신비롭게 변하며 황홀한 분위기를 주기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성이 마비되고 감성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기법은 연애에 활용할 수도 있다. 탁 트인 곳에서 온통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당신을 유혹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쉽게 흔들리게 될 것이다.
적절한 시간과 분위기의 힘은 이처럼 강력하다. 상대방을 당신 뜻대로 설득해 버리는 심리 조작술의 핵심은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성에 호소하는 데 있다는 것은 잊지 말기를 바란다.
히틀러 연설의 특징은 신비로운 무대 등장, 알기 쉬운 연설 내용, 그리고 정열적인 광신주의로 요약된다. 그는 언변도 뛰어났지만, 연출의 천재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가 자신의 연설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어떻게 연출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사람들은 모두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심리가 있다. 어떤 반응을 주면, 사람들은 누구나 똑같이 반응한다. 예를 들어 어두운 곳에서 한쪽에 빛이 나오면 우리는 빛을 쳐다보게 된다. 히틀러는 그러한 인간의 자연스런 심리를 이용했다.
그는 서치라이트 등의 빛이 나오는 쪽에서 연설하거나, 칠흑같이 어두운 강당에서 자신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연설하거나, 석양을 등지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했다. 이렇게 하면 모두가 그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히틀러는 연설을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청중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가장 낮은 늦은 저녁에 연설 시간을 잡았다. 아침에 말똥말똥하던 판단력은 한나절이 지나 저녁이 되면 점차 무디어져 방어를 풀고 남들이 하는 말에 쉽게 설득되게 된다. 히틀러가 저녁 시간을 애용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른한 저녁 시간에, 그것도 해가 서쪽에 떠서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가 연단에 서면 집단 최면 효과는 극대화되었다. 그는 야외에서 연설을 할 때는 언제나 멋진 석양을 등지고 대중들 앞에 서야만 했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날씨가 나쁘면 그는 아예 연설을 취소해 버렸다.
히틀러가 대중을 최면시키기 위해 저녁 시간을 얼마나 중시했는가는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침과 한낮에 사람들의 의지력은 다른 사람들의 의지와 의견에 대해 최선을 다해 반항한다. 그러나 저녁에는 타인의 지배적인 힘에 더 쉽게 굴복한다. 왜냐하면, 그런 회합은 모두 두 가지 상호 대립하는 힘 사이에 벌어지는 하나의 씨름 시합과 같기 때문이다. 위세당당하고 우월한 웅변술은, 자기의 정신력과 의지의 힘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보다는, 오히려 가장 자연적으로 저항력이 약화된 사람들을 더욱 쉽게 새로운 의지에로 이끌어가는 데 성공할 것이다.
히틀러는 금방 연단에 오르지도 않았다.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장중한 북 소리가 둥 둥 울리며 그의 등장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켰다. 붉은색과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강렬한 나치 깃발이 하늘을 메우고, 그렇게 기대감에 부푼 채 오랜 시간 기다린 군중들의 앞에 붉게 물든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가 나타나면 그 곳은 당장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들은 이미 최면에 걸릴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집단 최면은 수많은 군중들이 동원된 가운데 이루어졌다. 히틀러는 대중 집회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대중 집회는 다음과 같은 이유만으로도 필요할 것이다. 개인은 새로운 운동의 지지자가 되는 데 있어서 고독함을 느껴 공포에 사로잡히기 쉽지만, 대중 집회 속에서는 보다 큰 공동체의 모습을 보게 되어 용기를 갖게 된다.
히틀러의 집회는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으며, 연설이 끝날 때쯤이면 모두가 집단 최면에 걸린 듯 비판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 했다. 히틀러는 온 힘을 다해 군중들의 사기를 고양시키고, 당시 독일의 사정에 대해 개탄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온 힘을 쏟은 연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끝나고 나면, 히틀러는 탈진한 사람처럼 비틀비틀 연단을 내려가곤 했다.
현대인들은 자신의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 자신이 아닌 다른 여러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는 이상 남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회사에서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일을 시키는 것처럼, 공식적으로 명령을 하고 그에 따라 움직여 줘야 하는 관계에서도 타인을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사람 다루는 것이 제일 힘들다”라고 말하며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런데, 수백만의 사람들을 집단 최면에 빠뜨려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 사람이 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이다. 우리는 그가 2차 대전을 일으키고 유태인을 학살한 장본인 정도로만 알고 있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비범한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젊은 시절의 히틀러는 대학 입시에 두 번이나 낙방하고 도시의 뒷골목을 전전하던 패배자와 같은 청년이었다. 이렇다 할 재능도 별로 없는 미술 학도였던 그는, 불과 십수 년에 걸친 시간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던 나치당을 독일의 최고 권력으로 부상시키고 총통으로 군림하여,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자신을 믿고 따르며 목숨을 바쳐 싸우게 만들었다. 당시 그가 어느 정도로 우상화되었는가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제국, 하나의 총통’이라는 당시의 표어에서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매우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찢어지게 가난한 데다 매일 허황된 공상에만 빠져 있던 형편없는 백수 건달에 불과했던 그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독일의 최고 권력으로 오를 수 있었으며, 세계의 역사를 바꿀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가?
이 책은 히틀러가 어떻게 사람들을 교묘히 설득하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나아가 그 테크닉을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모색해 보기 위해 쓰여졌다.
물론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유태인 학살 등의 만행은 어떤 도덕적 가치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며, 인류 역사에서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정치선전술은 오늘날의 모든 정치인들에게 사용되고 있을 정도이며, 올림픽과 국가관을 연결시켜 신성한 이미지를 창조, 성대한 제전으로 만든 최초의 정치가였다. 결과적으로 그의 잘못된 민족관은 나라 전체를 몰락의 길로 몰아 넣었지만, 그가 만일 유태인 학살 같은 미친짓을 저지르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진정한 조국의 발전을 위해 썼더라면, 그는 독일을 새롭게 재탄생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여러 사람들 앞에 서야 하는 경우가 생기며, 직장에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경우도 생기며, 연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여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히틀러가 사용했던 심리 조작술은 현대인들도 다양한 경우에 응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책에서는 그가 사용했던 인간 심리 조작의 기법들을 분석하여, 그 테크닉을 더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정리하기로 한다.
대중을 사로잡은 히틀러의 심리 조작술
젊은 시절의 히틀러는 대학 입시에 두번이나 낙방하고 싸구려 하숙집에 틀어박혀 허황된 공상에나 빠져있던 패배자 같은 청년이었다. 별 재능도 없었던 미술학도였던 그는, 불과 십수년에 걸친 시간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나치당을 독일의 최고 권력으로 부상시키고 자신은 총통으로 군림하여, 수많은 독일 국민들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게 만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대중을 사로잡는 비법
그 비밀은 히틀러의 대중 선동기술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선전술은 지금까지도 정치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정치인들이 어린이들과 정다운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그 전통은 히틀러가 최초로 만들어낸 것이다.
알기 쉽게 분석한 히틀러의 심리 조작 테크닉
이 책에서는 히틀러의 심리 조작술을 47가지 테크닉으로 알기 쉽게 분해해서 설명했다. 직장에서 부하 직원을 제대로 통솔하고 싶을때,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을 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매력적으로 연출하고 싶을 때 등, 생활속에서 다방면으로 응용될 수 있는 히틀러의 심리 조작술을 이제 손쉽게 익혀보자.
2005년 첫 출간되었던 <히틀러의 대중선동술> 의 4쇄 버전을 연재합니다. 이 책에서는 어떻게 히틀러가 형편없는 백수건달에서 한 나라의 총통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며 어떻게 독일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광기어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그 전략과 방법을 분석하여 소개합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민족관으로 인해 나라 전체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의 대중 선동 테크닉은 오늘날까지도 정치 선전술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 기술을 파헤친 최초의 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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